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상에서 과학으로 - 새날 고전 묶음 2
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나상민 옮김 / 새날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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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인류의 역사 천재라는 존재가 나올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천재인 것도 있으나, 시대적인 흐름이 존재함이다. 만약 플라톤이 현세에 태어났다면? 혹은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이 삼국시대에 태어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역사적인 조건에서 항상 우리는 어려운 시기에 봉착하는 순간이 다가온다. 물론 세종대왕의 한글이야 얼마든지 한국이란 영토 내만 아니라 북동아시아 대륙으로 가도 문자의 능력은 십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플라톤이 현세에 살았다면 아마 노예제도를 찬성하고 극소수에게 민주주의가 선택된 귀족중심의 민주주의라는 꼬리에 비판을 받았을 것이다.

 

인류의 역사란 바로 그런 하나의 과정 속에서 상황과 조건에 따라 변하는 것이다. 절대적인 조건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그 역사적 현실 속에서 오류를 부정함에 따라 새롭게 긍정이 탄생하는 것이다. 아직까지 헤겔의 변증법에 대해 소상하게 알지 못하나, 적어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영향을 받은 변증법에 유물론적인 요소를 더함으로 기존의 절대적인 관념에서 변증법적인 가치로 통해 현실을 새롭게 재조명한다. 그래서일까? 유독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공상에서 과학으로>이라는 서적을 볼 때면 마치 변증법적인 역사관이 매우 뚜렷하다.

 

왜 사회주의는 반드시 오는 것일까? 세계 어디를 보아도 소비에트 연방 해체이후 그냥 그대로 사회주의 국가는 없다. 단지 덴마크, 스웨덴 등과 같은 북유럽 국가들은 사회주의 정치경제적인 요건에 따라 운영하고 있다. 이른바 시민사회주의로서 말이다. 사회주의 이념이란 국가는 없어도 사회주의 관련 정치적 조직은 여전히 프랑스 및 독일 등을 중심으로 선진국에서 활동 중이다. 그들이 그렇게 활동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엥겔스가 설명한 <공상에서 과학으로>이란 서적을 보면 우리는 인간의 계몽주의 사상이 도래한 18세기 프랑스를 봐야 한다.

 

몽테스키외, 디드로, 볼테르, 루소와 같은 계몽주의자들이 프랑스에서 활동하면서 엥겔스는 사상이 세계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상으로부터 세계가 만들어지는 것을 이야기했다. 우리는 충분히 문화라는 것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보나, 오히려 문화로 통해 우리 인간이 형성되어 왔다. 아니라면 문화라는 자체도 본래는 하나의 유기절인 환경조건에 의해 구성되었다가 추후 하나의 문화적 관념으로 고착화 되었을 것이다. 인간이 그동안 살아온 사회구조는 상부구조인 정치적 입지에 따라 형성되어 왔다.

 

생각해보면 왜 다른 나라에 비해 서구가 자본주의가 발달하고, 문명화가 다른 대륙에 비해 빠른가? 중세유럽부터 각 나라의 태어난 사람들이 고국을 섬기지 않고 오히려 다른 나라에 가서 신하가 되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일정한 영토에 비해 국가들이 많이 연접했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가 전쟁을 벌이게 되면, 다른 나라에서 전쟁으로 약해진 나라를 침공하기에 일정한 정치적 권력을 확보한 채 유지하는 편이 더 이익이 될 것이다. 또한 무역거래에서 상인들의 이동이 많은 점과 콜럼부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유럽 국가들이 식민지 전략에 따라 상업활동이 발달했다.

 

정치적 조건에서 농경사회에서는 봉건군주 내지 절대주의왕정이 유리할 것이다. 농노나 자유농민들이 대부분 국민이고, 그 위에 왕족 및 귀조, 그리고 전쟁에서 임무를 수행할 기사와 형이상학적 가치관을 내세우기 위한 성직자들까지 말이다. 농경사회에서는 이런 신분계급 체계가 안정화 될 수 있는 것은 최하위계급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일이 없는 점과 그 지역의 귀족이 자신의 관할지역의 농민들을 다스리고, 때에 따라서는 결혼 내지 의료 활동까지 지원해주는 것이었다. 이동은 일부 상인에 국한되었으며, 대부분 이송물자는 그 지역의 특산물에 한계였다.

 

하지만 무역거래가 늘어나고, 상인들의 이동이 늘어남에 따라 자신의 세력이 늘어가고, 그들은 재력과 더불어 지식까지 소유하고, 그동안 미천한 신분에 머무는 것을 원하지 않고, 신분상승을 노린 것이다. 자본주의혁명은 결국 봉건사회의 적이 되어야 했다. 토크빌의 <구체제와 프랑스혁명>에서도 루이왕정은 수입에 비해 지출이 심했고, 귀족들에게 세를 거두지 않고 농민에게 거두는 바람에 프랑스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부여했다.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에밀>처럼 당대 지식인들을 자극하던 서적의 중요도보단 그 시대의 국가경제 상황에 의해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단지 그 혁명의 주도세력은 지식인일 수밖에 없었다. 국민들은 왕족의 과소비는 알아도 왜 그런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개념 따위는 없었다. <사회계약론>에서 언급한 모든 국가의 권력은 인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아직도 대한민국 헌법 내지 세계 어느 국가에서 통하는 헌법 문구이다. 하지만 그런 개념조차 당대 사람들에게 없었다. 인간 누구나 천부인권이 있다는 관념조차 감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공상에서 과학으로>는 비록 프랑스대혁명이 부르주아 혁명이나 프랑스혁명의 상징인 삼색기에서 자유, 평등, 박애가 제대로 이루어지면 민주주의는 사회주의로 된다고 했다.

 

사실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자유주의 관념에서 사회주의라는 개념에서 민주주의와 별개로 놓고 보는 것이다. 자유주의 역시 민주주의와 별개로 보는 것이 아니다. 개인의 영역이냐? 공적의 영역이냐의 차이점이다. 단지 민주주의에서 고도화로 발달되면 사회주의 요소가 되는 이유는 지금의 북유럽 선진국처럼 대부분 국민들이 굶지 않고 가난으로 허덕이지 않아야 하는 점이다. 물론 그 조건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들이 그동안 근현대까지 해온 식민지국가 침공이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영국이 그나마 근로자 수당이 적정하게 책정된 이유는 그만큼의 임금을 인도와 같은 식민국가에서 착취해온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어느 조건을 이루기 위해서는 다른 조건을 희생하거나 문제가 생기는 것이며, 그것을 통해 수정하고 극복하여 또 다른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부분은 어떻게 가는 점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결코 유토피아 국가를 제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그런 나라를 가는 과정에 대해 항상 강조했다. 그 어떤 것의 달콤한 이야기들은 결국 헛된 공상이란 점을 강조했다. 공상에는 과학이 없다. 현실의 상황과 그리고 지금 가야하는 점은 언제나 대립될 수밖에 없다. 물론 엥겔스의 과학적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라도 우리가 지금 일반적 받아들이는 그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모든 속박과 굴레를 해방하겠다고 나온 레닌 사후 스탈린의 소비에트 정권은 결국 오히려 더 인간을 속박하고 폭력의 역사를 물들게 하였다. 어떻게 보면 계몽주의가 관념론이란 봉건제도를 타파할 수 있어도 그 자체가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되었고, 계몽주의는 그저 부르주아의 일부 지식인에만 국한 된 것이었고, 그것은 대다수 사람들에게 이양되지 못했다. 프랑스대혁명 당시 많은 사람들은 계몽주의를 스스로 알았을까? 그들은 계몽주의적인 정신 대신 단지 루이왕정을 전복했다는 이유만으로 스스로 시민이라 불렀다. 하지만 시민은 그 속에 얼마 없었다.

 

계몽주의자라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본인의 의지와 노력과 관계없이 그저 그 흐름에 맡겨 공상적으로 계몽주의에 입각한 시민이라 여긴 것이다. 따라서 그런 공상에 휘말린 만큼 추후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키자 모든 프랑스 사람들은 나폴레옹을 환영했고, 자신들 손으로 왕을 죽인 자들이 이제는 스스로 황제를 옹립한다. 인간의 공상이란 바로 자신들의 한계와 현실을 깨우치지 않기에 늘 똑같은 어리석음에 고통 받는 것이다. 또한 그 고통에 의한 억압이 또 다른 혁명과 쿠데타, 전복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민주주의 역사는 피를 마시고 자라는 나무라고 하지 않은가?

 

공상에 빠진 자들은 자신의 무지에 의해 똑같은 것을 반복되고, 또는 새로운 가설에 의해 이끌려 다니기도 한다. 당시 생시몽, 푸리에, 푸르동과 같은 사회주의들은 공상적이며, 현실적 조건과 경제적 판단에 대해 오류를 범한다. 카를 마르크스가 푸르동에게 보낸 <철학의 빈곤>은 푸르동의 <빈곤의 철학>에 대해 반박하기 위한 서적이다. 또한 엥겔스는 위 3명의 사상가만 아니라 다른 사상가의 정치적 노력이 실패했음을 설파했다. 물론 지금 생각해보면 마르크스의 정치사상은 소비에트 연방으로 실패했다고 하나, 진짜 마르크스의 원전을 읽었다면 마르크스의 실험에서 최종테스트는 성공도 실패하지 않은 채 중간에서 실패한 것이다.

 

대부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혁명시도를 했다고 치더라도 그 일부의 마르크스주의자만 마르크스를 알았지, 그 외에는 아무도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자신이 그 무리에 속함으로서 하나의 일원이라고 생각하는 공상적인 망상이다. 엥겔스의 서적은 바로 그런 점을 설파하면서도 현실적으로 다른 사상가의 사상에 대해 비판을 한다. 그런 서적이 지금으로부터 130년 전후로 나온 것이 지금 내가 살아가는 현실을 보자. 그때와 지금은 다른 세상이다. 그러나 놀라울 정도로 경제적인 조건과 그 조건에 의해 사회적 약자, 즉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은 비슷해 보인다.

 

제일 놀라운 말은 산업예비군이다. 또한 평소 경제가 호황이면 화폐가 유통되어 물가가 오르고, 임금이 하락되는 결과가 되는 점이다. 경제가 불황이면 근로자들은 언제든지 회사에서 나가야 하는 처지에 놓인 점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물가가 오른데 반해 임금은 오르지 않고, 경기가 좋지 않아 실업도 문제이다. 과학기술의 발달은 인간에게 편익을 주더라도 일하는 사람에게 일자리는 빼앗는다. 기계가 인간을 대신한다면 결국 그 사람들은 일자리는 줄어들고, 사람이 줄어든 만큼 일의 양이 늘어난다.

 

20세기 수그러질 것처럼 보인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오히려 21세기에 다시 부상되는 이유는 그의 지적이 아직도 유효하다는 점이다. 생각해보면 이 책에서 나온 단어나 해설 등은 지금 학교과정이나 혹은 사전적으로 많이 사용되는 단어와 의미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받아들이거나 혹은 거부한다고 해도 그들이 만든 개념이나 사상은 충분한 효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들은 공상이란 허울 좋은 망상을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에 대해 명확한 판단을 하라고 한다. 공상에 빠진 자들은 자신이 공상에 빠진 사실을 알지 못한다. 마치 소크라테스의 철학에서 무지한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모른지조차 모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공상에서 벗어나 과학으로 가는 것은 무지의 맹아를 스스로 벗어야 한다.

 

엥겔스는 유물론자이라고 하더라도 그는 독일 관념철학자인 칸트에 대해 존경하고 그의 철학을 받아들인다. 물론 마르크스 역시 칸트와 피히테 등과 같은 철학자의 가르침을 존중하며, 마르크스가 가장 존경하는 철학자 중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있다. 그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현세의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가르침이 있기 때문이다. 단지 마르크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노예가 존재하던 시대에 살았다는 점의 한계점을 지적한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이름이 지금에 이르지 않았나 싶다. 엥겔스의 <공상에서 과학으로>를 읽으면 마르크스의 여러 서적을 요약 정리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읽어보면서 제법 잘 정리된 책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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