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비평 2
풀빛미디어 편집부 지음 / 풀빛미디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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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의 직업이 만화애니메이션 관련 업종이 아닌 상태에서 계속 만화애니메이션 관련 세계에 꾸준히 관심을 가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일러스트, 라이트노벨, 그밖에 기타 만화애니메이션 콘텐츠로 토대로 직업의식을 가진 분들에 비하면 나의 관심은 그렇게 어려운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이 그 세계의 사람들을 알고 따라가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꾸준히 만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 코스튬 플레이 등과 같이 한국에서 이른바 Sub-culture라는 하위문화를 꾸준히 관심을 갖는 것은 여기에 무한한 이야기의 에너지와 소재가 발생되기 때문이다.

 

최근에 본 영화중에서 BICOF 부천국제만화축제에서 상영된 <설국열차>가 있었고, 그 이전에 강풀 작가의 원작인 <26년>이 있었다. 전자는 프랑스 예술만화라고 한다면 후자는 한국 웹툰으로 제작된 작품이다. 두 작품에서 어느 것이 더 우월하냐는 말을 가리기 보다는 두 작품으로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는 만화의 광활한 범위는 어디까지 볼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다. 아직까지 한국 만화산업계의 아쉬움은 소비자에 대한 연구방법이다. 왜 내가 그것을 아쉬워하는 것일까?

 

<설국열차>를 BICOF 행사 상영장소에 원작 만화작가와 영화제작인 봉준호 감독이 참석하였을 때, 그 자리에 영화인 <설국열차>로 통해 만화 <설국열차>를 가깝게 다가간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란 점이다. 게다가 영화 <26년>에서 강풀의 원작만화보다는 영화가 가지는 미디어적인 요소에 더 많은 흥행요소를 일으켰을 것이다. 강풀의 <26년>은 그저 가상의 존재로서 이야기가 진행되나, 영화 <26년>은 실존하는 배우가 등장하여 하나의 허구를 만들어내었다. 하지만 허구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존재하지 않아도 그 등장인물을 연기하는 인물은 실존인물이다.

 

따라서 파생 실재라는 실사영상의 특성에 따라 대중문화에서 많은 대중들을 자극하는 요소가 된다. 영화 <설국열차>도 영화감독 봉준호, 영화배우 송강호 라는 네임드가 엄연히 존재했기에 그 흥행도가 보장될 수 있었다. 물론 흥행적 요소에 담론하고 있는 서사구조와 그 서사구조를 표현하기 위한 영상과 사운드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다. 생각해보면 이번에 상명대학교 만화학과에서 2번째로 제작한 <만화비평 2>를 읽으면서 만화비평이 절실한 이유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만화라는 것이 이제는 단순히 사회에서 비주류로서 머물기에는 너무 많이 대중들에게 다가간 것이다.

 

그러나 이에 반해 우리 대중들은 여전히 만화와 만화를 비롯한 웹툰, 애니메이션, 게임 등을 너무 경시하는 요소가 보인다. 스마트폰으로 무료로 웹툰과 게임을 하면서도 만화책과 PC 및 콘솔게임을 즐기는 사람에 대한 인식은 크게 개선되지 않고 있는 시점이다. 그런 상황에서 제일 곤란한 상황은 일반적인 대중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만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 게임, 코스튬 플레이를 즐기는 사람조차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이나 문제점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것이 제일 심각한 문제이다. 물론 그 부류에 속한 사람 내부나 혹은 그 내부에서 외부 대중들에게 알리는 것 자체도 힘든 상황이란 점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런 문제의식은 비단 만화애니메이션 관련 콘텐츠 향유자만 겪는 문제라면 그들이 처해진 사회적 조건에서 분명 극복하기 힘들 것이다. 그런다고 그런 만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 등의 업무를 하고 있는 현직 종사자에겐 또 다른 문제이다. 이들에게 시장이 되어야 하는 향유자들의 입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함은 상품을 팔아야 만화산업이 발전과 동시에 만화가들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조건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이다. <만화 비평 2>에 대해 조금 다시 생각하면, 너무 만화가들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하지 않았나 싶었다.

 

만화라는 것은 곧 만화가가 만화를 통해 독자들에게 의미를 주고 싶은 하나의 소통의 공간이다. 소통을 원하는 대상에 대해 자신의 이야기만 늘어놓고, 반대로 들어야 하는 이들의 사고나 생각, 행동이나 현상에 대해 무감각하지 않나 하는 우려감이 들었다. 물론 <만화 비평>을 한다는 것은 순수하게 만화작품만이 아니라 만화문화와 그에 제반된 사회적 현상까지 같이 담론하는 것이 옳다. 만화라는 것은 결국 대중문화로 보는 것이 아니라 대중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는 하나의 놀이문화라는 점이다.

 

누구나 쉽게 만들고 읽고 말할 수 있어야 그것이 만화가 가지는 본질적 가치다. 그런다고 너무 쉬운 것만 추구할 경우 만화는 너무 저급한 것으로 취급될 수 있다. 따라서 만화는 한 가지 가치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가치를 두루 가져야 한다. 이미지에 대한 인간의 판단요소에서 산업디자인과 예술디자인의 차이에서 산업디자인은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생각하는 것이 보편적으로 대부분 동일한 것이라면, 예술디자인은 모든 사람들의 사고와 판단력이 다르게 되어야 한다. 결국 인간이 모두 같은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다른 생각하는 것이 당연히 같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지해야 하는 셈이다.

 

만화란 그렇게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이야기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전달할 수 있다. 만화가 문학과 별개인가? 혹은 아닌가라는 의문에서는 예전에 읽어본 <서사철학>에서 만화 역시 서사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만화는 만화로서 이야기를 가지고 있으므로 스토리텔링으로 매우 훌륭한 것이 될 수 있다. 만화문학이 될 수 있는 점은 만화에서 보이는 인간이 가지는 보편적인 이야기뿐만 아니라 어느 특별한 이야기까지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가진 불운한 현실과 암울한 미래에 대해 만화라고 말하지 마란 법이 없다.

 

디스토피아적인 세계관을 지닌 문학작품인 조지 오웰의 <1984>를 생각하면, 그런 암울한 감시국가의 모습을 만화로 그려내면 더욱 효과적인 전달력을 보여줄 수 있다. 사실 생각하면 우리의 암울한 현실과 비참한 서민들의 이야기를 만화로 보여주지 않았던가? 한국만화 역사에서 현실에 대한 비판과 풍자로 얽힌 카툰적인 요소가 강했다. 일제강점기 전후로 대부분 한국인들인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간단한 몇 글자와 그림으로 표현한다면 그 당시 민중들은 쉽게 이해하고 느꼈을 것이다.

 

만화의 무서움과 위대함은 바로 전달력과 파급력이다. 1972년 군사정권 시절 유신헌법 개정 전에 문화정책으로 만화분서갱유 사건이 일어난다. 만화로 통해 인간이 느끼는 감정과 생각들을 충분히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만화는 인간이 가지는 욕망과 의지를 그려낼 수 있기에 전체주의적인 요소가 강한 국가에서는 성적(性的)인 요소를 통제하여 국민들을 통제하기도 했다. 성적인 담론인 남녀연애가 자유로우면 인간의 기본 권리인 자유와 평등이 우선되어야 한다.

 

가령 여자는 무조건 돈 있고 능력 있는 남자만 만나면 된다는 신데렐라 콤플렉스는 여성으로 하여금 자신의 사회적 위치평가 절하 및 사회적인 활동을 감소시키는 원인이 되고, 남성들에게는 자신의 재력이 풍족하지 못한 대다수에게 박탈의식과 더불어 사회 불만을 야기한다. 물론 인간의 삶에서 돈의 가치는 중요하나, 그것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면 남녀관계는 사랑이 아닌 <섹스와 돈>으로 절하된다. 만화에서 만약 자유연애를 꿈꾸는 여자나, 혹은 성적 호기심이 넘치는 남자아이에 대한 소재를 금지한다면 우리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표현에 대한 자유를 억압한다.

 

만화라는 것은 바로 인간이 평소 자신 안에 부족한 것에 대해서나 혹은 자신의 안에 넘치는 것에 대하여 표현할 수 있는 매체이다. BICOF에서 한국 대표 만화가라고 볼 수 있는 최규석 작가의 이야기에서 자신이 만화가로 될 수 있는 계기는 고등학교 수업 시간 중에 수학시간에 느끼는 지루함이었다. 1주일 4시간 수업이 잡힌 수학시간에 이해되지 않은 과목을 계속 앉아 듣는 것만큼 힘든 것은 없다. 그래서 최규석 작가는 수학시간에 망상을 하고 그것을 하나의 스토리로 응축하여 전개했다고 한다.

 

최규석 작품 중에 <습지생태보고서>라는 만화책은 직접 만화가와 주변 친구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현실의 씁쓸함에 대해 재미를 담아내는 작품이다. 그런 작품이 나온 것은 어떻게 보면 그가 어둠이나 혹은 지루함에서 보인 해방의식에서 비롯된 산물이다. 그 억압에 대한 반항 내지 저항의식이 작품을 만들 수 있기도 하고, 때로는 자유로운 사고방식이 작품을 만들기도 한다. 단지 작품이 의미하는 내용과 상황은 분명히 같을 수가 없을 것이다. 마르잔 사트라피의 <페르세 폴리스>와 같은 작품은 작가 본인이 이란에서 살면 겪은 이야기를 만든 작품이다. 그 작품을 보면 상당히 우울하고 슬프고 때로는 절망한다.

 

같은 만화책이라고 해도 분명 거기에 담겨진 내용은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야기의 전달에서 우리 혹은 나 같은 독자가 보는 만화에 대한 느낌은 분명 다를 것이다. 적어도 만화라는 것은 그리기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그리기로 통해 무엇을 말하는 것이다. 만화에 대해 비평을 하는 것은 바로 표현에 대한 의지와 자유에 대한 고찰이다. 때로는 즐겁게 때로는 진지하게 여러 가지로 볼 수 있는 것이 만화다. 하지만 우리에겐 만화는 여전히 진지한 것과 다르게 늘 다른 공간의 세계다.

 

만화에 대해 비평을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점을 극복하는 것이다. 이번 <만화비평 2>에서 보인 것은 만화에 대해 얼마나 우리가 알고 있는가에서 만화가에 대한 인터뷰 및 대담을 좋았다고 본다. 만화가들이 다수 나와 무슨 생각으로 만화를 대하고 그리고 전달되는지 듣는 것은 한국만화를 사랑하는 독자들에게 매우 소중한 경험이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평소 만화와 애니메이션 리뷰를 하는 입장에서 한국 만화독자들이 이 책을 얼마나 알고 얼마나 보고 있을까? 라는 의문이다.

 

만화가들은 정작 자신의 만화를 두루 보기 원하나, 그런 만화가의 의지와 생각을 담은 <만화비평>은 그렇게 잘 전달되기가 어려운 것 같았다. 만화라는 것은 쉽게 접해도 만화에 대한 연구와 비평은 보통 학술지보다 더 어려운 세계에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이때까지 만화에 대한 비평지가 학회 학술지로서 나오기보단 일반적인 도서로 나온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게다가 1987년 1월 박종철 서울대학교 학생이 고문치사로 죽고, 연세대학교 이한열 학생이 최루탄에 맞고 숨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박종철 학생을 기리는 마음에서 박종철출판사라는 곳이 생기며, 우리의 영원한 벗인 박종철 학생을 기리는 마음으로 생긴 출판사라면, 이한열만화상 역시 만화동아리에서 만화를 사랑하는 우리들의 선배로서 그 가치가 높다고 볼 수 있다. 카툰 부분의 <정리해고>와 이야기만화의 <자판기 아저씨>는 우리 시대의 아픈 이야기와 인간 개인이 가지는 본성에 대하여 웃음이 나오면서 씁쓸한 기분을 들게 한다. 한 가지 기분이 아닌 다양한 기분을 들게 하여 다양한 감정을 생기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것과 인식해도 제대로 각성하지 못한 이야기가 바로 만화로 통해 쉽게 접근 가능한 것이다.

 

<만화비평 2>는 기존에 나온 <만화비평>과 다르게 어느 작품에 대해 리뷰와 비평이 들어가 있었고, 비평적인 고찰에서는 미학적인 관찰과 더불어 예술적인 요소로서 만화를 읽어가는 것을 제시했다. 또한 만화리뷰에서는 나 같은 독자가 보는 리뷰가 아니라 만화작가나 혹은 만화지망생이 적는 만화리뷰 역시 독특한 재미였다. 만화를 비평한다는 것은 영화나 미술, 문학 등과 같은 기존 문예계통과 큰 이질감이 느껴지는 것이 한국 사회다. 하지만 꾸준히 만화에 대한 고찰로 통해 만화가 가지는 큰 가치를 보여주는 것 역시 만화를 즐기는 방법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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