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2병 데이즈 1 - Seed Novel
김월희 지음, nyanya 그림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라이트노벨 <중2병 데이즈>를 일요일 느긋한 일요일 휴일을 이용하여 읽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다던 그 <중2병 데이즈>를 말이다. 물론 주말이라고 하여 라이트노벨만 읽은 것은 아니었다. 일본 근대문학의 선구자이면서 일본 화폐 천엔의 주인공인 나쓰메 소세키가 저술한 <문(門)>이란 장편소설과 더불어 또한 오랜만에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 1권>인 정치경제학 비판도 읽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균형이 전혀 맞지 않은 주말 독서기록이었다. 그래도 알고보면 다 연관성은 있었다. 왜냐하면 나쓰메 소세키의 문이란 작품제목을 붙이기 위해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영감을 받았듯이 제 아무리 라이트노벨이라고 하여 우리 인류의 위대한 인문도서와 별개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왜 그럴까? 김월희 작가의 이전 작품인 <세계 제일의 여동생님>에서 그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스토리 전개나 모티는 전혀 다르다고 해도 <중2병 데이즈>는 기본적으로 <세계 제일의 여동생님>하고 조금 연관성이 있다. 주인공 연오를 마치 자신의 구원자인양 바라보는 흑련이란 것이 블랙헤이젤과 연상하게 만들었다. 그래서일까? <세계 제일의 여동생님>의 남자 주인공의 또 다른 여동생인 선우백련과 비교하면 백련과 흑련이란 이름이 각각 다른 시리즈의 작품에 등장한 것은 결코 우연의 산물일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기본적으로 김월희 작가의 블로그 보면서 생각하나, 그 작가의 포스팅을 보면 그렇게 나쁜 성격이라 들지 않는다. 정중한 존댓말과 친절한 설명을 붙이려는 그의 노력이 보인다. 하지만 작품 속에서 보이는 그의 글은 여전히 유토피아를 추구하기보다는 유토피아에 대한 회의감이 가득하다는 느낌만 든다. <세계 제일의 여동생님> 1권부터 그의 인용문은 이미 카를 마크르스와 게오르크 헤겔의 사상이 등장하고, 노암 촘스키 및 비트겐슈타인과 같은 언어학자의 저술도서도 소재로 등장한다.

그런 점에서 이번 <중2병 데이즈>에서도 여전히 그런 내용을 인용한다. 아마 그것으로 인해 여태까지 일어난 라이트노벨 세계에서 일어난 화젯거리가 생겼을 것이다. 대부분 어느 현상이나 어떤 사물이나 정황을 볼 때는 그 자체만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context라는 전후맥락을 두고 봐야 하는 것이 정론이다. 보통 라이트노벨이라고 하여도 일반 소설과 같이 하나의 서사구조를 가지는 스토리텔링이다. 별개의 장르로 구분하는 mass-culture와 sub-culture의 벽에서 단지 소재와 대상, 재미의 차이만 존재하지 근본적으로 큰 차이점을 없다는 점이다.

기본적으로 <중2병 데이즈>에선 작가가 주인공 연오의 입장이 되어 서술하는 것처럼 1인칭적 시점에서 이야기를 진행한다. 작가는 비록 연오를 만들어 내고 연오로 통해 이야기를 진행하는 것이나, 연오라는 인물이 가진 인식과 상황판단이 곧 작가가 보는 세계라고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내가 이렇게 작가와 연오에 대한 1인칭적인 시점에 대해 왜 이리도 강조하는 것일까? 나는 분명히 일요일 휴일 집에서 난이도가 높은 책을 읽다가 머리를 식힐 겸 <중2병 데이즈>를 처음으로 열었다.

그리고 그 앞날인 토요일에는 내 방에서 혼자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를 보았다.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는 다소 실화를 미화시켜 만든 작품으로 독일 나치가 폴란드를 강제 침공하여 거기에 주거하는 유대인들을 수용소에 가둔 후 노동착취 및 살인 등 인간성을 상실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크라코프에서 일어난 집단학살의 비극에서 이 유대인들은 수용소에서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때 크라코프 수용소장인 아몬 괴트 소령은 수용소에 갇힌 유대인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그 자리에서 권총으로 사살하고, 때로는 자신의 저택에서 저격총으로 부지런히 일하지 않은 유대인을 그 저격하여 사살하는 모습이 나온다.

그리고 쉰들러가 크라코프 수용소에 갇힌 유대인들을 구출하기 위해 다른 지역으로 구출할 때 기차가 잘못 들어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들어가는 모습이 나온다. 물론 거액의 뇌물을 이용하여 구출하기도 하나, 아우슈비츠는 어떤 곳인가? 저명한 여성 인문학자인 한나 아렌트는 2차 세계대전의 악몽을 겪은 유대인이다. 그녀는 예루살렘에 가서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소장인 아이히만의 재판을 직접 봤고, 그것을 토대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란 유명한 서적을 남긴다. 원래 그녀 자체가 군중(mass), 시민(people), 선동가(mob)로 나누어 대중사회에서의 파시즘에 대한 연구를 했었다.

그녀의 연구는 결국 세계적인 좌파와 우파 학자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가 잘 생각하고 명시해야 할 점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아이히만이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라는 점이다. 그는 극히 평범한 남성이었고, 집에서 다정한 아버지와 자상한 남편이었다. 집에 오면 가족과 저녁을 먹으면서 피아노를 연주하던 낭만과 예술도 알았다. 그런 점잖은 사람이 나치 수용소에서 가장 유명하고 잔인하고 악랄한 아우슈비츠 수용소장인 점이 아이러니하다. 그의 유대인 학살의 특이성은 최소한의 비용으로 얼마나 많은 유대인들을 죽일 수 있는가에 대한 연구였다.

아우슈비츠의 독가스 대규모 살해는 일제강점기 시절 무참하게 살육을 당해야 했던 우리의 아픈 기억과 더불어 인류의 상처이다. 그런 점에서 <중2병 데이즈>란 라이트노벨에서 나온 김월희 작가의 글은 어떻게 비판해야 하는가? 나치의 악랄한 수용소 아우슈비츠, 그리고 그곳의 소장을 임명한 히틀러와 히틀러가 선동부장으로 임명한 괴벨스, 그런 괴벨스에 대해 이 라이트노벨의 주인공 중에 2명인 흑련과 린은 이렇게 말한다. “미디어 장악은 문화 장악의 기본이니까”, “괴벨스가 했던 말이죠. 참고로 제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말이다.

막대한 유대인을 학살하고, 그것도 모자라 수많은 도처에 전쟁의 아픔을 남긴 독일 나치의 선동부장의 말을 따라하고 존경한다는 발언은 분명히 소재로서 판단하면 김월희 작가가 지나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문제는 김월희 작가 스스로가 과연 그것이 옳다고 여겼을까? 라는 의문이 예전부터 있었다. 가령 라이트노벨에서 주인공 연오로서 보는 1인칭 시점에서 흑련과 린을 바라보며 혼자 생각하는 글이 나온다. ‘두 사람의 뜬금없는 하모니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뒤에 나오는 ‘사실 아무 의미도 없었다.’라는 것이다.

만약 작가 스스로 괴벨스에 대한 미디어 정책이 옳다고 했다면 어떤 의미를 부여하거나 긍정을 했을 것이나 그 어떤 긍정도 없으며, 차라리 아무 의미 없는 한심한 짓이라고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괴벨스 발언과 관련하여 다소 작가가 민감한 부분을 꺼낸 것은 분명히 잘못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그 발언 자체로 통해 작가가 나치에 대하여 긍정적인 사고는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작가가 <세계 제일의 여동생님>에서 언급한 헤겔의 말이 생각나게 만들기는 충분하다.

“그렇지 않답니다. 오라버니! 헤겔이 주장한 시대정신이란 결국 진보 없이 반복되는 원형의 띠. 우민들은 결국 계몽의 대상이 아닌 사육의 대상에 불과하지요.”라는 대사를 보면 알 수 있다. 물론 인간의 정치적 입지에서 과거에는 분명 왕족을 중심으로 하는 절대주의 내지 봉건주의가 자리 잡고 있었고, 프랑스대혁명과 영국의 산업혁명 이후 부르주아 경제적 체계로 통해 완전하지 못한 민주주의가 도입되고, 1차 내지 2차 세계대전을 겪은 후에 형식적 민주주의가 도래했다.

세계에서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 미국을 지목하는데, 그 미국조차 여성에게 투표권이 준 것이 불과 100년 전후이며, 흑인에게 사회적 기회를 준 것도 여성에게 투표권을 준 것보다 더 뒤에 일어난 일이다. 결국 인간들이 가진 집단적 우월주의는 자신이 우월하다고 여기거나 혹은 그러고 싶은 인간들에게 계몽 대신 사육이란 이름이 주어진 게 되었다. 생각하면 칸트가 1789년 프랑스대혁명 시기에 그것에 대해 긍정적 반응을 보이지 않은 이유는 계몽이란 칸트가 지적한 것처럼 계몽이란 스스로 깨우쳐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느끼는 디스토피아적인 정신적 관념은 그래서 <세계 제일의 여동생님>이나 <중2병 데이즈>에서도 계속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미디어에 대한 논쟁에서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 다루기를 영국의 공리주의를 제창한 제레미 벤담의 판옵티콘처럼 이른바 감시라는 사회구조적인 부분을 다루기 때문이다. 최근에 발행된 아르망 마틀라르의 <감시의 시대>처럼 미셀 푸코나 제레미 벤담의 판옵티콘이란 일망감시탑을 지난 다각적인 감시체계가 생겼다. 그것은 바로 미디어라는 것이다. 푸코가 지적한 것처럼 언어는 권력을 만들고, 언어는 또 다른 언어를 생산하여 또 다른 권력을 낳는다. 언어는 이른바 사회적 언어인 langue로 통해 사회적인 통제력을 가지게 되는 셈이다.

언어의 통제력에서 언어란 비단 말과 글이 아니라 tv, 컴퓨터에서 나오는 영상까지 포함하다. 영상언어로서 군중심리를 지배하는 논리는 이미 20세기에 이루어진 과정이다. 발터 벵야민의 <문예이론>에서도 영화라는 장치가 영상으로 통해 군중을 파시즘으로 유도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미디어 장악은 문화 장악의 기본이니까”라는 위험한 발언은 충분히 학술적으로 역사적으로 검증된 사실이다. 그런 문화라는 곳은 인간이 사상을 만드는 것이 인간이 사상에 의해 움직이는 곳이다.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공상에서 과학으로>를 보면 세계가 사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상이 세계를 만든다고 적혀있다. 문화라는 곳은 인간의 각종 삶과 풍습, 경제, 정치, 사회 등이 얽혀있는 곳이다. 그곳을 지배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어떤 것이냐에 따라 중의주의라는 단어가 괜히 나오는 것은 아니다. 재미와 흥미를 느끼고자 하는 라이트노벨에 대해 언급한다면 너무 깊이 들어간 것은 분명한 사실이나, 라이트노벨이라 하여 비평적인 접근에서 제외한다는 것 자체가 더 잘못된 점이다. 괴벨스 발언보다 더 관심을 두어야할 부분은 아마 괴벨스 발언 뒤에 나온 두 소녀의 대화록이다.

“그래요! 선전과 선도 이야말로 추악한 정치의 기본이죠!”, “우민들을 다스리기 위해 매스미디어의 활용만큼 효과적인 방법은 없으니까.”, “후후. 바로 그거예요! 기원 이래로 인류는 단 한 순간도 발전한 적이 없으니까요!”, “우리들은 과거 이상으로 몇 배나 효율적이고 발전한 통제수단을 갖고 있지.”

위의 단어를 보면 정말 재미로 넘어갈 수 있는 말일까? 솔직히 생각하면 중세 유럽 이탈리아에 유명한 사상가인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집필한다. 그때 그 <군주론>의 이상적 모델인 포악한 왕인 체자레 보르지아를 두었다. 그 왕이 로마냐라고 불리는 지역을 정복할 때 많은 주민들이 반항을 했다. 그때 자신의 부하 중에 매우 잔인한 사람을 보내 폭력정치를 했고, 주민들은 그 부하에 대해 지독한 반감을 사자, 어느 날 그 부하는 시체로 발견되고 그 마을주민들의 원성도 조용해졌다. 군중들이 가지는 반감에 대해 통치하는 방법은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집필하듯이 그 이전에도 그 당시에도 그 후에도 존재했다.

지금에 와서 더욱 강력한 것은 미디어라는 것이다. 정보의 전달에서 예전에는 인간이 직접 말을 하거나 친필을 전달하는 수단만 존재했다. 그러나 전기통신기술 발달로 전화가 생기고, 인터넷이 생기며, 핸드폰과 각종 통신수단이 발달했다. 미디어의 통제로 언제 어디서든 마음에 드는 정보를 일방적으로 보낼 수 있다. spectacle이란 단어는 바로 인간이 이미지로 통해 매개되는 사회를 의미한다. 괴벨스의 논란은 바로 spectacle로서 인간이 문화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가 인간을 지배한다는 논리다. <중2병 데이즈>는 말 그대로 중2병이거나 혹은 중2병처럼 보이는 사람이 주인공인 작품이다.

이미 비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비정상적인 발언을 하는 것이 비정상적일까? 오히려 비정상적인 사람이 정상적인 발언을 하는 것이 비정상적일까? 작품의 전후맥락과 동시에 그 전후맥락의 모티브나 여러 가지 상황은 좀 더 생각해보면 다양한 유추가 나오지 않나 싶다. 물론 꿈보다 해몽이 앞설 수 있겠으나, 작가는 이미 라이트노벨을 저술하면서 우리의 일상과 우리가 일상에서 벗어나 비일상에 대한 동경심과 욕망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비일상적인 세계란 우리가 상상하듯이 그렇게 대단하거나 좋은 세계가 아니다. 오히려 그 일상 이상으로 더 곤혹스러운 상태다. 그런데도 인간은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안 그렇다면 처음부터 김월희 작가가 <세계 제일의 여동생님>처럼 인류역사 중에 최고 금기 중의 하나인 근친상간에 대해 풀어가는 것은 어떤 것일까? 블랙헤이젤 당주는 끝까지 친오빠와의 근친상간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린다. 그 모든 것을 버리는 순간 그녀는 세계와의 단절을 선언한다. 인간에게 주어진 욕망에는 금기가 많다. 신화 중에 하나인 <오이디푸스왕>에서 오이디푸스는 아버지인 테베의 왕 라이오스를 아버지인지도 모른 채 죽이고 만다. 그리고 테베를 괴롭히는 괴물 스핑크스의 문제를 해결하고, 테베의 왕이 된다.

이때 테베의 왕녀인 이오카스테는 오이디푸스의 어머니였고, 오이디푸스는 어머니이면서 아내인 이오카스테와 더불어 2남 2녀를 낳는다. 그렇게 비일상적이고 금기를 깨고 불길한 이야기인 오이디푸스왕의 이야기는 신화로서 남았고, 그것은 단절된 이야기가 아니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입문으로 통해 아직도 연결되는 공시적인 언어가 되었다. 일상과 비일상의 구분을 할 수 있는 분별력도 좋으나, 우리가 항상 일상만이 아닌 비일상에 동경심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늘 새로운 자극을 원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욕구보다는 욕망을 더 바란다. 욕구는 한 번 만족하면 그 순간으로 끝이 나나, 욕망은 한 번 만족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새로운 것에 대해 탐하기 시작한다. 그렇다 보니 이야기의 세계에서 인간의 욕망은 끊임없이 나간다. 비일상에 대한 동경 역시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하나의 과정이다. 환상이란 것은 직접 육체적으로 경험하지 못한다면 정신적 관념으로 느낄 수 있다. 그것이 환상과 비일상이라 하여도 그 자체가 우리에게 일상 중의 하나로 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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