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을 켜다 - 무도한 세상에 맞서는 세상의 울림
표정훈 지음 / 을유문화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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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철학 입문서 내지 혹은 철학자 관련 도서를 읽으면서 어떤 철학자가 있는지 그 철학자가 살아간 시대적 배경과 상황, 그리고 그가 이룬 업적들을 다룬 것들을 보았다. 문제는 그런 서적을 읽는 순간 그 철학자들이 제시하는 사상적인 부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물론 이번 서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철학자의 서적들을 읽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보면서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면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철학자에 대한 소개나 그 시대적 배경을 다루는 책들을 보면 늘 아쉬운 게 그저 철학교양서적에 불과한 점이다. 그런 점에서 <철학을 켜다> 역시 그런 책에서 크게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대부분 철학도서가 그렇듯이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칸트와 마르크스라는 큰 틀에 몇몇 잘 모르는 인물들이 나왔다.

 

그래도 그나마 인상적인 인물은 스피노자라고 할까나? 스피노자에 대해 일반적으로 철학도서에 많이 나오는 편은 아니다. 그의 일생이 항상 고독과 위기 그리고 미완의 저술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한 업적은 개인적인 부분이 대다수의 대중을 이끌지 않았다. 적어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학교를 세워 제자들을 양성했으며, 그들은 당시 그리스 사회에선 어느 정도 지위를 확보했기에 어느정도 연구자료가 전해온 것이다.

 

스피노자의 경우는 그러지 못했다. 하다못해 평생 쫓기는 신세가 되어 말년에 정신적인 피해망상에 시달린 루소조차 많은 지식인들의 심금을 울렸고, 병으로 죽은 마르크스의 경우에도 국제노동자협회에 글을 적어 보낼 정도로 활발히 활동했다. 스피노노자는 고독과 고독으로서 살아간 것이다. 예전에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에서 나온 내용처럼 스피노자그는 생물학적으로 살아있어도 사회적으로 죽은 인간이었다.

 

그가 본 부당한 세계, 그 세계라는 것이 하나의 도덕이고 하나의 진리라는 비틀린 사회가 그의 철학을 일깨워주었다. 철학은 자기비판과 더불어 자기가 속한 세상에 대한 비판에서 나온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테제들>에서 프랑크푸르트대학 사상가가 단 1명의 고통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 세계는 철학을 멈추면 안된다고 했다.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 철학이라면, 그 지혜라는 것을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물론 여러가지 종류와 방법이 있을 것이나, 철학은 인간이 인간이기를 바라는 학문이다. 요새같이 자본주의 논리가 하나의 가치기준이 된 세상에선 인간의 존재조차도 자본에 비례하는 실정에 이르게 되었다. 스피노자와 같이 호모 사케르들은 당시 막혀있는 사회적 규율과 도덕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는 자본에 따라 그 존재감이 희비로 엇갈릴 수 있다. 영화 <두 개의 문>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호모 사케르라는 존재는 그 어디서 찾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어도 찾지 않으려는 사람이다.

 

우리 인간들이 타인에 대한 배려나 이해는 이미 쇠퇴해질 때로 쇠퇴한 것인가? 생각해보면 중세시대의 소설에서도 황금은 모든 것을 바꾸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인간의 도덕적 타락을 두고 보면 어제 오늘 일이 아니라 인간의 근본이 문제가 아닌가 싶다. 철학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인간이 타락해서 필요한 게 아니라, 그 타락으로 인해 인간 세상에 큰 위기와 상황이 닥친다는 점이다. 버트런드 러셀과 같은 경우 그의 업적에서 평생 반전, 반핵을 위해 노력했다.

 

어떻게 보면 스피노자와 같이 충분히 그도 좋은 가문에서 좋은 환경에 좋은 인생을 보낼 수 있었으나 과감히 버리고, 어려운 길을 선택했다. 덕분에 20세기 위대한 철학자 이름에서 러셀은 빼놓을 수 없는 영국신사이다. 하지만 여전히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 길은 어렵다. 어렵고 쉽지 않아 누구나 가지 않은 길이기에 그들의 사상이 전해내려오고 그들의 이름이 내려온다.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당시 가장 배척받고 가장 무시당한 자들이 오늘날에 성인에 이르기까지 한다.

 

마르크스의 자본은 인류역사상에 가장 많이 팔린 성경과 동급으로 많이 팔린 서적이고, 19세기 이후 20세기를 넘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인간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준다. 어떻게 보면 그의 예언이라고 할지 아니면 그의 예상이라고 할지 어느 정도 맞아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 현상을 보면 철학이 지혜를 사랑하는 학문이란 점에서 인간의 선견지명은 분명히 지혜로운 인간의 머리에서 나오는 보배와 같은 것이다.

 

철학을 계속 켜고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은 인간이 유일하게 지금 가는 길의 중심에서 현재 위치를 알려면 오직 철학만이 제시할 뿐이다. 철학이란 문제를 해결해주는 만능요술지팡이가 아니라, 적어도 철학이란 어느 문제가 왜 생겼는지에 대한 문제를 해결해주는 도구이다. 원인조차 모르고 대안을 찾아야 하는 인간의 어리숙함에서 철학은 인류가 가야할 길을 밝혀주는 하나의 등불이다. 하지만 등불이 있더라도 앞의 성난 파도를 막아주지 않는다. 단지 성난 파도가 오고 있다는 정도만 알게 해주는 것이다.

 

철학을 켜다는 결국 그런 인류의 역사에서 인류가 앞을 보고 갈 수 있는 등불을 켜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개인적으로 나로서는 루소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의 사상덕분에 우리나라 헌법정신인 자유민주주의라는 것이 성립이 가능한 것에 대해 감사하게 여긴다. 단지 그 사상과 헌법을 모른 채 자유민주주의를 외치는 사람들을 보며, 이 책에서 소개되지 않은 니체의 사상을 왜 다루지 않았는지 조금 아쉬운 면도 없지 않지만 말이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스피노자와 관련하여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내일 당장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오늘 나는 한 그루의 나무를 심겠다." 지금 살아가는 우리 인간은 얼마나 현재에 충실할까? 덧붙여서 스피노자의 인상은 아마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인 루이 알튀세르 영향이다.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주의자였으나, 자신에 대해 스피노자주의자라고 한다. 부당한 도덕관에 대해 부당한 현실에 대해 끊임 없이 고찰하고 지적하고 대항한 스피노자로 본다면 인류의 스승이라 칭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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