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불평등 기원론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27
장 자크 루소 지음, 주경복 옮김 / 책세상 / 200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장 자크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읽는 순간 경탄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동안 인류학 내지 사회학, 그리고 민주주의 정치제도에 대한 서적들을 읽어오면서 모든 뿌리가 루소에서 시작된다는 점이다. 심지어 parole과 langue라는 언어학의 요소에서도 루소의 연구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놀라웠다. 페르디낭 드 소쉬르가 언어학을 가르치고, 그의 제자들이 자신의 스승인 페르디낭 드 소쉬르의 강의내용을 모아 만든 <일반언어학> 이전에 언어학에 대한 연구부분에서 이미 루소가 상당히 연구했다는 사실은 이번에 처음 알았기 때문이다. 루소의 서적에서 <사회계약론>, <참회록>,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 <식물사랑>,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를 읽으면서 아직까지 읽지 못한 도서는 <인간의 언어기원론>과 <신 엘로이즈> 그리고 이번에 읽은 <인간 불평등 기원론>이다.

 

물론 국내외적으로 루소에 대한 연구서적 등은 많은 점은 알고 있다. 하지만 루소 그 자신이 저술한 도서 역시 읽어야 할 도서 목록이다. 루소의 서적을 펼치면서 지금 우리 사회가 21세기인데도 루소가 저술한 18세기에 비교하여 전혀 떨어지지 않은 내용이었다. 게다가 현대철학자의 서적 중에서도 루소의 사상이 상당히 일치하거나 유사한 내용을 가진 도서가 많았다. 가령 네오 마르크스주의자이면서도 독일 프랑크푸르트학파 중에 하나인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에서 인간의 인생이 삶에 대한 지나친 욕심으로 인간 그 자신에게 잃어가는 것이 많다고 역설한다. 인간의 욕심으로 환경오염과 더불어 쾌적한 환경을 잃게 되고, 인간 존재에 대한 사랑까지 탁해진다고 했다.

 

소유보다는 존재로서의 인정이 오히려 인간에게 큰 소유가 된다는 점이다. 가령 영국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인간이 가장 중요한 요소가 의식주이다. 하지만 옷과 음식, 집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자연환경이다. 우리 인간은 대기 중의 산소가 없으면 수 분만에 질식사를 할 것이고, 물이 없다면 며칠도 못 가서 치명적인 상태가 될 것이다. 맑은 공기와 물은 인간이 지금 당장 필요한 소중한 자연자원이다. 그러나 인간의 지나친 욕심과 탐욕은 자연을 파괴하고 인간 스스로를 파괴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프랑크푸르트학파 중의 하나인 하버트 마르쿠제의 <에로스와 문명>처럼 인간의 문명이 자연을 파괴하면, 결국 자연조차 파괴하지 못할 경우 인간은 인간을 파괴한다고 한다.

 

가령 우리 인간에 파괴는 인간이 가져야 할 인간성이란 고유영역이다. 인간성이란 인간의 이성과 판단도 있으나, 자연적인 부분도 있다. 인간의 자연적인 부분이 자연환경의 파괴로 인해 인간 그 고유한 자연마저 파괴당하는 것이다. 자연에 대한 착취가 결국 끝에 이르러 인간에 대한 착취로 이어지는 것이다. 오늘 날에도 얼마나 많은 인간들이 착취로 물든 불량한 세상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가? 생계를 위해 자유로운 시간과 의지도 없고, 지나친 개발로 인해 숲이 사라지고 새들을 노래하지 못한다. 인간은 감정을 가진 존재다. 이성만으로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없다. 그런데도 인간의 감정은 점점 사막화되어 가고, 타인에 대한 절대적인 존중 대신 오히려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

 

이런 문제에 대해 20세기와 21세기의 철학자들이 고민하고 있다면 루소는 이미 18세기에 하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루소는 볼테르, 디드로와 같은 계몽주의 철학자라고 판단한 카를 마르크스의 사상조차도 루소와 닮아있다.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읽을 무렵에 나는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출판사 길, 강신준 교수 번역> 1권을 다시 읽고 있었다. 읽으면서 단테의 <신곡>에서 지옥편보다 더 끔찍하고 무서운 일들이 19세기 유럽에 나온다고 마르크스가 말한다. 그것은 하루 12~18시간의 노동시간과 더불어 열악한 환경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겨우 2시간 내지 3시간만 잠만 재우고 2일 연속으로 일을 해야 하는 가련한 어린 소녀와 소년의 비참한 현실을 보면서 이게 진짜 지옥이라 여겼다.

 

단순히 일만 한다는 것에서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다. 예전에 나도 대학교 수업과목 중에서 환경위생학이나 보건위생학과 같은 것이 있었다. 환경보건위생에서 일반적으로 사람의 가정환경과 교육환경 뿐만 아니라 노동환경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 문제점에서 가장 심한 것은 작업환경에 대한 전반적인 안전문제나 위생문제다. 인간은 물과 공기의 공급이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좁은 공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더운 작업장에서 계속 장시간 노동을 하게 되면 건강상으로 매우 좋지 못하다. 공기 중의 산소가 부족하여 졸도할 수 있거나 좁은 공간에 열기로 열사병을 일으킬 수 있으며, 먼지나 유해한 가스등은 기관지, 폐, 호흡기 계통에 큰 위험을 준다.

 

심지어 굴뚝청소를 하는 아이들은 각종 염증과 암으로 시달려야 했고, 중금속을 다루는 사람들은 신경마비, 근골계 장애, 순환기 장애, 혈액질환 등과 병에 시달려야 했다. 예전에 한국에서도 14세 중학생인 문송면 군이 수은공장에서 일하다가 몇 개월 후 수은 중독으로 인해 비참하게 죽은 사건이 있었다. 인간이 생계를 위해 노동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노동으로 인해 그 모든 것을 박탈당하는 것은 분명 부도덕한 일이다. 그런 것은 자유주의 철학자인 존 롤즈의 <정의론>에서 다룬 것처럼 생계로 인해 일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고 했다.

 

루소는 그런 자유라는 인간이 본래 가져야 할 권리와 의무에 대해 연구를 많이 했다. 심지어 우리 헌법조차도 인용되고 있는 <사회계약론> 역시 자유를 위한 연구도서다. 인간은 본래 자유로운 존재이나, 태어나면서 사회가 존재하기에 억압을 받는다. 하지만 그 억압으로부터 자유를 가지기 위해서는 서로 간의 합의가 필요하고, 그런 합의를 위해 일반의지를 수반한다. 인간의 진정한 자유가 있는 곳은 루소에겐 오로지 자연이었다. 자연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문명의 잔재를 깨끗하게 정화할 수 있는 장소였다. 문명과 자연, 문명은 인간에게 풍요와 부를 안겨주었다. 한편으로 그 풍요와 부는 모두가 아닌 일부에게 돌아갔다.

 

이런 문제가 착취와 궁핍을 부르고, 가난하고 힘이 약한 사람들은 평생 자손대대 그 업을 물려받아 희망조차 보이지 않게 된다. 이런 문제를 미리 지적한 사람은 루소였고, 그것은 추후 마르크스와 엥겔스로 통해 보여준다.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을 읽으면 마르크스는 루소에 대해 그렇게까지 평가하지 않으나 적어도 프랑스의 공화국적인 요소를 존중한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나폴레옹 3세인 루이 보나파르트가 쿠데타로 부와 권력을 노리고 있을 때 프랑스 공화국의 상징인 자유, 평등, 박애는 보병, 포병, 기병으로 무참하게 밟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다고 해도 마르크스는 분명 루소에게 큰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본래 마르크스 헤겔 청년파이기 전에 자유주의 철학을 많이 받아들였고, 또한 칸트나 피히테 같은 철학자의 책들도 많이 읽었다. 그 중에 루소의 책이 없을 리가 없다. 그리고 프랑스대혁명이 1789년 이후 1830년과 1848년에 큰 핵심적 사상은 루소의 것이다. 1871년 프랑스 파리코뮌의 경우 마르크스, 생시몽, 푸리에, 오원 같은 다양한 사상가들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고 하나, 프랑스에서 루소의 사상은 여전히 큰 획을 이은 것이다.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은 이런 혁명적이고, 추후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만들기 위한 초석으로 다져진 도서다. 심지어 인류학 영역도 마찬가지다. 루소는 인간의 불평등은 2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선천적인 것으로 하나는 후천적인 것으로 말이다. 선천적인 것은 성별, 나이, 인종 등과 같이 인간 고유의 자연적인 차이라면 후천적인 것은 사회적·정치적인 요소가 들어간 것이다. 문제는 선천적인 불평등에 비해 후천적인 불평등이 매우 심각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과 다른 점을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는 인간의 행복은 그 사회에서 인정을 받는 것인데, 그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저마다 남을 주목하고, 자신도 남에게 주목받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남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하나의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고 말한다. 인간에게 주어진 능력이나 재능은 물론 다르다. 그 능력과 재능이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도 있으며, 자연인은 본래 자신의 그 자체를 보여주나, 사회인은 주변 사람들이나 세견에 따라 자신을 맞추어 나간다. 그런 요소에서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것이 된다.

 

자연주의 철학자인 루소에게 <에밀>을 보게 되면 인간은 자연적인 존재가 되어야 하고, 인위적으로 가르치거나 무리하게 바꿔서는 안 된다고 했다. 오히려 그런 점이 아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또한 지나친 교육이 인간 자체에게 불평등을 주는 것이 된다고 했다. 이미 21세기에는 불평등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될 시기가 왔다. 오히려 니체처럼 불평등을 불평등이라 인정하는 것이 불평등에 대한 해결책이 될 것이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불평등 요소를 루소가 지적한데로 그것 자체가 하나의 평등한 법적인 요소라고 하는 것도 문제다.

 

인간의 빈부격차는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 당연한 사실이나 그것을 하나의 제도적인 범주에서 당연성으로 가는 것이 문제이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자유를 늘리는 하나의 방편이다. 프랑스대혁명 시기 로베스피에르는 진정한 자유는 우리만의 자유가 아니라 타인에게 자유가 있어야 가능하고, 빵이 고루고루 들어가야 자유를 얻을 수가 있었다 한다. 그런 점에서 롤즈의 <정의론> 역시 경제적 조건이 해결되지 않으면 그 개인에게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자유와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리석게도 굶어죽을 자유 내지 비참하게 일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자유라고 하는 것은 자유를 방종한 오만인 것이다. 루소는 프랑스대혁명 이전에 죽었으나, 그의 사상은 프랑스대혁명의 상징이었다. 그의 호칭은 프랑스대혁명의 아버지라고 한다. 그런 루소의 계몽주의 철학은 칸트의 관념철학에도 영향을 주고, 칸트의 철학에서도 계몽은 타인이 아닌 스스로가 일깨워야하는 것이라고 했다.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제네바 시민에게 보내는 글이 있다.

“지배받는데 익숙해진 국민은 이미 지배자 없이 지낼 수 없게 되지요. 만일 속박에서 벗어나려 한다면 그들은 자유에서 점점 멀어질 뿐입니다. 그들은 참된 자유와 반대되는 방종을 자유로 착각하므로, 혁명을 한다고 해도 거의 언제나 자기들의 족쇄를 더욱 무겁게 만들어버릴 뿐인 선동가들에게 스스로를 내맡기게 되지요.”

 

프랑스대혁명 시기에 당통의 죽음과 테르미도르 반동에서 로베스피에르의 죽음은 당시 프랑스국민들이 제대로 갖추지 못한 자유의지가 나폴레옹의 브뤼메르 18일로 가게 하였고, 결국 공화국은 군주제로 변해 유럽은 전쟁의 소용돌이로 휘말린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이 자연적인 존재가 되어야 하는 점은 인간 스스로가 지배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으면 인간은 타인을 지배하고 싶다는 욕망으로 인해 타인에게 지배를 당하는 것이다. 따라서 카를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이런 문구가 나오지 않은가?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소극으로” 말이다. 루소의 이런 선견지명은 아직도 두 번이 아니라 연속적 비극이 소극을 지나 잔학한 제노사이드로 나타날 때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불평등에서 시작된 것이다. 인간에게 불평등은 피할 수 없는 업보이다. <사회계약론>에서 자연주의 철학자인 루소가 왜 사회계약으로 통해 인간의 정치적 사회적인 요건들을 적어나가겠는가? 그것은 인간이 불평등이 항상 존재하고 그것을 뛰어넘기 위해 인간에게 서로간의 합의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의 저서인 <학술과 예술에 대하여>에서도 나온 내용이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연장선상이란 부분을 느끼게 해주는 문구가 있다. “사치는 수백 명의 도시인을 먹여 살리지만, 수천 명의 농부는 농촌에서 죽어가게 한다. 사치에 필요한 물건을 공급해주기 위해 부유한 사람들과 예술가들의 손 사이를 오가는 돈은 농부들의 삶에 아무 쓸모도 없다. 부유한 사람들에게 장식 줄이 필요하기 때문에 농부에게는 의복이 모자란다. 사람들의 양식으로 이용되는 물질을 낭비하는 일은 사치를 역겹게 느끼도록 만들기에 충분하다. 내 반대자들은 우리말이 어려워 그들이 뻔뻔스럽게 옹호하는 주장에 대해 부끄러워하도록 내가 조목조목 따지지 못하는 것을 지극히 행복해한다. 우리의 부엌에는 주스가 필요하다. 바로 그 때문에 그토록 많은 환자에게는 수프가 부족하다. 그리고 그 때문에 농부들은 물만 마신다. 가발에는 밀가루가 필요하고, 바로 그 때문에 그토록 많은 가난한 사람이 빵을 먹지 못한다.”

 

농사를 위해 필요한 여러 가지 기술과 기술을 가진 사람,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농민들은 더 많은 노동과 착취를 당해야 했다. 그 결과 자신이 생산한 농산품을 제대로 먹지도 못해 비참한 생활에 고통 받게 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불평등과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설파했던 루소는 본인 스스로도 가난과 불평등 그리고 국가권력(루이 16세 왕정과 정치관료)에 의해 평생 도망쳐야 했다. 그런 세월에 루소는 누군가 자신을 헤치는 것에서 두려움을 받기보단 자신을 헤칠 것이란 망상에서 괴로워하며 노년을 마감한다. 하지만 한 시대를 풍미한 계몽주의 사상가 덕분에 우리는 조금 더 낳은 세상을 살아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은 오늘날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에게 여전히 유효하며,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현재도 미래에도 살아가는 우리에게 꾸준히 노크를 두드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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