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제일의 여동생님 4 - Seed Novel, 완결
김월희 지음, nyanya 그림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2년 12월
평점 :
품절


<세계제일의 여동생님 4권>을 읽으면서 보통 사람들이 기대하는 엔딩으로 가지 않았다. 모두가 우려하고 회피하려는 최악의 상황으로 전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작품을 집필한 김월희 씨 본인의 입장을 본다면 후기에서 나오다시피 마음에 든다고 했다. 왜 그런 것일까? 전에 도서토론 모임에 가서 문학소설을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소설은 제법 인지도도 있었고, 작가분도 제법 유명한 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종이로 구성된 책인데도 그 책과 <세계제일의 여동생님> 시리즈를 읽으면서 서평에 대한 깊이와 분량 그리고 전개하는 방향은 오히려 문학소설보단 라이트노벨에 더욱 깊이가 있었다.

 

그런 점을 본다면 라이트노벨이라고 하여 결코 수준이나 함량미달이란 꼬리를 붙일 이유는 없다. 그러나 왜 그런 꼬리표가 따라올 필요가 없는지에 대해 조금 고민해봤는데, 주변에 독서광이신 분이 나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 한국 라이트노벨은 기존 문학세계에 진입하지 못한 작가들의 우울함과 현실적 냉소감이 들어가 있다는 점이다. 과연 생각해보면 <세계제일의 여동생님>라는 작품 내의 Text를 두고 내가 적은 Context라는 전후맥락은 상당히 날개를 펼친 듯하다.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선 단순히 작품만이 아니라 작품 그 이상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이번 4권에도 1권에서 나온 어구가 반복된다. 19세기 사회경제학자 카를 마르크스가 1851년 12월 나폴레옹 3세(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의 조카)가 의회에 무력진압으로 통해 쿠데타로 권력을 쟁취한 일을 대해 책을 적은 적이 있다. 서적 명은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거기서 처음에 아주 유명한 문장이 나온다. 출판사나 혹은 번역자의 차이에 따라 다른 문구로 묘사되겠지만, “역사는 2번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소극)으로”, 이런 문장을 <세계제일의 여동생님>에서 거론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상황이 시영에게 다가왔고, 또한 그가 선택한 것이었다.

 

희극이라 하여 세상이 모든 것이 아름답고 좋은 일로 가는 게 아니다. 아이러니한 역사적 반복에서 비롯되는 왜곡된 현실적인 자화상이다. 그런 말을 하는 이유는 <세계제일의 여동생님 1권>에서 시영의 여동생인 마리아는 시영에게 이런 말을 한다. “그렇지 않답니다. 오라버니! 헤겔이 주장한 시대정신이란 결국 진보 없이 반복되는 원형의 띠. 우민들은 결국 계몽의 대상이 아닌 사육의 대상에 불과하지요.”

헤겔이 주장한 우민이란 결국 대다수의 인간이고, 그들은 오늘날 살아가는 존재이다. 라이트노벨이라고 하더라도 철학이란 학문을 보편적인 인간에 대한 고찰에 적용할 수 있다. 철학이란 세상을 보는 시점이기도 하나 한편으로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되기도 한다. 문제는 철학이 하나의 이상적 가치에서 지나 이념적 현실로 이향되면 그렇게 되기가 어렵다. 그 이유는 모든 인간들이 철학적인 가치와 삶을 살지 않는 이유다. 그런 암울한 디스토피아적 가치관이 이 책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라이트노벨 장르는 일반적인 문학에 비해 환상적인 요소가 심하고, 인간(작가) 개인적 욕망만 아니라 보는 이로 하여금 욕망을 공유한다. 대부분 라이트노벨을 보면 미소녀가 등장하는 하렘구조를 지닌 작품들이 많다는 점이다. 모든 라이트노벨이 작가와 독자의 욕망을 글로 통해 해소하는 카타르시스만이 전부는 아니더라도 결국 많은 작품들이 그런 속성을 충실히 따라가는 점들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결말이 이루어지는 장면은 언제나 처음과 같은 어중간한 인간관계와 더불어 혹은 주인공이 이루고 싶은 욕망의 성취감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세계제일의 여동생님>에서도 그런 욕망의 성취감을 맛보는 모습이 나온다. 단지 문제는 독자의 입장보다는 그 작품 내의 주인공에 대한 성취감이 더 중시된 점이다. 작가가 그것을 두고 아주 마음에 들고, 헤겔의 계몽에 대한 암울한 현실적 모순은 시영이 가진 모든 가치관과 삶의 정체성에 큰 영향과 고뇌를 던져준다. 2권과 3권에서 보듯이 단 1명이 백련을 구하기 위해 수 백 명분의 백련을 죽도록 내버려둔다. 아니 죽게 하여 자신들의 권위를 어둠에서 살리는 행동은 분명 보편적인 인간이 가진 도덕관으로 비추어보자면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그래도 한편으로 납득 가는 이유는 그것이 현실적 부분을 토대로 만든 점과 그런 소재를 다른 방식으로 꾸며 하나의 모티브 내지 상황적 연출로 만든 것이다. <세계제일의 여동생님 2권>에서 실제 인물인 존 매카시라는 1950년대의 미국 정치인이 나왔다면 <세계제일의 여동생님 4권>에서도 그런 인물이 나왔다. 물론 그 본인은 죽었고, 그것을 대신하는 허구의 존재로 나온 것이 설정이었다. 시영의 여동생 이름은 마리아, 그리고 시영을 납치한 혁명군의 최고지도자 마리아, 똑같은 이름의 마리아가 유럽도 한국도 그리고 미국도 아닌 남미에서 등장한다.

 

살바도르 아옌데, 칠레에서 최초로 국민투표로 의해 당선된 대통령, 그는 1973년 군부 쿠데타로 의해 살해된다. 그가 한 업무는 빈곤한 경제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산업의 국유화였다. 흔히 우리는 사회민주주의라는 정치적 제도이다. 그는 경제적 빈곤과 동시에 마약밀매 문제에 대해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결국 살해되고 말았다. 그의 가족들에 대해 자세히 모르지만, 적어도 시영을 납치한 마리아 아옌데의 인물적인 모티브는 살바도르 아옌데라는 점이다. 남미라는 곳은 항상 마약을 재배하는 테러조직과 내전을 펼치며, 마약으로 통해 세계 마피아나 테러조직과 연결되어 있다.

 

그렇게 마약밀매조직을 소탕하려한 정치인이 이유 없는 군부에 의해 살해라는 것은 솔직히 말하여 배후조직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대통령이 군부쿠데타에 의해 살인당한 것과 동시에 칠레에 각종 다국적 기업이 들어와서 경제적 통상을 하는데, 불평등한 임금체계와 세금구조, 게다가 칠레의 영토에 숲이 사라지고 환경오염이 가중되는 문제를 야기했다. 여기서 시영이 보는 것은 그 아옌데의 딸로 나오는 마리아로 통해 보는 세계라는 곳이다. 세계는 도대체 무엇을 하는 곳이기에 칠레의 어느 소녀를 쿠데타군의 지도자로 만들도록 하고, 거기에 모자라 그 소녀가 하려는 일조차도 사전에 준비된 것이라면 인간의 운명은 무엇으로 봐야 하는 것인가?

 

표지에는 블랙헤이젤의 당주인 마리아가 아주 해맑은 미소로 손을 잡으며, 시영의 손에 들린 권총의 방아쇠를 기다리고 있다. 작품에서 주인공의 입장은 절대적이라고 볼 수 없으나, 대부분 그 주인공의 시선에서 가치관이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3인칭이 아니라 1인칭적인 시점이기에 시영의 관점에서 보던 세계는 부조리와 부조리로 엉킨 수라장에 불과했다. 그런데 자신이 선택한 6발의 러시아룰렛의 결과는 피할 수 없는 파국으로 닥친다. 자신을 납치한 마리아 아옌데를 생각하면 시영 개인적으로 엄청난 가해자이나, 그녀의 입장과 그녀의 행동을 보면 정말 옳고 그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의문을 남긴다.

 

니체의 <선악의 저편>이란 도서를 보면 인간이 가진 도덕이란 한낱 우스운 것에 불과하다. 절대적으로 자신들이 믿고, 그 사회를 유지하며, 심지어 세계의 가치라고 믿은 것은 결국 기만이란 이름을 정의로 바꾼 것이다. 시영을 납치하고 핵무기를 얻어 미국 의사당에 날리려고 하는 마리아 아옌데의 모습을 보면 정말 우리가 아는 사실과 거짓, 그 진실과 거짓을 넘어 있는 진실이란 무엇인가 대해 생각해보면 그저 우리는 속고만 살았다고 볼 수 있다. 인간에 주어진 자유와 평화 뒤에는 누군가 자유와 평화를 박탈당해야 했다. 인간에게 어느 사회에서 너무 당연한 것에 대해 물어보면 그것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만약 이슬람 문화권에 있는 사람에게 돼지고기를 한 덩이를 준다고 보자. 그들은 돼지고기를 먹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돼지라는 동물 자체를 혐오한다. 그들이 돼지를 혐오하는 이유는 이슬람 문화권에 정한 하나의 규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고서나 인류학의 현지조사에 보면 이슬람 문화권 사람들도 아주 예전에는 돼지고기를 먹었다고 한다. 단지 돼지는 날이 습한 곳을 좋아하는 습성이 있으므로, 사막이 넓게 분포된 이슬람 문화권에서 돼지를 키운다는 것은 엄청난 비효율적인 일이며, 그런 돼지고기를 먹기 위해 그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은 무척 불편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돼지고기를 먹지 말아야 하는 계율이 마빈 해리스의 <음식문화의 수수께끼>에 실린 내용이다. 100% 옳은 이론과 가설보단 문화인류학이나 혹은 생태자연학으로 보더라도 충분한 설득력이 있다. 그렇지만 그 문화권에서 그렇게 관찰할 수 없다. 그것은 그 절대적 가치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기 때문이다. 자유와 평화라는 슬로건에서 우리가 자유와 평화의 존재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어디서는 자유롭지 못한 인간들이 공포의 위기에서 평화를 박탈되었기에 확인이 가능하다.

 

자유라는 테제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비자유라는 안티테제가 존재해야 한다. 물론 자유라는 테제도 때로는 자유를 파괴한다. 니체의 <선악의 저편>에서 프랑스대혁명 시기에 단두대 아래 이슬로 사라진 롤랑 부인의 한 마디가 내 가슴을 찌른다. “자유여, 당신의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죄가 저질러졌는가!”

결국 자유, 평화, 평등을 말하는 인권이란 존재는 인간이 제일 먼저 가지는 것이다. 이른바 천부인권이란 말이 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롭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 하지만 인간은 혼자가 아니라 사회로 통해 살아가기에 자유가 박탈된다. 자유라는 것은 동시에 모든 것에 대한 해방도 포함하여 어느 것에 대한 속박도 포함되어 있다. 인간은 어느 사회의 일원이 되어야 자유가 있다는 점이다. 시영이 바라본 그 자유와 평화는 과연 무엇인가? 자신을 납치를 명령을 내린 마리아 아옌데는 마치 천사 같은 미소로 부모 없는 고아를 아주 다정하게 대해준다.

 

그 모습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은 천사가 바로 여기 있다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그러나 그녀는 세계 언론에서는 악질적 쿠데타 전범이고, 심지어 마약밀매상과 연계되어 죄 없는 일반 국민들을 학살하는 폭군으로 묘사되어 있다. 마리아 아옌데의 진실은 시영의 눈에는 분명 존재하나 세계라는 곳에서 마리아는 무조건적으로 타도해야할 인간 중에 하나였다. 그녀가 나온 세계 다른 나라의 방송국에서는 전혀 엉뚱한 정보가 나온다. 인간의 인식을 좌우하는 것은 여론이고, 그 여론은 언론에서 시작된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도 역시 그 사회의 올바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 여론이었다.

 

세계적으로 여론은 살바도르 아옌데의 딸로 나오는 마리아가 아니라 그녀의 목을 조르는 존재였다. 아옌데 죽음에서 예전의 그의 관료들은 국민을 위한 옳은 정치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으나 그것을 실천할 수 없었다. 세계는 옳은 것을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맞추기를 바라는 것이다. 정의라는 것은 결국 무엇인가? 최근에 미국 하버드 대학교 정치학과 교수인 마이클 샌델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서적으로 통해 큰 파장을 일으킨 적이 있다. 물론 칸트의 구성주의적 자유주의에 롤즈의 정치적 자유주의로 통해 인간이 가진 이성으로 통해 자유라는 것은 결국 인간의 이성으로서 조절하는 하나의 가치라고 한다.

 

하지만 진짜 정의적 가치에서 인간 스스로 이성을 통해 얼마나 잘 수행하는 것인가? 차라리 이성이 아닌 집단이기주의가 하나의 도덕으로 군림한다. 그 군림하는 도덕 중에서 최고는 세계라고 불리는 권력이다. 인간이 아무리 문명이 발달하여 정보와 소통이 잘 되더라도 그것을 그만큼 통제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 역시 교묘하고 강력해진다. 인간에게 세상을 제대로 판단할 수 있는 지적능력이란 행복을 인식하기 힘든 조건으로 본다. 세계를 직시하는 것은 온갖 부조리를 모두 보는 것이고, 그것을 인식하지 않는 것은 자신만의 안락함에 빠져드는 것이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나는 노예의 평화보다는 위험한 자유를 택할 것이다."라는 문장이 있다. 인간이 계몽적으로 새롭게 볼 수 있는 것은 위험한 자유를 택하는 것이다. 노예의 평화에서 마리아 아옌데는 최후의 선택에서 고뇌한다. 그녀의 선택은 미국 의사당에 핵무기를 발사하는 것이고, 그것을 누르는 선택에서도 블랙헤이젤의 마리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곳의 상부의 미국 정치인과 그 아래에 있는 세계 권력의 트라이앵글이 모두 사라지면 자신만 더욱 좋다고 한다. 단지 거기 지하에 자신의 모습을 하고 있는 도로시라는 복제인간은 마리아의 이름으로서 죽어야 한다.

 

그 도로시의 죽음에 대해 마리아는 다소 유감이나 도로시의 운명은 자신의 역할을 위해 사라지는 것이 최고의 행동이란 것이다. 마리아 아옌데가 만약 핵을 날리면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그저 자신만 세계적인 악질 테러리스트로 낙인으로 찍힐 뿐이다. 그런 와중에 블랙헤이젤의 마리아는 아옌데의 마리아가 평소 매우 아끼는 어린 아이들을 인질로 삼는다. 아옌데가 계속 블랙헤이젤 당주의 심기를 거슬리는 그 순간마다 어린 아이들의 머리에 총알이 박히고, 생명 없는 고기가 된다.

 

인간의 의지가 담긴 행동에 정의를 관철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으나, 아옌데의 목표는 바로 자신 옆에 있던 어린아이들이 평화로운 세상과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기를 원한 것이다. 그런 과정에 그들이 살아있지 않는다면 자신이 추구하던 가치자체가 사라지는 것이다. 결국 마리아의 승리로 끝이 나나, 한편으로 그런 마리아의 광기는 시영으로 하여금 충동을 주게 한다. 부조리한 세상에 대해 정의의 이름이 통하지 않는다면 과연 무엇으로 하여 부조리에 대해 응징할 수 있느냐고 말이다. 시영의 답은 바로 자신의 손에 들린 권총이고, 그 총구는 마리아에게 향한다.

 

두 사람 모두 눈물을 흘리며 최후를 마감한다. 아옌데의 마리아는 그 후의 소식은 모르나, 단지 블랙헤이젤의 시영은 마리아를 대신하여 당주가 된다. 게다가 핵무기 위험으로부터 안전을 지켰기에 그 공로도 인정받았다. 그렇게 하여 블랙헤이젤이란 강력한 무기상인의 왕좌에 오른 시영이나, 그가 평소에 이 모든 세상은 부조리하다고 여긴 그 부정적 시야에서 결국 그 왕좌에 올라와도 그 부조리를 고칠 수 없는 것을 느낀다. 아니 오히려 자신마저 그 부조리라는 어긋난 세계에 맞춰가는 것이다. 단지 마리아처럼 무조건적으로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파괴해야 한다고 여기는 것을 파괴한다.

 

그가 많이 파괴하든지 작게 파괴하든지 시영에게 주어진 악마의 탈은 결코 벗을 수 없는 영원한 동반자였다. 시영은 총수가 되어 과거의 자신을 봐라본다. 부모 없이 고아로 지내다, 양부모가 있어도 그들의 폭력과 학대로 고통 받다가 양부모를 살해한다. 그때 자아가 둘로 나뉜다. 하나는 세상 어디든 희망은 없다와 그리고 있을 것이다. 있을 것이라고 여긴 시영의 자아는 양부모의 지갑에 있는 돈을 들고 나오나 그에게 처한 것은 가혹한 운명이다. 부모 없는 아이, 집이 가난한 아이, 집세 걱정에 일상 자체가 고통인 시영에게 과연 희망이란 존재는 있는 것인가?

 

그가 2권부터 심연의 세계에 들어간 사람이야만이 어둠에 있는 자와 조우하며, 그들을 어둠과 악으로서 구원할 수 있다고 한다. 상당히 이 말은 냉혹하면서 현실적이다. 자신이 처한 입장에 놓이지 않으면 인간이란 그 아픔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오히려 그런 아픔과 고통을 이용하여 시영의 상황을 몰아넣는다. 처음 마리아가 학교에 나타나 시영의 입에 입맞춤하고 루마니아로 날아갈 때, 시영은 옥상에서 자살을 시도하려 했다. 이때 진정한 환상적 존재가 등장한다. 마치 백련과 비슷한 의상을 입은 어느 여인이 나타나 시영에게 희망 없는 세상에 살아가길 바란다.

 

시영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세계란 부조리로 이루어진 허물 수 없는 벽이다. 분명 생물학적으로 살아있는 인간이면서 인간적 존재로 인정받지 못하는 인간, 우리는 그런 존재를 두고 호모 사케르라고 한다. 학교에서 선생과 급우들에게 무시당하고, 학교 밖에서는 온갖 갖은 생계로 허덕인다. 누구 하나 손을 내밀지 않은 그 비참함을 겪었기에 백련도 리나도 아옌데의 마리아도 말리거나 구할 수 있었다. 대신 그 이상의 희생과 고통을 감수할 수 있었다. 단지 리나는 백련의 의료기술을 다 동원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 후유증으로 죽었다.

 

그러나 블랙헤이젤의 당주가 되어 리나의 유언 같은 편지를 받았을 때, 리나는 자신이 죽더라도 적어도 죽는 그 순간에는 인간으로서 죽을 수 있었다. 백련과 친구가 되었고, 리리와 자매로서의 의를 풀었으며, 블랙헤이젤의 적이란 이름도 지울 수 있었다. 인간에게 어떻게 살아가는 것과 동시에 어떻게 최후에 마무리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그 길에서 시영은 너무 많은 일을 봐왔고, 자신의 무력함을 느꼈고, 자신이 느낀 부조리는 도저히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자신의 운명 앞에 바뀌지 않은 숙명의 고리에서 그가 선택한 길은 블랙헤이젤의 당주였다.

 

그리고 3년 뒤에 어느 작은 병원에 침투하여 모든 사람을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죽이고, 심지어 거기에 조금이라도 관련 있는 사람까지 제거하라고 명령한다. 어느 이상한 병동에 몸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구속된 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온 몸이 고통의 흔적이 남아있는지 화상으로 일그러진 얼굴, 고문으로 멍든 팔과 다리,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해서인지 매우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 여인은 자신에게 모든 것을 희생한 블랙헤이젤 가문의 전 당주 마리아였다. 아무 기억도 없이 백지 같은 그녀는 시영을 몰라보는 것도 모자라, 그 특유의 프라이드와 냉혹함도 없었다.

 

오직 기억을 잃어버려 낯설 병동에 갇힌 가엾은 소녀였다. 블랙헤이젤의 당주로 최고의 권력을 가진 시영, 그리고 그 앞의 마리아, 시영을 마리아를 데리고 블랙헤이젤 가문으로 데리고 간다. 그토록 마리아가 당주로 있을 대 얻지 못했던 시영의 금지된 사랑을 얻게 된다. 하지만 더욱 무서운 건 3년이란 시간에서 온 몸이 망가지도록 고생해도 마리아는 연기를 한 것이다. 자신이 한 없이 부족해야지 오라버니가 봐주신다는 것을 말이다. 사실 마리아도 시영을 봐줄 수 있는 것은 시영이 한 없이 약하고 무력한 인간이었다.

 

단지 시영은 무력함을 숨기지 않고 그 자체였다면, 마리아는 그 무력함을 선택했다. 자신이 세상 모든 것을 가지고 군림한 것은 시영을 가지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손을 떠나 시영의 손에 들어갈 때 마리아는 세상 그 모든 것을 얻었다. 결말은 매우 부도덕하고 인간의 보편적 가치로 규정하면 상당히 도발적이다. 작가는 그런 세계가 마음에 든다고 했다. 남매의 불행한 해피엔딩이 말이다. 생각해보면 이 작품은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기반으로 둔다. 아무리 발버둥해도 결국 그것을 대체할 다른 무엇이 대체한다는 사실이다.

 

그래도 시영에게는 자신이 살아갈 곳과 자신이 의지할 사람이 있다는 것만은 개인적 성공이나 작품 그 자체는 성공으로 가는 것을 부정했다. 읽으면서 조지 오웰의 <1984>처럼 디스토피아의 세계에는 희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만 느꼈을 뿐이다. 단지 <1984>에서는 스미스는 고문으로 인해 온 몸이 병이 들고, 머리털이 다 빠지며, 2+2=4가 아니라 5라고 대답하는 것에서 그 자신의 불행과 세계의 불행을 동시에 맛을 본다. 그런 흉측한 그로테스크적인 현실을 외면하지 못한다는 문학적 요소에서 역으로 우리는 부정의 부정이 또 다른 부정으로 이어지게 된다.

 

물론 <세계제일의 여동생님>도 부정의 부정이 긍정이 아닌 또 다른 부정과 헤겔이 말한 되풀이로 되었다. 시영은 마리아의 세계를 부정하나 결국 그 자신이 부정한 것을 받아들이고, 근친상간이란 부정적 요소를 긍정했다. 이런 어긋난 것을 보고, 독자 스스로 옳다고 여기기보단 그것이 심적인 그로테스크로 여기길 작가 바랬을까? 개인적으로 매우 악녀인 마리아가 총을 맞은 후에 아무리 연기라도 온 몸이 멍이 들고, 얼굴도 화상에 의해 흉측하게 변했다. 보통 사람의 눈에는 전혀 아름답지 않은 모습이나, 시영에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었다. 우리가 아름답다고 보는 미, 그 미학적 요소에서 인간의 가치를 변질 적으로 여길 수 있다.

 

작가가 원한 미적인 가치란 바로 부정의 부정으로서 그것이 긍정이 아니라 오히려 부정에 대한 긍정이나 혹은 부정의 부정은 또 다른 부정으로 이어짐이다. 인간은 누구나 어둠을 가지고 공유하고 있다. 그런 암울한 담론을 <세계제일의 여동생님 3권>에서 어디에서도 구원받지 못한 리나의 입에서 나온 점과 시영이 그렇게 인정하는 점이다. 다시 작가의 후기로 보자. 김월희 작가는 이런 문구는 집어넣는다. “저는 작품에 나오는 어떤 사상이나 행동에 대해서 그것이 반드시 실제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라고 한다.

 

겉으로 봐서는 암울한 디스토피아관을 부정하는 것인가? 아니면 인물이 대사하는 것에 대해 수사적인 방법을 부정하는 것인가? 김월희 씨의 대답에서 내가 보는 것은 그것이 반드시 실제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100%는 아니더라도 100% 이하는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정말 “반드시 실제”에서 “전혀 실제”로 바꾸는 것이 더 부정하는 의미이다. 김월희 작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이해는 불가능하나, 적어도 이런 작품을 적는다는 점은 상당히 어둠이란 심연을 생각하고, 작품 내 소재와 기반이 되는 어느 인물과 대사들이 분명히 실존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야기의 결말을 자신이 내리기보단 독자가 스스로 찾아가보는 것을 권유한다. 지금 내 컴퓨터 앞에 <세계제일의 여동생님 4권>과 동시에 노암 촘스키의 <불량국가>가 있는 점에서 심연의 세계는 존재함은 인정하는 바이다.

 

작품을 읽으면서 조금 부족한 점이 있다면 가족관계 부분이다. 시영이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부분에서 기억이 흔들리고, 의식이 멍해진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어린 시절에 백련과 마리아는 어떻게 같이 있었는가? 어머니 선우 가문과 블랙헤이젤의 아버지는 어떻게 만났는가? 결혼했다면 마리아의 어머니 존재는 다소 부자연스럽다는 점이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죽음은 어떤 계기인지도 아쉬웠다. 마리아가 어머니의 생명을 빼앗은 원인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시영의 존재가 위험할 수 있다는 강박관념이 있었을 것이다. 가족관계의 기원에서 시작되지 않은 에피소드는 갈등의 원인조차 풀어내지 못한 채 계속 시영의 과거에 존재한 유령만 불렀을 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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