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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2병 데이즈 2 - Seed Novel
김월희 지음, nyanya 그림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3년 6월
평점 :
절판
<중2병 데이즈> 2권을 읽은 후에 <세계 제일의 여동생님> 3권이 생각났다. 물론 <세계 제일의 여동생님> 3권에서는 블랙헤이젤 당수의 경호원인 리리와 리리의 언니인 리라의 이야로 전개된다. 살인을 위해 살아온 여자아이, 그리고 그 살인기계는 물리적인 기계가 아니라 생물학적인 조직으로 구성되어 있기에 지나친 활동은 결국 마모를 불러일으키게 되고 고장 난 시계처럼 인간 역시 고장 나게 된다. 시계가 고장 나면 필요한 부품을 대체하여 수리하거나 혹은 폐기물로 간주하여 버리면 된다.
하지만 문제는 사람은 폐기물처럼 다루면 안 되나 그렇게 다루는 경우가 있다는 점이다. <중2병 데이즈> 2권에 새롭게 등장한 소녀인 슈, 그녀는 조직 내에서 베스트 5에 들어갈 정도로 매우 좋은 실력을 가진 암살자다. 그 소녀의 암살기계적 능력은 갈까마귀왕인 연오에게 큰 타격을 줄 정도로 강력하고, 연오의 동생 린조차도 버거울 정도로 강했다. 그런 슈가 조직에서 나와 연오 앞에 나와 대결을 요구하고 있다. 연오에게 나타난 슈는 더 이상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처음부터 시간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생물학적인 조건을 만족할 의식주가 고려해야 하나, 의식주적인 문제를 지나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여가문화라는 것을 즐겨야 한다. 다른 동물과 달리 오직 인간만이 여유를 가지고 시간을 이용해 여가생활을 할 수 있다. 여가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의 취미생활 영위와 능력을 향상시킬 있는 것이다. 과연 슈라는 여자아이는 그런 것이 있었을까? 아니라면 슈가 조직에서 탈출하여 연오에게 찾아갔는데, 그 연오에게도 그런 것을 찾아내었을까?
인간이 인간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분명 의식주가 해결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연오는 작은 집에서 기거하면서 예전보다 호화롭지 못한 생활에 힘들어하는 것은 사실이다. 조직에 있으면 카드에 적립된 돈을 원하는 만큼 사용할 수 있었고, 임무 중에 허름한 곳이 아니라 좋은 호텔에서 숙식을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식사 때마다 편의점에서 김밥, 도시락, 라면 등과 같은 음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런 생활에 연오는 예전에 큰 대우를 받던 자신과 비교하면서 오히려 지금의 소박한 일상을 소중하게 여긴다.
연오가 슈에게 한 대사지만, 자신의 삶을 자신이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남의 명령이나 억지로 만들어진 틀에서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로봇처럼 살아가는 것보다 조금 힘들고 괴로워도 자신의 삶을 사는 게 행복하다고 여겼다. 아무 것도 아닌 일상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으며, 자신도 보통 사람처럼 학교에 가고, 집에 가고, 친구를 만나 어울리는 것이 바로 삶이란 것이다. 물론 연오는 그런 삶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조직에서는 오로지 살인과 살인, 자신의 적인 마술사조직을 파괴하고 죽이는 것에 의미 따위는 없다.
단지 자신의 조직에서 활동하는 암살기계고, 눈앞에 자신이 죽여야 할 대상만 존재했다. 그래서 아무 이유 없이 닥치는 대로 죽이고 죽여 자신의 손에 피 냄새가 진동하게 되었다. 왜 연오는 그런 갈까마귀왕이란 암살왕의 호칭을 버리고 이런 삶을 선택했을까? 그건 어떻게 보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적인 욕망에 대한 자신과 그 자신에 대한 회한일지도 모른다. 연오가 처음 암살요원으로 되었을 때 자신은 이미 그 세계에서 초짜에 불과했다. 자신을 이끌고 자신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준 전자가 있었을 것이다. 연오는 그 앞에 있는 사람의 등을 보면서 동경심을 느꼈고, 그 사람처럼 되고 싶었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이 바라는 대상에 다가가면 갈수록 그 사람이고자 하는 욕망에서 그 대상을 거세하고 싶은 욕망이 일어난다.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싶은 이유는 바로 아들이 아버지의 자리를 가고자 하는 욕망이다. 하지만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나면 바로 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과 양심을 느끼며, 평생 살아가야 한다. 카니발이란 축제는 본래 식인이란 의식이다. 축제는 한편으로 식인행위에 대한 변이된 행사이다. 죽은 자에 대한 추모는 곧 자신이 저지른 죄악에 대한 치유의식이다. 갈까마귀왕인 연오가 자신이 동경한 선배와 싸워 이김으로서 남은 것은 성취감이 아니라 허무함이었다.
그 허무함은 연오만 느낀 것이 아니라, 연오의 선배에게도 항상 의문을 가진 숙제였다. 적을 죽이고 또 죽이는 것까지는 좋다. 그렇게 살아가면 결국 그 살인기계는 무엇이 되는 것이고, 만약 이 지긋지긋한 전쟁이 끝이 나면 무엇이 되는 것일까? 슈도 그런 고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연오는 선배의 결투와 조직의 이탈로 통해 스스로 답을 찾아 떠나간 것이라면, 슈는 아무런 답도 모른 채 그저 뛰쳐나온 것이다. 슈가 나온 이유는 슈 역시 자신의 길을 찾지 못했던 것이다. 연오가 연오의 선배를 동경했다면, 슈는 연오를 동경했다. 그런 연오가 조직에 나가고 슈는 자신이 가고자 한 목표 혹은 동경하는 대상이 없어졌고, 설상가상으로 적과의 싸움도 끝이 나서 평화가 왔다.
평화와 질서를 위해 싸운 이들이 평화와 질서가 돌아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살인기계로 만들어져서 살인기계로 살아온 자들이 살인기계로서 의미를 잃어버린 것은 곧 자신의 삶에 대한 목표가 사라진 것과 같다. 아무런 동기의식이나 삶의 가치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슈의 정신오염이 그토록 심각한 것은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로 자신이 가고자 한 목표나 대상이 어느 순간 허무하게 사라진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이제는 쓸모없는 것으로 취급당하고, 심지어 고장 난 장난감이 되었으니 폭주하는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는 자기 방어 및 공격이다.
슈는 그래서 연오에게 찾아오고, 연오에게 결투를 신청했던 점이다. 조직에서 이미 정신오염으로 처분을 받아야 했지만, 적어도 암살기계 슈는 못되더라도 연오와 슈라는 관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 했다. 자신이 자신이고자 한 슈는 마지막 몸부림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적어도 <세계 제일의 여동생님> 3권의 리나처럼 육체적 붕괴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육체 이전에 정신이 붕괴했기에 슈에게 필요한 그 정신적 위기에서 벗어날 상황이 필요했다. 그것은 갈까마귀왕인 연오와의 목숨 건 싸움이었다.
물론 싸움은 시작했고, 연오가 목숨에 큰 위협을 느낄 정도로 과격한 전투가 되었다. 그러나 만약 연오가 이기든 혹은 슈가 이기든 그 결과에서 슈는 승리와 패배로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는 것일까? 인간 실존적인 자아에서 슈는 또 다시 자아에 대한 의문으로 고민할 것이다. 연오는 슈와 싸우기 전에 붕어빵을 사준 적이 있었다. 붕어빵, 생각해보면 대략 1마리에 500원 정도하는 따뜻한 붕어빵은 날씨가 쌀쌀해지면 길가 도로나 혹은 학교 근처에서 쉽게 사먹을 수 있는 간식이다. 분명 요원들이 치열한 싸움에서 늘 비싼 것만 먹었으나 오히려 붕어빵 1마리가 슈나 린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그것은 자신의 실존성에 대한 확인이었을 것이다. 인간의 가치를 상품의 가치에 따라 결정하면 안되나 적어도 우리는 자본주의 구조사회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상품의 가치에 따라 인간의 가치가 종종 결정되는 현상을 본다. 그런다고 하여 상품의 가치가 금액의 가치로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연오가 구매한 붕어빵 1마리는 얼마 하지 않은 것들이나, 적어도 연오의 가슴에 품어진 붕어빵 1마리는 린에게 무척 소중했고, 린의 붕어빵 1마리를 삼킨 슈는 린의 공격을 받은 점을 생각하면 500원 때문에 사람의 목숨이 오고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단지 상품에 대한 값보다는 그 상품이 의미하는 하나의 가치라는 점에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물질을 배제할 수 없다고 해도 그 물질에 무엇을 부여 하냐에 따라 큰 의미가 부여될 있다. 그렇게 미친 듯이 날뛰던 린이 연오의 품에 남은 붕어빵 하나를 입에 물자 잔혹한 살인마는 순진한 여동생으로 변해있었다. 500원의 가치가 인간을 살인기계로 만들고 혹은 그저(?) 오빠와 사이좋은 여동생으로 만들었을 뿐이다. 아무 것도 아닌 붕어빵 하나에 엄청난 소동을 일으키나, 그 소동 자체가 빤짝임이 있었다.
작은 것에 모든 것을 걸고 싸우고 웃고 떠들 수 있다는 그 기회가 말이다. 슈에게 이때까지 그런 기회란 없다. 자신의 싸움은 자신을 위한 싸움이 아니라 오직 기계적인 싸움으로 변해 있었다. 연오와 결투는 자신을 위한 싸움이나, 적어도 그 싸움은 1번의 싸움으로 끝난다는 점이다. 그런 싸움만 바란 슈에게 심각한 중2병 소녀인 흑련, 뱀파이어 소녀 루나와 만났다. 도저히 정상적이지 않고 바보에 망상 병에 시달리는 소녀들을 말이다. 이들에겐 정상적인 이성이나 판단 따위는 없었다. 그저 자기가 그래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했을 뿐이다.
자신이 피터 팬이 아닌데도 피터 팬이라고 말하고 피터 팬처럼 행동하는 흑련과 그 일행을 보면서 말이다. 그래도 이런 중2병적인 요소가 그렇게 좋다고 볼 수는 없으나, 그것이 무조건적으로 부정할 수 있는가에 생각하게 된다. 흑련을 입양한 흑련의 어머니는 연오가 과거에 조직에 있던 것처럼 자신도 초대 갈까마귀왕 아니 여왕이었다. 그녀 역시 잔인한 시간과 공간에서 피를 뿌리며 힘들게 살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에게 얻은 것은 무엇일까? 분명 흑련의 집은 부유한 편이다. 흑련의 어머니가 그렇게 부유한데도 흑련을 입양한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의 삶에 새로운 변화를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연오 일행들이 배고픔에 지쳐있을 때 장바구니를 들고 찾아와 카레를 해주는 흑련의 어머니는 마치 친어머니처럼 흑련과 흑련의 친구들을 대해 주었다. 그녀 자신에게 빛나는 순간은 아마 흑련에게 어머니로서 조금이라도 해줄 수 있는 순간이었다. 요리를 해주고, 요리해 준 것을 맛있게 먹는 사람이 있었을 때 흑련의 어머니는 자신에게 조금은 빤짝이지 않았나 하는 기분이 든다. 자기가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은 아무렇지 않아 보여도 좋아하는 사람들이랑 추억을 만드는 것이다.
흑련의 어머니는 연오에게 이런 말을 한다. “저 아이를 보고 있으면 말이야, 언제까지고 반짝거릴 거라는 생각이 들거든”, 또한 기관의 기관장으로 활동하는 노인에게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때로는 별 볼 일 없는 평범함이, 가장 위대한 특별함을 만들어 내는 법이죠”, “세상을 바꾸는 것은 천재가 아니니까요.”, “세상을 바꾸는 것은 언제나 바보들의 몫이죠.”
비일상 속의 인물들이 일상적인 공간에서 분명 일상적인 삶을 산다고 볼 수 없다. 그 나름대로 치열한 삶과 어두운 나락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그래도 바보처럼 앞을 뛰어나가는 그들의 평범함 바보짓이 빛나는 청춘인 것이다. 흑련의 어머니는 자신의 과거를 보며, 연오에 대한 과거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을 넘기 위해 흑련을 입양했을 것이다. 솔직히 30대 중반 정도 되는 여성의 딸이 여고생일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물론 있을 수 있어도 남편 없이 혼자 키운다는 조건 자체가 성립이 어렵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삶을 남들처럼 살지 못해 의미를 찾아 혹은 의미 따위는 모르고 그저 뛰쳐나온 청춘들에게 그저 필요한 것은 나는 지금 여기 있는가라는 실존적인 질문이다. 슈에게 다시 돌아 가보면 슈는 자신이 살아갈 목적의식이나 목표들이 없어졌다. 그저 살인기계로서 처분당하는 운명이었다.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했으나, 막상 연오를 찾아 왔을 때 붕어빵을 먹고, 카레를 먹고, 게임을 하면서 슈에게 이때까지 해보지 못했던 경험과 추억을 새긴 것이다. 목숨 걸고 싸우다가 어느덧 아침 해를 연오와 바라보며 자신의 현재를 찾아간다.
인생이란 단순하고 복잡하고, 쉬우면서 어렵다. 사람에게 살아가는 것이란 어떻게 살 것인가와 더불어 어떻게 죽을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삶의 의미조차도 없다면 죽음에도 의미가 없을 것이다. 삶과 죽음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로 이어져 있는 동상이몽이다. 같은 것에서 다른 것을 보나, 그것은 곧 같은 것이다. 흑련의 난동은 결국 연오조차도 자신이 이때까지 살아온 삶에 대해 돌아보게 하는 기회가 되었다. 어차피 인간은 거대한 세상에서 톱니바퀴 불과하다. 하지만 그 톱니바퀴 자체에도 하나의 세상이 있었다. 그 작고 작은 하나의 세상에서 자신만의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과 그것을 충분히 만끽하고, 거대한 세상에서도 나라는 존재를 보여줄 수 있을 대 빛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나라고 말할 수 있는 그 순간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