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 재장전 - 자본주의와 코뮤니즘에 관한 대담
제이슨 바커 엮음, 은혜.정남영 옮김 / 난장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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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사상에서 조금 변화가 도래하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이 있었다. 물론 국내에서는 그렇게 쉽게 찾아볼 수 없다. 한국에서 정치사상이나 철학과 같은 학문은 거의 외부에 드러나지 않은 채 그저 정치철학이란 대학교 학부 중에 하나이고, 현실에 그다지 반영되지 않은 학부의 과목에 해당될 뿐이다. 한국에서 철학을 논한다는 것은 사실 쉽지 않다. 한국의 교과서로서의 철학도서는 출간되어도 철학이란 실천적 행위로서는 상당히 무리가 따르는 공간인 듯하다. 철학이란 인간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학문으로 여러 가지 학문과 연계가 될 것이다. 의학, 환경, 생물 등과 같은 과학이나 공학에도 연계되고, 경제와 사회 등과 같은 우리 현실과도 바로 연결된다.

 

철학이란 없는 세상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보면 약육강식의 자연생태계 시스템이 그대로 반영된 곳으로 합리화된 야만으로 이루어진 장소로 변할 것이다. 그래도 자연생태계 시스템은 조금 수월할지도 모른다. 본래 자연생태계 시스템은 약육강식이란 시스템과 더불어 자연계 내부의 균형과 자체정화라는 시스템이 추가로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하버트 마르쿠제나 혹은 많은 학자가 이야기하듯이 인간에 대한 인간의 착취행위가 시작된 것은 바로 인간이 자연에 대한 착취가 도를 지나치면서 인간에 대해 착취가 시작되는 것이다.

 

인류의 문명사에서 인간 스스로들에게 행하는 착취행위는 농경사회에서 하나의 중앙집권화로 통한 권력형성으로 비롯한 사회구조로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이원화된 계급체계는 시작되었다. 따지고 보면 이른바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계급투쟁은 흔히 마르크스주의자에 의해 많은 이론이 전개되었으나, 실상은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부터 시작된 점과 인간의 불평등한 원리는 인간 스스로의 자연적인 존재가 되지 않고, 자연으로부터 계속 인위적인 존재로 변모하면서이다.

 

그러나 지금 세계 인구가 60억 내외이고, 인간 스스로가 자연주의자로서 자연 본연에 맞추어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수많은 인구가 식량과 자원이 필요하고, 그것을 만족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영토와 원자재가 필요하나, 이미 정해진 규모의 지반과 원자재만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인간은 스스로의 기술과 문명을 발전시켜 그것을 하나의 생존수단으로 영위해야하는 입장인 점이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한다. 생산과 소비가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당초 우리 인간의 경제활동은 물물교환에서 비롯되었으나, 물건의 가치를 결정하는 화폐라는 것이 등장한다.

 

화폐의 등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 체계구조에서 화폐라는 가치로 통해 사회와 경제, 그리고 정치적인 변화도 움직인다. 화폐는 자본이란 거대한 이름 중에 하나로서 우리가 자본주의 경제구조에서 세계는 자본으로 통해 관계를 맺어가고 있다. 이런 관계 속에 아주 유명한 말이 있다. 자본은 국경을 초월한다. 자본이란 거대한 물결은 국가와 인종 심지어 사상을 초월한다. 자본주의적 경제구조와 정치적 시스템은 개인사유를 인정하는 자유민주주의적인 의회정치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최근 2010년 전후로 발생한 미국의 금융위기다. 예전에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미국에서 어느 고위관리자의 실책으로 심각한 경제적 손실이 발생했는데, 그들의 성과를 치하하기 위해 국가에서 수많은 돈을 주었다고 한다. 그들의 잘못된 운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피해를 보고, 가계가 파산하고, 국가는 부채가 늘어났다. 지금 상황에서 다시 생각하면 2010년 전후의 미국에서 소비촉진이란 이름 아래 경제적 빈곤층에서 무리한 대출을 실시한 것도 또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부채를 억지로 늘려 빈곤계급층에게 화폐를 대출하고, 덕분에 그들은 과소비를 하고 파산하였다.

 

갚은 능력도 없으면서도 그들은 계속 생활을 위해 경제활동을 해야 하며, 대출해준 은행은 부채를 상환 받아야 하나, 그것이 용이하지 않다. 그 여파로 국가부채는 100~150% 증가했고, 부채로 늘어난 화폐유통과 대출자들의 소비로 인해 물가 역시 오른다. 그렇다면 은행에서 대출한 돈과 대출자들이 사용한 돈은 다 어디로 갔는가? 그리고 그 책임은 다시 누구에게로 갔는가?

 

자본주의 경제구조에 대해 생각하면 인간의 이기적인 본심과 매우 잘 맞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른바 약육강식이란 냉혹한 단어도 적용되겠으나, 그 약자나 강자나 자본 앞에서 모두 같은 모습이 된다. 왜 그럴까? 개인적으로 미국도 부동산 문제로 경제적 피해나 손실을 보는 경우가 있었고, 한국에서 부동산에 대한 문제로 재미있는 현상을 목격된다. 인간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집이란 공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집을 사기 위해 많은 금전과 그것을 충당하지 못할 경우 대출을 받아 집을 사는 경우가 많다.

 

집을 사고, 거기서 집의 주인이란 이름으로 권리를 행세해야 하나 집을 사지 않고 전세 내지 월세 등과 같은 대여형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실제 집을 살 수 없어서 못 사는 경우도 있겠지만, 약간 무리하면서도 집을 살 수 있는 경제적 여유가 있어도 사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 이유는 부동산 가격이 증가하여 집을 샀는데, 그 부동산의 가격이 폭락할 수 있다는 불안심리라는 점이다. 최근 국내 부동산 경기에 대해 분석하기가 어려우나, 적어도 내가 살아가는 주변의 공간(그것이 행정구역으로 구의 단위 내지 시의 단위)을 지켜보면 지난 10년 동안 부동산 가격이 2배가 오른 점이다.

 

부동산이 2배? 보통 1년 물가가 4%가 오른다고 해도 10년 전의 부동산의 공시지가가 ㎡당 100만원이라면 지금의 시점에선 148만원이어야 한다. 그것도 복리적인 계산방법을 취해도 말이다. 그러나 갑자기 부동산 가격은 오르고, 주변 아파트의 가격은 거의 2배 이상으로 오르는 쾌거(?)를 이루었다. 그렇다면 여기서부터 또 문제다. 그렇다면 이런 부동산 가격에 따른 소비자들의 경제지수는 어떤가? 우리 국민 총소득은 연간 20,000달러다. 20,000달러를 1,080원/달러로 환전하면 21,600,000원이다. 참고로 경제활동은 20세 미만의 미성년자나 60세 이상의 노인, 그리고 여러 가지 조건들을 생각하면 경제활동 1인이 벌어들이는 금액은 평균 50,000,000원 정도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 50,000,000원 정도로 벌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물론 내가 듣기론 국내 연봉 1억이란 숫자를 가진 사람이 수십 만 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러지 못한 사람은 수 백 만 명이란 점이다.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따른 임금조건은 개인의 성과에 따라 조정되는 것이므로 문제가 되지 않으나, 지나친 금전적 이익과 거기에 반대에 놓인 임금최저 수준의 사람이 차이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미국의 경제적 문제와 금융위기가 놓인 것도 바로 이런 문제로부터 시작될 수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가령 우리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경제능력을 가져야 한다.

 

만약 비정규직 내지 일용직 같이 임금수준이 낮은 사람이 늘어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물론 이들은 생계를 위해 요리를 해먹고, 추위와 더위를 해결하기 위해 옷을 사고 집에서 휴식을 취할 것이다. 문제는 임금수준이 낮은 만큼 거기에 대한 대처방안이 없다는 점이다. 다시 돌아가 부동산 문제로 가보자. 국내에 주택보급률이 늘어나는데 크게 기여한 것은 아파트의 보급이고, 개인의 소유로 이루질 수 없는 아파트에 대해 공기업에서 운영하는 임대아파트가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 거기에 머물 수는 없다.

 

높은 부동산 구매가격은 중산층(중간 이하기준)을 비롯한 중산층 아래의 빈곤층까지 집을 어느 정도 시간을 투자하여 구매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그런데 이런 복잡한 상황에 웃기는 코미디가 보인다. 다들 자기의 집값이 오르기를 바라는 점이다. 집이 없는 사람의 경우 현재시점에 선택할 수 없겠으나, 평수의 규모가 낮거나 혹은 집의 질이 떨어지는 사람도 집값이 오르면 환영한다. 아니라면 취득세 내지 등록세와 같은 세금이 낮아지면 좋아한다. 물론 이런 사람들은 주변에 아주 많이 있을 수 있으나, 개인적으로 나는 이런 사람들을 어리석거나 멍청하다고 여긴다.

 

자신의 아파트의 가격이 올라 그것을 팔고 다른 아파트로 갈려고 하면, 다른 아파트 역시 기존 가격보다 더 높은 가격으로 올라갈 것이다. 규모나 질이 좋으면 ㎡당 금액이 더욱 올라간다. 결국 자신의 집값이 오른다고 좋아하면 자신이 이사 갈 집은 더 심하게 오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도시 변두리에서 살다가 자꾸 시외 쪽으로 이사 가는 경우가 많다. 집의 가격이 오른 만큼 미개발된 곳의 토지는 그나마 부동산 가격이 낮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부터 문제가 발생한다. 그곳으로 가게 되면 충분한 인프라 내지 삶의 조건은 보유해도 더 이상 도심지 내부로 진입할 수 없다. 평생 거기서 살아야 하는 점이다.

 

한국과 같이 교육열이 높고, 학군에 대한 문제에서 도심지 외부로 밀려나게 되면 불리한 위치에 상황에 놓인다. 우리 인간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의 행복을 위해 살아가나 왜 자꾸 역으로 되는 것일까? 자본주의 경제구조에서 자본주의가 결국 자본주의를 종언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은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만이 아니라 일반이론을 저술한 미국 경제학자 케인즈도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그런다고 자본주의가 자본주의 그 자체를 나는 종언하게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자본주의가 자본주의 사회구조에 살고 있는 인간을 종언까지는 아니더라도 쇠퇴의 길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약육강식이란 냉혹한 자연생태계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그 만큼의 회복할 수 있는 정화능력과 번식능력이다. 최고 정점의 포식자가 존재해도 그들은 포식당하는 동물만큼 번식을 많이 하지 않으며, 필요한 만큼의 식량을 공급받으면 거기서 중단한다. 하지만 인간의 자본에 대한 욕망은 필요한 만큼의 수액이란 정해져 있지 않은 채 계속 증식하고, 약육강식에 의해 낙오되는 인간은 대체되는 인간이 있을망정 보충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자연 속에 위치하고 있는 석유가 계속 사용하면 언젠가 고갈되듯이 낙오된 인간 역시 언젠가는 한계가 온다는 점이다. 단지 견딜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의 재생산이란 출산과 양육, 교육이란 사회적 시스템이 가족이란 소그룹을 어느 정도 관여하기 때문이다. 만약 출산이 줄어들고, 노동인구가 감소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한국사회 뿐만 일본을 보면 계속 신생아 출산수치가 저하되고, 노인인구가 증가하여 노령화되어 간다. 노인의 노동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나, 그것이 노인 스스로의 사회적 가치를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기 보단 자신의 경제적 궁핍에서 시작된 것이라면 사회적 시스템은 역시 문제가 있다는 의미다.

 

그런 점에서 왜 8명의 정치철학자들은 Marx라는 철학자 아니 사회경제학자의 학문을 재장전하는 것일까? 20세기 초반 볼셰비키혁명과 더불어 러시아의 소비에트는 사회주의라는 공상적 유토피아를 목표로 건립되었으나 레닌 사후 스탈린집권 이후부터 심각한 경제적 문제와 냉전시기의 공포정치 등의 문제를 보였다. 그러나 결국 스탈린에 의해 만들어진 사회주의는 결국 실패한 것이 보였고, 그것이 분명 마르크스의 의도와 관계없이 만들었으나, 소비에트를 창시한 자가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자인 레닌인 점에서 그 책임을 회피할 수 없었다.

 

그래서 20세기 소비에트 해체 후에 마르크스는 과연 틀렸는가에서 21세기에서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 등장했다. Marx Reloaded라는 이 서적은 원래 다큐멘터리 TV방송에서 시작된 영화다. 이른바 현실의 경제문제가 어떤 식으로 문제가 있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8명의 정치철학자와 대담을 만들어진 것이다. 영화를 보면 맨 처음 낯선 방에 어느 한 남자가 마르크스를 기다리는 모습이 나온다. 그는 레온 트로츠키, 레닌과 같이 러시아혁명을 일으켰으나 스탈린에 의해 숙청되어 1940년 멕시코에서 암살당한 인물이다.

 

그가 자신보다 반세기 전후로 활동한 마르크스와 만난다는 애니메이션의 발상과 영화 metrix에서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보여준 빨간 알약과 파란 알약에서 선택이 나누어진다. 푸른 알약은 현실에서 만족한 채 조금 불편한 것은 감수하고 살 것인가? 아니면 빨간 알약을 먹고 괴롭지만 진실을 알고 살아갈 것인가라는 것이다. 알약은 트로츠키가 마르크스에게 던지는 것보다 사실 8명의 철학자에게 돌아가는 화살이다. 이들은 현실의 경제구조를 거시적으로 바라보나, 그 거시적인 구조에는 아주 미미한 사람들이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문제를 알았고, 거기에 대한 원인점도 같이 들여다본다. 나머지는 여기에 대한 대안이란 무엇인가? 프랑스 근현대 역사는 혁명의 역사라고 불려도 무방하다. 그런데 최초의 혁명인 1789년 프랑스대혁명 이후 새로운 계기가 1871년 파리코뮌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프랑스대혁명이 로베스피에르와 당통 등과 같은 지식인 내지 부르주아에 의해 만들어진 혁명이 아니라 파리 시민들이 스스로 결집된 행동이었다. 지금의 조건에서 우리들이 무엇을 할 것인가? 이른바 자본주의라는 잔혹한 현실에서 대안으로 파리코뮌 정신과 같은 코뮤니즘이 필요한 것이다.

 

몫을 가진 자의 몫과 반대되는 몫을 가지지 못한 자의 몫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 몫에서 대안은 결국 공동체의식이란 점이다. 19세기와 21세기의 차이에서 이 책에서 반드시 알리는 것은 19세기의 노동자는 공장이나 농장이었으나, 이제는 회사사무실 앞에 컴퓨터를 바라보는 정신노동자와 전화기를 받아주는 감정노동자도 포함된다. 이전에 물건이 화폐의 가치를 따질 수 있었다. 그것은 물에 보이는 물질적인 조건에 의해 화폐가치와 노동가치가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젠 물질적이지 못한 노동조건들이 대두했으며, 경제체계는 2세기 전의 농업과 공업이 중심이 아니라 3차 산업인 서비스라는 점이다.

 

또한 경제적 계급분석에서 경제문제의 피해대상자는 최하층의 빈곤계층이 아니라 중간계층도 포함된다는 점이다. 최하계층에서는 임금수준의 미달로 그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윤이란 극히 제한적이나, 중간층은 아직 얻을 수 있는 이윤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위에서 한국 부동산과 통화유통 증가에 따른 인플레이션은 중간층을 상대로 충분한 이윤을 낼 수 있다. 그 말은 충분히 착취할 수 있다. 착취라는 것은 마르크스의 노동에 따른 잉여착취도 있으나 이미 루소에 의해서도 증명되었다.

 

마르크스의 착취는 산업시대라는 점이고, 루소의 관점은 봉건사회에서 영주와 농노의 관계다. 단지 이름과 상황만 바뀌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 관계는 생산에서의 관계이지 소비의 관계에서는 다른 문제다. 스펙타클의 사회처럼, 스펙타클은 이미지를 매개로 하는 사회다. 즉 인간의 관계는 이미지로 이루어진 미디어로 의해 조성되는 것이다. 우리는 일을 할 때만 노동하는 게 아니라 TV에서 필요 없는 방송이나 광고 등에 의해 노동을 하고 있는 셈이다. 시청료의 관계에서 광고 역시 시청률에 의해 따라 관계되고, 우리는 무리한 광고에 노출되어 정신적 여가노동을 하는 것이다.

 

이런 관계에서 우리는 필요 없는 소비 내지 더 나아가 과소비를 하게 된다. 흔히 개성시대라고 하여 개인의 취향 내지 개성이 존중되나, 사실 그 개인성의 영역이 우리에게 과연 어떤 식으로 보여주고 있는가? 과학의 시대에서 과학의 영역이 너무 앞서면 과학 역시 미신 내지 마술처럼 되어버린다. 우리는 정보의 지나친 과학을 넘어 절대적인 신이 되었다. 누가 그랬는가? TV는 신이라고 말이다. 물론 스마트폰, PC, 인터넷 보급에서 TV만이 아니지만 이들의 기본적인 미디어란 매체를 보내고 있는 존재다. 사회, 경제, 정치, 문화적 구조까지 미디어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것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파란 알약과 혹은 이런 것을 다르게 볼 수 있는 빨간 알약이란 선택점이 있다. 물론 이런 선택만이 있는 것은 아니나 적어도 우리는 항상 파란 알약에 의존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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