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어디 가?
장 루이 푸르니에 지음, 강미란 옮김 / 열림원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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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어디가?>라고 말한다면 우리들은 흔히 국내 방송 중에 아버지와 자녀가 같이 TV방송프로그램에 나와 이런저런 체험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쇼로 생각한다. 쇼라는 것에서 TV라는 매체는 실재하지 않은 것에 대한 실재하는 것이 되어야 하는 거대한 가상세계다. 딱히 내가 TV에 나오는 아버지와 자녀가 서로 우정과 사랑을 나누는 것에 대해 거짓이라 생각하지 않으나, 부모 특히 가족관계에서 언제나 소홀하게 대해지는 아버지의 존재를 생가하면 TV라는 쇼는 역시 쇼일 수밖에 없는 체계이다. 이른바 spectacle이라는 말이 있듯이 TV세계의 이미지가 매개로 되어 대중들은 아빠 어디가로 통해 재미를 느낄 것이다.

 

물론 그것이 하나의 쇼프로그램이 그들이 일반적인 사람들이 아니라 연예인 내지 특수한 사람이란 것을 아나, 한편으로 우리는 아버지란 존재가 TV에 나오는 인물들처럼 약간 따라하거나 받쳐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긴다. 방송에서 나온 장소가 나오면 누구는 그곳에 반드시 가려고 한다. 자신이 원해서 가기보단 미디어의 위력이 결국 아빠 어디가? 에서 아빠 우리도 저기가! 로 변할 수 있다. 물론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아이는 분명 어느 정도 지적능력이 있을 것이고, 하다못해 그곳에 가서 충분히 놀 수 있는 체력이 있을 것이다.

 

이와 달리 내가 읽은 <아빠 어디가?>는 그러지 못한 아버지가 일기로서 적은 책이다. 장 루이 푸르니에라고 프랑스 방송인이자 시나리오 작가는 하늘에 무슨 벌을 받았는지 아니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몰라도 태어난 아이 중에 아들 2명이 장애인이고, 그나마 딸은 정상인이었다. 장애인이란 이름은 그나마 복지나 사회보장제도가 잘 정비된 유럽조차도 괴로운 삶의 연속인데, 우리나라는 얼마나 힘들까? 솔직한 말로 정신적 문제가 아니라 단지 육체적으로 문제만 있을 뿐인데, 우리나라에서는 모든 장애인의 기준을 일정하게 만든다. 사회부적응자로 말이다.

 

물론 그런 인식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고, 그 누구도 자신이 혹은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을 가진다. 만약 가진다는 생각을 하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고민될 것이다. 실제로 아이를 준비하는 산모와 그의 가족들인 아이가 장애인이 되지 않을까 라는 고민 속에서 산부인과에서 깊은 호흡을 내쉰다. 후천적인 장애와 달리 선천적 장애는 매우 치명적이다. 이 책의 주인공인 장 루이 푸르니에의 고통을 보면 알다시피 몸집은 계속 어린아이 수준이고, 뇌는 마치 지푸라기만 든 것처럼 텅 빈 아이들을 보면 어떨까?

 

삶은 하나의 연극이고, 그 연극은 하나의 비극과 같다. 물론 희극이라는 종점이 없지 아니한 것은 아니나, 인간의 마지막은 언제나 죽음이고, 누구나 그 죽음이란 이름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의 인생은 비극이 되어야 하는 점이다. 그렇지만 인간에게 육체적인 존재를 떠나 정신적인 존재가 있다. 형이상학적 존재론에서 보자면 작가는 현세의 고통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으나, 그 고통이 삶을 넘어 죽음이란 이름을 건네준다면 그것은 하나의 희극이다.

 

아니 눈을 뜨지 않은 채 잠을 청하면 장애인이던 그의 아들이 꿈에서 유명한 선수나, 배우나, 하다못해 자동차 수리공이 될 수 있는 게 아닐까? 먼저 떠나보낸 큰 아들 마튜는 자동차 엔진소리를 내기 좋아했다. 부웅부웅~ 이라고 말이다. 무슨 말을 하든지 알아들을 수도 없다. 듣는다고 해도 그것이 이해할 수도 이해해볼 수도 없다. 그저 스쳐가는 소음에 불과하다. 몸짓도 이해하지 못하고, 오로지 자신의 몸짓만 내세울 뿐이다. 그래도 몸짓을 내세우는 것도 좋다. 점점 꼽추가 되어가고, 등은 펴지 못해 척추수술을 받다가 3일 만에 하늘로 가버린 마튜에겐 과연 어떤 것일까?

 

아버지 본인은 정작 담담하나, 예전에 안락사에 대해 생각해 본적이 있다. 죽음이 과연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죽음에 대해 인간이 괴롭게 생각하고 두려워할 때마다 인간 스스로 나약해진다. 동물은 죽음의 위기를 느껴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죽음이란 관념은 상상으로 통해 자신을 대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음의 위기와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등을 펴지 못해 괴로워하던 마튜, 하지만 마튜는 왜 괴로운지 이유조차 알 수 없다. 마튜는 죽음이란 관념을 이해하지 못한다.

 

죽음을 아는 것은 오로지 아버지 루이, 하다못해 마튜의 동생인 토마는 형의 죽음조차도 알지 못한다. 형을 찾는 것처럼 보이나 언제 존재했냐는 듯한 행동으로 집안을 돌아다닌다. 막내 딸 마리는 정상으로 태어나 루이의 이야기 속에 그저 그런 아이로 나온다. 이런 인생에 루이는 자신의 암울한 현실에 대해 어둠으로 몰고 가지 않는다. 심지어 아이들의 생모에게 이혼을 당해도 말이다. 그런 현실에서 루이는 아이를 돌보는 보모 조제에게 농담을 던지고, 장난감 가게에 점원에게 늘 같은 것을 사간다.

 

누가 보면 미쳤거나 혹은 실성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상황은 완전히 절망에 가까워도 그의 글은 절망보단 농담으로 가득하다. 아빠 어디가? 라고 토마가 물어보면 은행을 털러가, 자살하러 가, 나이지리아 폭포에 다이빙을 하러 간다는 말을 한다. 토마는 무엇을 대답해도 계속 같은 것을 묻고 또 묻는다. 일일이 거기에 대응하여 말해주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저 계속 의미 없는 진담에 의미 없는 농담만 늘어놓을 뿐이다. 무슨 말을 해도 토마는 모르니 말이다. 그래도 초현실주의적 그림도 그리고, 글도 간단히 적는 모습도 나온다.

 

나름 발전이라고 하나, 그 발전은 기대감으로 이어지기에 너무나 잔혹한 발전이다. 그 이상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도 루이는 자신이 그런 처지라고 기죽으려고 하지 않는다. 좋은 차를 몰고 다니며, 어디든 돌아다니려 한다. 때로는 허풍도 치고, 때로는 상상에서 허세도 부린다. 물론 허풍과 허세는 모두 현실적으로 소용이 없으나, 그것에 얽혀 자신의 삶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비극적인 삶을 희극적인 유머로서 글로 내려간다. 작가 본인부터 블랙코미디를 잘 만드는 작가인지 글 자체도 역설적인 내용이 많았다. 누가 봐도 참을 수 없는 상황에 그의 엉뚱한 상상력과 행동 그리고 말투는 우리로 하여금 씁쓸한 웃음과 재미를 준다. 마음이 편하지 못한 즐거움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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