애니메이션에 빠진 인문학 - 애니메이션과 인문학, 삶을 상상하는 방법을 제안하다
정지우 지음 / 이경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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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애니메이션 방송프로그램 중에서 엄청난 흥행과 성공을 거둔 <진격의 거인>이란 작품이 있었다. 나는 <진격의 거인>을 두고 초점을 식량에 맞추었다. 각 성벽으로 이루어진 도시국가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식량일 것이다. 왜냐하면 식량이란 것은 농경사회와 같은 1차 산업에서 농민에 의해 수확되는 상품이다. 그런데 그 상품은 농민이 물물교환이란 최초의 경제로 통해 상업이 이루어진 게 아니라 모든 식량이 엄청난 거부의 상품 지배 아래 이루어진 것이다. 때문에 식량은 제일 외곽도시가 함락되었을 때 그 진가가 드러난 것이 아니라 가운데 도시가 함락되었을 때 비로소 그 중요도를 인지할 수 있다.

 

물론 제일 외곽도시가 무너지고, 피난민들이 더 안쪽으로 피난오고 나서 가장 큰 문제는 식량이었다. 식량은 한정적이었고, 피난민들에게 나누어줄 식량은 매우 모자란 것이다. 거기에 대해 피난민 중에 수십 만 명을 거인에 대한 검색과 퇴치, 그리고 식량을 위한 개간지로 내모는 장면이 있었다. 거기에 간 수많은 사람들은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거인에게 포식당한 채 죽게 된다. 그렇다면 식량이란 가치로 통해 무엇을 볼 수 있는가? 하다못해 사령관조차도 거인의 대규모 습격에서도 만일 여기를 지키지 못하면 모두 잡혀먹을 것이고, 지킨다고 해도 식량부족으로 모두 자멸할 것이라고 한다.

 

이른바 식량이란 것이 경제구조에서 가장 중요한 수단이고, 국가통제수단에서 제일 중요한 도구이다. 거인이란 존재는 외부의 위험으로 각인되었다면, 식량은 내부의 문제로 들어갈 수 있다. 식량의 보급은 결국 생명과 직결되고, 식량으로서 인간은 만인 대 만인이란 투쟁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식량과 거인으로 가치로 본 문화적 상황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 것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미국 저명한 문화인류학자인 마빈 해리스의 <문화유물론>이란 책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인간의 문화를 지배하는 것은 관념인가? 물질인가?

 

모든 문화가 조성되는 것은 물질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이유는 당초에는 인간이 생태적 조건, 기후적 조건, 지리적 조건, 지질학적 조건 등과 같은 환경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격의 거인에 대한 논쟁과 담론에서 일본극우성향이 담겨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견해로 작품에서 보여줄 모티프이지, 그 자체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일본이란 나라가 가진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현상에서 젊은 세대들이 겪는 사회적 갈등과 좌절이 기초해서라고 본다. 이미 기성세대에 의해 경제구조는 이루어져 있고, 차후 세대는 그곳에 진입할 수 없다. 게다가 <진격의 거인>에서 거인이란 존재는 누가 무엇을 위해 그들을 보내고, 어떻게 거인이 생겼는지 알 수가 없다.

 

근본을 알 수 없는 거인들이 외부에 있다가 어느 순간 내부의 스파이에 숨어있고, 마지막 편에서는 거인이 성벽 안에 숨어 있다. 그렇다면 거인이란 적은 외부의 적인지 내부의 적인지 다시 의문이 생기는 순간이 왔다. 이런 점을 두고 페이스북에서 만화평론가인 박인하(청강문화산업대학 만화창작학과) 교수님은 <진격의 거인>이 단순한 우익적인 요소로 보는 게 아니라 일본 내의 자기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딜레마에 놓여 있다고 여겼다. 그 지문을 보면 아래와 같이

 

“예컨대 진격의 거인 경우 잇쇼켄메이의 정신이 군국주의의 정신일까, 아니면 또 다른 어떤 역사성이 있는 것일까에 대한 고민이 필요할 것 같고요. 더불어 전 진격의 거인에서 잇쇼켄메이 정신보다는, 울트라맨 이후 익숙하게 반복되는 공포 메타포인 거대한 타자의 내습이 훨씬 더 강력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 벽에 둘려 쌓인 현재, 그리고 그 안에서 목숨을 건 조사병단. 이게 군국주의일까요, 아니면 현대 무기력한 일본사회의 모습에 대한 메타포일까요? 전 후자 쪽이라 생각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내가 주목한 <애니메이션에 빠진 인문학>에 대해 관심이 보인 이유는 인문학적 관점에서(물론 박인하 교수님은 문학전공자다) <진격의 거인>을 보자는 시선이 무엇으로 연결 되는가이다. 이 책에서는 애니메이션을 하나의 작품 개인적인 독립개체로 보기보다는 하나의 사회적인 흐름과 역사적인 조건 그리고 문화적인 현상으로 풀이한다. 진격의 거인에서는 개인과 사회라는 자아와 거대한 타자를 말한다. 개인의 존재성에서 우리 인간은 국가란 무엇이고? 사회란 어느 존재인가? 우리의 가치가 우리를 위한 것이 결국 국가와 사회의 발전이 되는지, 혹은 그것과 상관없이 국가와 사회가 발전하는 지까지도 말이다.

 

<애니메이션에 빠진 인문학>에서 보인 개인과 타자의 관계를 중심으로 생각해보면 현대사회의 우리 인간은 과연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라는 의문을 던진다. 자기가 살아오는 조건과 현실 그리고 이상에서 말이다. 따라서 시초를 <천원돌파 그렌라간>과 <윈피스>부터 시작이다. 알다시피 <천원돌파 그렌라간>은 일본 최고의 오타쿠 집단인 가이낙스에서 만든 작품이다. 엄청난 흥행과 더불어 작품 자체가 열혈이란 점에서 많은 남자팬들을 만들기도 한 작품이다. 문제는 <천원돌파 그렌라간>이란 작품이 말하는 근대성이란 무엇인가이다.

 

거대한 목적을 위한 계속되는 진화에서 인간의 딜레마가 나온다. <천원돌파 그렌라간>을 두고 전에 우익적 성향이 반영되어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일본이 아시아에 대해 서구문명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모두 하나로 단결해야 한다는 이론이었다. <천원돌파 그렌라간>을 보면 계속 그렌단의 규모는 주인공을 토대로 규모가 커지고 결국에 나선왕을 쓰러뜨리고, 우주와 은하계까지 넘어간다. 그런 점에서 계속 자기의 영역을 확장하고 모든 것을 자신의 세력과 함께하여 계속 진행되는 진화적인 관점은 대동아공영 전술적인 요소가 반영되었다는 관점은 어느 정도 부합된다.

 

그러나 그런 성향은 일본이란 국가적 특성, 즉 섬에 위치한 나라에다가 주변에 바다로 인해 더 이상 확장할 수 없는 지정학적인 조건에 기인한다. 그런 성향은 <기동전사 건담>에서 지구인이 지구가 아닌 우주를 선택한 것은 지구환경이 척박해지고, 살아가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경제성장이란 눈부신 신화에서는 숨은 이야기가 존재한다. 물가는 오르고, 부익부 빈익빈이란 치명적 경제적 양극이다. 이런 양극으로 인해 “몫을 가진 자”와 “몫이 없는 자의 몫”에서 가지지 못한 자들의 몫이 바로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소외다.

 

왜 <진격의 거인>이 흥행하고, 국내에도 큰 호응이 오는가? 최근 88만원 세대와 같은 젊은 세대들의 좌절을 어떻게든 뛰어넘고 싶어도 넘지 못한 벽이 되었다. 만약 그 벽에 향하여 전력 질주하다가 바로 쓰러진다. 결국 자기나라에서 이룰 수 없는 조건, 그렇다면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야 하나, 그것조차 어렵다. 20세기는 1차 및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이미 판도는 구성되어 있고, 21세기에 오면서 다른 국가를 침략하여 식민지를 삼는 것은 국제적인 위협요인이 된다. 그런다고 상대편에서도 호락호락하게 넘어가는 것도 아니고, 국내적으로 정착된 안정을 파괴할 수 없다.

 

<천원돌파 그렌라간>에서는 지하세계의 사람들처럼 그저 위기에 떨며 살 것인가? 아니면 거대한 운명이란 타이틀로 투쟁할 것인가? 만약 나선왕이 최후의 적이라면 식민지에 대한 열망일지 모르나, 나선왕 역시 과저에 안티-스파이럴과 싸우던 전사였고, 그는 인류생존을 위해 인류를 지하로 가두었다. 작품에서 100만 명이 되면, 안티-스파이럴이 등장하여 인류를 모두 멸망시킨다고 한다. 일본이란 국가와 민족이 지닌 콤플렉스 요인이 하나의 모티프로서 작용할 수 있지만, 결론은 인간의 진화와 퇴보라는 선택의 갈래였다.

 

그러나 인간의 기술과 문명의 발전은 과연 진보했고, 인간은 그런 과정을 통해 진화를 했는가?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저자분도 아도르노와 같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학자로 통해 인간의 진보는 진정한 진보가 아니라 퇴보라는 것이다. 작품에서도 스스로 희생되는 사람들은 모두 이런 말을 한다. “내가 앞에 갈 수 있는 것은 뒤에 따라오는 자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이다. 결국 진화라는 것은 누군가 희생되거나 퇴화되어야 그 모습을 알 수 있다. 누군가 사라지기 때문에 진화를 한다. 그런 것은 인류문명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문명의 발전이 더딘 미개부족은 무기와 문명을 지닌 사람에 의해 무참히 죽는다.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란 서적에서 인간의 문명이 결국 덜 발달된 문명을 가진 부족을 멸망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근대라는 관점은 결국 거대한 국가의 형성에 의해 조건이 되고, 그 조건에서 식민국가와 지배국가로 나누어진다. <천원돌파 그렌라간>에서는 그런 근대적인 국가관이 담겨있으면서 한편으로 인간의 진보와 퇴보를 다룬다. 그런 의문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부터 시작하여 21세기에도 계속 의문되는 상황이다. 근대라는 정체성에서 거대서사가 주요관점이라면 근대를 지난 탈근대 즉 post-modern이 도래한 것이다.

 

<윈피스>는 바로 <천원돌파 그렌라간>과 달리 근대성에서 탈근대성이란 개인의 초점에 맞추어져 있다. 우리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천원돌파 그렌라간>에서는 오로지 나선왕의 타도에서 안티-스파이럴과의 투쟁 그리고 화해이다. 왜 인간은 문명사회에서 억압받을 수밖에 없는가?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계몽주의 사상가이면서도 반계몽적인 사상을 남긴 장 자크 루소의 <학문과 에술에 대하여> 및 <인간불평등기원론>으로 통해 인간이 자연적인 존재가 아니라 인위적인 존재가 되어 그것이 불평등과 사회적 부조리를 만든다고 한다. 인간은 누구나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고, 자신의 욕망을 위해 타인을 희생한다고 말한다. 특히 루소의 경우 법은 권력자를 위해 존재하는 악적인 존재라고 여겼다.

 

왜 이런 생각이 드는가? 독일 심리학자인 하버트 마르쿠제의 <에로스와 문명>에서 “인간은 자연을 착취하다가, 자연의 착취가 불가능해지면 인간을 착취한다.”고 한다. 안티-스파이럴이 인류가 멸망하는 이유는 인간이 가진 욕망과 이기심, 그로 인한 전쟁과 환경파괴 등이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인간은 공략대상이 자연이 아닌 인간으로 행해지고, 결국 인간을 지배하는 인간으로서 우월감을 만끽한다. 루소가 지적하는 인간의 지배는 단순히 농노사회나 봉건사회의 계급만이 아니라 학문이나 예술도 포함된다. 그런 점에서 피에르 부르디외의 <구별짓기> 역시 자본이란 화폐자본이 아니라 지식, 예술적 취향, 취미생활 등으로 문화자본이 존재한다고 한다(물론 내가 적는 글 역시 지식과 미학적 요소가 있기에 이것 역시 문화자본이다. 권력에 대한 해체에서 지식이 권력을 생산하는 점에서 그 권력의 지식을 해체하는 것 역시 지식이다).

 

인간에게 불평등이란 조건은 영원불멸하다. 그렇다면 불평등이 없으려면 나선왕처럼 압제로 통해 모두 같은 조건에 처하게 하는 점이다. 물론 그 조건 아에서 불평등은 생기는 게 아이러니다. 근대성을 추구하는 <천원돌파 그렌라간>은 모두가 같은 큰 뜻을 위해 싸우는 거대서사로 진행된다. 거대서사와 달리 <윈피스>는 무엇인가? 작가의 의도대로 <윈피스>는 개인적 목적이 하나의 사회를 이루는 점이다. 즉 리오타르가 제시하는 <포스트모던적 조건>을 해적이란 존재로 보이는 것이다. 각자의 목적을 두고 서로 인정하는 조건에서 <윈피스>는 자유분방함을 보여주고 있다.

 

작품 내에서 세계의 국가는 없으나 단지 해군이란 기관이 정의라는 이름으로 해적과 대립된다. 그러나 해군을 모두 봐도 모두 정의가 있는 게 아니고, 때에 따라서는 부당하며, <윈피스> 내의 주인공과 대립된다. 해군이란 조직은 국가권력이다. 어떻게 보면 아나키스트적인 요소로 무정부주의적인 행동을 보여준다. 국가와 사회는 관계없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나가는 점에서 매우 낭만적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작가도 지적하고 나 역시 지적한 것처럼 <윈피스>에서 현실적 조건이 없다. 우리 인간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 밥을 먹고 일을 하고, 일상생활을 유지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생활적 요소가 부재된 <윈피스>는 하나의 꿈과 같은 존재다. 애니메이션이 일반인들에게 유치할지도 모르나, 애니메이션이 나름 깊은 학문적 연구대상이 되는 원인은 애니메이션의 정의에서 생각할 수 있다. 가령 신화는 그 민족이 가진 집단적 무의식이라면, 꿈은 개인의 신화다. 그런 신화적 요소를 가장 잘 돌출할 수 있는 매체가 바로 애니메이션이다. 일단 애니메이션에서 Anima란 단어는 라틴어로 영혼이고, Animate란 존재하지 않은 존재를 존재하게 하는 혼을 불어넣는 뜻이다.

 

그렇다면 혼이 없는 존재가 혼을 가진 하나의 매체가 되는 게 Animation이다. 참고로 종교사상에서 Animism이란 종류가 있다. 무생물에게 영혼이 있다. 이것은 주로 일본에서 통용되는 민속적인 종교적 관념이고, 한국에도 존재하는 종교적 관념이다. 인간의 의식하는 것과 동시에 무의식적인 요소로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진다. 거기에 인간이 일상생활에 억눌린 억압에 대한 해방과 더불어 터부의식을 보여준다. 그리고 평상 시 자신이 가지지 못한 영웅의 모습을 구현하기 위해 애니메이션 안의 주인공에 열광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poetics)에서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라고 한다. 역사란 어느 특정 개인의 이야기지만, 시란 특정 개인이 아니라 누구나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즉 개연성이란 것이고, 고대 그리스에서 <오이디푸스왕>의 비극적 이야기를 볼 때마다 모든 사람들이 비참한 얼굴로 탄식을 했다고 한다.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지 않고, 어머니와 성관계를 나누어 아이를 출산하지 않았지만, 자신 역시 그런 비극이 올 수 있다는 하나의 개연성에 대해 돌아보는 것이다.

 

따라서 영웅적이고, 자유분방한 <윈피스> 주인공에게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존재는 현실에서 억압당하고 자신을 드러나지 못한 채 타인에 의해 조성될 수밖에 없다. 예전에 마단 사럽의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서적에 소개된 인물로 자크 라캉이란 인물이 있었다. 그가 남긴 유명한 말로 “우리가 사물이 아닌 타자의 욕망을 욕망할 떄 비로소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욕망은 정지하지 않고 움직인다. 욕망은 끊임없이 부인될 수 있지만 지속되는 것이다.”, “욕망은 몸이 아닌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한에서 인간적이다. 다시 말해 주체가 '욕망되기를' 원한다면, 아니, 그의 인간적 가치로 '인정받기'를 원한다면 인간적이라는 것이다. 모든 욕망은 가치를 위한 욕망이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은 진정 '인정(recognition)'을 욕망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무엇을 인정받기 위해 살아가는가? 근대성에서 현대성으로 넘어갈 때 포스트모던 시대에 도래함에서 개인주의가 활성화되고, 자기중심적인 존재로 되었다. 그것은 근대시민사회에서 인간은 누구나 이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고 하나, 다르게 생각하면 인간이 근대사회 이전에 농경사회에서는 대가족이라면, 지금은 대가족에서 핵가족이 되어 가족이란 커뮤니티 조건과 능력이 축소되었다. 교육과 출산 등과 같은 크고 작은 일이 가족이나 혹은 부족에서 처리했다면, 이제는 가족 대신 사회에서 처리한다.

 

우리의 존재는 결국 사회생활로 통해 인정받기 원하며, 거기에 대해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기를 바란다. 결국 기표라는 표상에 의존하게 되고, 장 보드리야르의 의견처럼 인간은 기호를 소비하고, 상품은 기호고, 기호는 상품이게 된다. 기호라는 것은 이미지이기 때문에 인간은 미디어란 정보에 의해 사로잡히고, 거기에 모든 것이 매개가 된다.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처럼 스펙타클이란 이미지가 매개되는 사회다. 이미지란 표상의 기호가 결국 인간을 좌우한다. 우리는 신발을 신는 것이 아니라 나이키를 신고, 차를 모는 것이 아니라 벤츠를 몬다.

 

인간의 가치가 하나의 기호로서 정해지고, 그 기호는 자본이란 매체로 통해 결정된다. 그런 와중에 현대인들은 자본주의 사회구조에서 자본에 의해 자기 삶을 구분 당한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의 존재성은 무엇인가? <강철의 연금술사>는 저자가 생각하는 가치관인 것 같았다. 자신의 팔은 없고, 동생의 육체는 소멸하여 갑옷에 혼이 들은 채 모험을 하는 형제, 하지만 형제는 그 어떤 정의감이나 혹은 이상을 위해 활동하지 않는다. 단순히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리고 보편적인 도덕에 의해 행동한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선의 가치란 자신의 이익과 상관없이 순수하게 타인을 위해 베푸는 정언명령이란 개념이 있다. <강철의 연금술사>에서 보이는 형제의 활동은 거대한 음모나 국가적 위기를 대응이 아니다. 단지 자신의 현실에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고, 그 공간에서 형제의 우애, 친구와 우정, 주변인들과 화목한 생활을 바란다. 그리고 그것으로 통해 사회에는 의도하지 않은 행복을 준다. 그들이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정의의 사도보단 인간이 가진 감정에 의해서다. 인간이 타인에게 베푸는 이유는 이성보단 감정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이성은 논리로서 움직이고, 그것은 자신의 조건과 현실에서 손익을 확실히 결정할 수 있다. 그러나 감정은 손익의 관계를 넘어 그 자체로 하고 싶은 것이다.

 

애니메이션에서 보이는 세상은 분명 허구다. 애니메이션은 현실부재라는 안티-리얼리티이고, 실사영상은 파생실재라는 리얼리티를 부여한다. 하지만 실사영상의 문제점은 리얼리티가 오히려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하이퍼 리얼리티를 구성한다. 애니메이션에서는 현실부재라는 조건에 의해 보는 세계가 가상임을 인식한다. 물론 지나치게 몰입한 사람의 경우 존재하지 않은 존재가 있다는 여기는 과도한 행위를 하나, 애니메이션으로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존재성에 대한 고찰이다. 이 책에서 <충사>에 대해 논하는데, 충사만큼 Animism(애니미즘)을 잘 구현한 작품은 없다. 눈에 보이지 않은 그 무엇에 대해 말이다. 보이지 않은 것을 보이게 한다는 것은 우리 인간의 상상력을 풍부하게 하고 사고의 영역을 확장시킨다.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다방면으로 고찰한다. 가령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에서 흑백으로 구성된 화면에 주인공은 고양이다. 고양이는 주인인 젊은 여성을 보면서 대사를 한다. 고양이가 인간을 본 후에 말을 하고 사고할 수 있지 않으나, 그것으로 통해 보는 것은 인간사회의 소외와 외로움, 그리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이다. 고양이로 통해 보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로는 나츠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가 있다.

 

고양이가 보는 일본 메이지유신 후의 사회란 정말 발전하고 좋은 사회인가? 오히려 인간은 더 비참하게 보이고, 어중간한 요소가 사라져 그것을 풍자한다. 죽은 지식인의 사회처럼 애니메이션은 우화적인 요소와 문학적인 요소가 존재한다. 그런 이런 애니메이션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보고 느낄 수 있는가? 저자의 도서에서 대안은 역시 애니메이션 거장인 미야자키 하야오였다. 미야자키 감독은 항상 작품 내에서 인간과 자연의 공존, 그리고 인간과 다른 존재의 부딪힘이었다. 인간은 자연과 공존하고 거기에 같이 이웃처럼 지내는 <이웃집 토토로>나, 인간과 자연의 갈등을 그린 <원령공주>, 과거(마녀)와 미래(과학소년)의 공존을 그린 <마녀배달부 키키> 등을 보면 우리는 여러 가지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자본주의사회에서 인간이 인간이면서 인간의 본연의 모습을 가지지 못한 점에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인간의 감수성을 되찾을 것을 전달한다. 물론 그의 전달방법 역시 자본주의적이나 말이다. 인간이란 경제활동과 사회활동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세계를 찾고, 인간적인 요소를 찾아가기를 바란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뒤를 이을 감독으로 최근 호소다 마모루 감독이 언급되었다. 그의 작품인 <시간을 달리는 소녀>와 <늑대아이>에서 전자는 인간이란 시간적 존재이듯이, 비가역적인 시간에서 가역적인 행동으로 통해 한 소녀가 알아가는 인간관계를 보여주고, 후자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름을 이을 자연과 인간에 대한 화해와 경계다.

 

늑대아이는 인간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늑대로 살아갈 것인가? 정체성의 여부에서 남매는 다른 길을 선택하나, 그래도 어머니는 모두 좋다고 여긴다. 저자와 조금 다른 방향으로 가나, 아니 비슷할지도 모른다. 인간에게 삶에 대한 욕망인 에로스와 더불어 죽음의 욕망인 타나토스가 존재한다. <늑대아이>에서 아버지는 가장 행복해야할 순간에 죽음을 맞이하여 그 자신이 늑대라는 정체성을 드러난 상태이다. 그에 반해 계속 동물원에 살아가는 늑대들은 자신의 생물학적 존재는 늑대이나 늑대라는 자연적 존재로서 드러나지 못한다. 결국 살아있어도 살아있지 못한 늑대로서 늑대인 채로 죽는 아버지는 일본의 유미주의를 표현한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가장 아름다울 때 죽는다. 그리고 일본에서 가장 좋아하는 놀이인 하나비 불꽃놀이에서 불꽃이 터질 때 가장 예쁘나 소멸한다.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사쿠라, 벚꽃나무 역시 벚나무의 꽃잎이 나무에 붙을 때보단 떨어지는 순간이 아름답다고 한다. 결국 떨어지게 되면 다시 되돌리지 못할 죽음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단지 1년이 지나면 다시 벚나무의 꽃잎은 활짝 피고 새로운 생명과 죽음이 반복된다. 죽음에 대한 욕망은 인간에게 삶이란 새로운 욕망과 희망을 주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곧 죽는 것과 같다는 것이 인간이고, 죽음이 있기에 인간이 살아있음을 증명한다. 그러나 인간의 삶에서 하나 밖에 없는 인생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는 의문에서 우리는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지금 나에게 행복하냐는 말을 하면 아마 나는 행복하지 못하다고 할 것이다. 행복하고 만족하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지 못한 사람도 많다. 물론 친구를 만나고, 재미있는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은 즐겁고, 그건 분명 행복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개인 스스로가 자신의 존재를 만들 수가 없고, 결국 사회적 조건에 의해 변해간다.

 

내일 당장 내 친구가 자동차에 치일지도 모르고, 형제 중에 로또 복권이 당첨될지도 모른다. 그런 조건에서 우리의 삶을 돌이켜본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물론 애니메이션을 인문학으로 본다고 해도 답이 나온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으로 통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성에 대해 생각해 볼 수는 있다. 왜 그런가? 것과 동시에 어떤 것이 우리의 마음을 자극하는가? 남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보다 자기가 느끼는 그 자체를 좋아하는 것이 행복을 찾는 길 중에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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