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제일의 여동생님 2 - Seed Novel
김월희 지음, nyanya 그림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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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권에서 이런 구절을 발췌하고 싶다. 게오르크 헤겔이란 독일 철학자가 이른바 변증법이란 것을 발전시켜 19세기 초중반 헤겔학파가 형성되기도 했다. 그 헤겔이 했던 말 중에 “그렇지 않답니다. 오라버니! 헤겔이 주장한 시대정신이란 결국 진보 없이 반복되는 원형의 띠. 우민들은 결국 계몽의 대상이 아닌 사육의 대상에 불과하지요.”를 말이다. 생각해보면 인간이란 계몽이란 것이 참 중요한데, 막상 계몽이란 단어가 오히려 억압이 되는 현실적 여건을 생각하면 그 계몽이 진보성이어야 하는 오히려 보수를 넘어 수구적인 이용가치에 휘말리는 경우도 있다.

 

계몽주의자 선구자로 장 자크 루소는 <사회계약론>을 저술하였고, 그가 살던 시기에 늘 박해만 받았다가, 그의 서거 후 11년 뒤에 프랑스대혁명이 발발하고, 그 프랑스대혁명의 기반이 된 사상도서가 바로 <사회계약론>이다. 죽음의 신인 생 쥐스트와 단두대의 공포정치를 보여준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에서 분명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인간의 진보를 위해 저술했으나, 오히려 진보보단 다른 형태로 현실은 망가져갔다. 물론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꾸준히 현대사회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고스란히 인류의 위대한 재산으로 내려오고, 자유를 사랑하는 민주공화국의 헌법에서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반드시 거치지 않을 수 없는 계단이다. 대한민국 헌법조차도 루소의 사상에서 기반 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진보라는 것은 결국 파괴와 희생, 그리고 투쟁으로 이어져 온 것이다. 겉으로 봐서는 말도 안 되는 미소녀가 엄청난 위력을 보여주는 라이트노벨이나, 그 뒤에 보이는 세계관은 단지 라이트노벨의 세계관을 지나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적 세계관을 그대로 반영한다.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결국 헤게모니, 지배계급이 피계급지배에 대한 지배논리를 강화하기 위한 조건이다. 그런 점에서 <세계 제일의 여동생님 2권>을 읽는다는 것은 그런 논리에 대한 냉소적인 작가의 의도가 보인다.

 

물론 라이트노벨이란 장르에선 당연히 재미를 넘어 성적인 호기심은 분명히 전달할 수 있을 것이나 그 환상으로만 보이는 취미생활 도서가 사실은 매우 잘 만들어진 세계관이란 점에서 이 책을 인정할 부분이 있다는 점이다. 2권에서 배경은 미국이고, 미국 국회의사당 안에서 다수의 의석을 차지한 당에 대해 여자주인공 마리아는 매우 날카로운 공격을 날린다. 그녀에게 무기라는 것은 결국 돈벌이의 수단이고, 그 돈벌이가 무기이기 때문에 막강한 위력을 가진다. 인간의 역사에서 전쟁이란 것은 공간적으로 모든 것을 파괴하나, 그 전장이란 공간을 제외한 다른 세계에서 번영과 발전을 만끽한다.

 

전쟁은 정치적으로 직접적으로 행사하는 하나의 국가행위이다. 물론 정식국가로 인정받지 못한 소수민족 및 괴뢰정부, 테러리스트들은 언제나 폭력이란 수단을 동원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다. 그것은 아무리 평화적으로 혹은 인도적으로 교섭하려고 해도 돌아오는 것은 무력수단이란 점이다. 2권에서도 중국과 티베트 사이에 벌어진 달라이라마에 대한 정치적 탄압과 티베트 민족의 학살극은 20세기를 지나 21세기까지 계속 유지되는 국제분쟁이고, 인종말살이란 제노사이드에서 우리 인간들이 내세운 이념이란 가치는 한갓 허울 좋은 껍질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평화를 위해서는 비폭력적 평화적인 요건들이 필요하나 그 평화를 얻기 위해 폭력이 필요한 것이 아이러니한 인간의 현실이다. 위에서 루소와 프랑스혁명을 언급한 것처럼 당시 18세기 봉건사회의 구시대적 발상을 깨기 위해서는 혁명이란 폭력적 수단이 필요했다. 본래 프랑스혁명 이전 1789년 6월 삼부회에서 각 계급별 대표가 나와 대책회의를 요구했으나, 그것은 묵살되고, 삼부회가 열린 인근에 테니스코트에서 입헌 국가로 되기를 요구하는 선언이 있은 후 결국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나게 되었다.

 

반복되는 시대적 착오에서 끊임없는 희생과 발전에서 인류는 그렇게 흘러온 것이다. 그렇게 된 역사를 과학적으로 고찰해보면, 인간은 결국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의 현실적 억압과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계몽이다. 그러나 계몽이란 이름은 어느새 하나의 신화(억압)로 되어 그 기나긴 무지의 파도는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칸트는 계몽이란 것은 타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자신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했다. 어떻게 본다면 인간의 인식에 대해 정확하게 판단하는 것과 동시에 사물에 대한 합리적 사고에서 진정한 시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사물의 본질과 세상의 본질을 알아간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이성으로서 그 구조를 풀어갈 수 있어도 그 해답을 찾아갈 수 없다. 인간이란 필연성이 존재하는 것처럼 우연성이란 것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단지 단순한 선택적 기점이 수많은 인간에게 큰 여파를 주는 것이다. <세계 제일의 여동생님 2권>에서는 바로 그런 세계에 대해 마리아와 백련으로 통해 보여준다. 이미 1권에서도 시영이가 다니는 학교에서 노암 촘스키의 언어학 관련 강의가 있을 정도이니, 작가 역시 노암 촘스키의 언어학 연구도서만 아니라 그 외의 책을 봤을 것이다. 그것을 알게 해준 것이 마리아가 미국 의회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한 명의 남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보통 라이트노벨에서는 모든 인물이 가상에 가까운 존재이고, 설사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조건과 상황적 부여가 다르다. 그런데 1명만큼은 완전히 잘 포섭한 것 같다. 미국 차기 대통령 후보로 나온 공화당 존 매카시가 나온 것이다. 존 매카시는 1950년 전후로 활동하던 실제 미국 공화당의원으로 그는 각종 뇌물, 비리, 스캔들로 인해 정치적 위기에 봉착했고, 그가 그에 대한 대안으로 미국 내에 소비에트 연방 첩자가 있다고 하는 매카시즘을 만든 것이다. 소비에트 연방과 냉전관계에 있던 미국과 당시 1950년 한국전쟁은 그로 하여금 정치적 힘을 주었으며, 추후 그가 퍼뜨린 폭로는 루머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미국정치사에서 매우 악명을 날리게 된 인물이었다.

 

바로 그가 <세계 제일의 여동생님 2권>에 나타나고, 마리아는 그에게 정부가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는 이야기하면서 협박으로 대한다. <세계 제일의 여동생님>을 보면 이 라이트노벨이 구성하는 세계관은 확실히 어긋나고 비틀어진 부조리만 보여준다. 문제는 그 부조리에 대하여 그대로 인정하는 것보다 그 부조리에 대해 부조리로 대응한다는 점이다. 헤겔의 발언으로 시작해서인가? 헤겔의 변증법에서 “찬, 반, 합”이라는 것이 있다. 즉 부정의 부정은 합이라는 긍정이라는 점이다. 부조리로 통해 부조리를 이용하는 마리아의 입장에선 긍정보다는 사실 또 다른 부정으로 이어진다.

 

단지 마리아는 그 부정의 부정으로 하여금 자신의 긍정적인 포인트를 올린다는 점이다. 주인공 시영의 눈에는 그런 마리아가 살아가는 세계란 부조리를 넘어 납득하기 어려운 세계인 것이다. 문제는 그 납득하기 어려운 세계라는 것은 매우 비정하고도 합리적이고, 또한 이해득실이 명확한 점이다. 2권에 새로 나온 등장인물인 선우백련, 그녀는 마치 은빛으로 이루어진 머리와 의상으로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온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녀의 광기는 마리아를 능가하여 psychopath라는 정신적 착란을 보여준다. 광인이란 존재는 매우 무섭고도 순수하고도 예술적이며 위대한 인물이다.

 

광인이기에 평범한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으며, 보통 사람이 발견하지 못하는 법칙을 발견하여 당대 사회의 대표되는 인물로 볼 수 있다. 사실 루소라는 사상가 역시 끊임없이 주변 사람에 대해 의심하고 프랑스 파리 사람들이 자신에게 나쁜 짓을 하는 것보다 할 것 같다는 강박관념으로 광인처럼 지냈다. 광인이란 존재는 보통 사람이 될 수 없고, 보통 사람으로 보여줄 수 없는 일들을 해낸다. 문제는 광인 중에서 psychopath적인 요소는 범죄라는 극단적 위법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긴다는 점이다.

 

선우백련이 처음 나타난 것은 어느 방송국 촬영, 그녀는 자신에게 오빠가 있다면서 그 오빠에 대해 사랑을 전하고 싶다고 한다. 마치 그 TV 화면 너머 시영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른바 아우라라고 하는 눈앞에 상대방이 없어도 마치 호응을 해줄 것이란 믿음처럼 말이다. 백련의 등장은 이른바 psychopath적인 광기부터 시작한다. 그녀 주변에 있던 방송국 직원들이 모두 이상하게 보이더니 살점이 떨어져 온 몸이 노출되어가더니 모두 사망하는 생화학 테러를 당한다. 미국의 유명한 학자로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를 보면 인류의 역사에서 무기의 역할은 문명을 가진 국가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지 보여준다.

 

그 배경은 무기가 되는 쇠로 통해 총과 칼을 만드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균을 이용하여 생물화학적인 무기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사망자들은 쇠로 만든 총과 칼보단 오히려 생화학 무기에 의해 더 많이 사망했다고 한다. 인간의 전쟁과 분쟁에서 생물화학적 테러는 예전에 미국 탄저균 공포에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선우백련은 그런 생물화학적인 무기를 소유하고, 그것으로 통해 의학과 약학을 익혀 세계 최고의 거물이 되는 것이다. 인간을 직접적으로 생명을 빼앗을 수 있는 것은 분명 무기다. 하지만 그 생명을 구할 수 있는 것은 무기가 아니라 의약기술이다.

 

인간의 생명을 빼앗는 것보다 인간이 생명을 다루는 것은 상당히 윤리적으로 어려운 문제다. 그런 생명을 토대로 어떻게 우리는 인간의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대로 가진 사람은 얼마 없을 것이다. 세계에서 의학이 뛰어난 국가로 미국, 일본, 독일과 같은 나라다. 그 중에서 일본과 독일은 2차 세계대전에서 실제 살아있는 사람으로 실험을 하던 비윤리적 행위를 한 전범 국가이다. 그리고 미국은 일본의 731부대의 연구 자료를 이용하여 의학기술을 발달시켰다. 인간이 저지른 잔혹하고 추한 행위가 후세에 긍정적 역할을 했다는 아이러니다.

 

이런 관점은 폭력이 하나의 미라고 여기는 파시스트들에겐 매우 달콤한 사상일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폭력으로 만들어진 성과는 결국 후대에 받아도, 그 다음 후대에 받기 위해서는 현실에서 누군가는 폭력으로 비틀어지는 고통을 받아야 한다. 백련은 자신이 살아있는 인간을 수술용 칼로 그대로 해부하는 순간에 재미를 느꼈다고 한다. 마리아의 경우, 오로지 이익을 위해 마키아벨리주의적인 인간이 되나, 그런다고 재미로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다. 감정을 제외한 그 모든 것으로 판단하는 마리아와 달린 백련은 감정과 이성도 없이 오로지 동물적인 본능에 의한 파괴였다.

 

그런 본능에서 인간에게 감정이란 무척 소중한 것이다. 윤리라는 것은 이성보단 차라리 감정에서 시작되는 계기가 많다. 인간이 무척이나 이성적일 수 있는 가능성은 그가 무척 감정적으로 반응한 계기가 있어 그것이 하나의 합리적인 수학계산처럼 행동하게 하거나 혹은 감정 자체가 없으면 가능한 것이다. 백련에게 감정이 없는 것이란 결국 인간이란 아무렇게나 죽여도 무방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인간의 죽음으로 수많은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이 인간이 가진 아이러니다. 더 심한 아이러니는 그렇게 삶을 연명한 인간들은 자신들의 삶에 큰 영향을 준 그들을 편을 무조건적으로 든다는 점이고, 한편으로 자신들은 매우 도덕적이고 바른 인간이 되기를 바란 것이다.

 

작품에서 보면 마리아와 백련이 살아가는 세계란 부조리 자체가 합리다. 모든 게 힘으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백련에 의해 죽을 위기에 처한 시영은 마리아의 도움으로 살아남으나, 그 행위를 한 백련은 죽음을 당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이때 시영의 억지스러운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기계를 조정하는 신처럼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을 선택한다. 바로 시영은 이 문장의 위에서 보인 인간이 가진 이중적인 모습에서 탈피하기 위한 모습이다. 로스차일드란 새로운 가문에서 나온 캐서린의 제안은 바로 인간이 가진 오랜 부조리에 대한 시영의 선택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시영은 이때까지 부조리한 세계에 살아가는 여동생을 보고, 그것이 악이란 요소로 각인하나 그 악이란 존재인 여동생은 적어도 자신에게 선이란 존재가 되어야 했다. 인간의 절대적 가치인 진을 뒤로한 채 선이란 가치가 하나의 미적 가치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시영은 선택의 기로에 있던 것이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당주인 캐서린이 제안한 게임은 바로 러시아룰렛이란 권총자살이었다. 러시아룰렛은 총알 1발은 장전하여 6번의 방아쇠에서 운이 없는 사람의 머리에 총알이 박히는 무서운 도박이다. 그러나 이번의 도박에선 총알이 없는 빈 권총이었다. 그 총알은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총알이 아니라 시영에게 바라는 세계라는 공간에 존재하는 인간에 대한 총알이었다.

 

마리아와 백련은 살아남기 위해 많은 인간을 희생했으나, 그 희생만큼 그 이상의 혜택이 인간에게 갔다는 사실성이 있었다. 만약 그런 모든 것을 부정하고 혼자 착한 인간이 되는 것보다 그 어두운 세계에 발을 들이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시영의 선택이다. 사람들은 흔히 이런 말을 한다. “정치를 하는 인간은 더럽다.”고 말이다. 하지만 많은 인간들은 자신에게 그런 더러움을 안고 갈 자신도 없이 현실을 외면하다. 그래서 헤겔은 인간의 무지몽매가 계속 이어진다고 장담했던가? 부조리에 대하여 결국 부조리로 대응하는 시영은 자신이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의 여동생들이 그 더러움을 안고 가기를 선택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마리아는 그 누구에게는 더럽고 악의 화신일지라도 오직 시영에게만 순정적인 여동생이면서 한편으로 사랑의 광기에 빠진 여자였다. 오빠를 자물쇠에 결박하여 자신의 감정을 애무하던 마리아에게 오직 감정적으로 비논리적으로 대할 수 있는 시영이었다. 자신의 윤리적 감정이 배제된 합리성을 세계에 보여줄 때마다 거기에 해당되는 보상심리가 시영에게 갔다는 점이다. 마리아는 자신의 친모를 살해하여 당주가 되었던 이유 역시 시영을 구하기 위한 이유다. 마리아의 아버지가 마리아에게 시영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마리아의 어머니는 시영의 존재를 반가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선우백련의 어머니가 결국 시영의 어머니고, 세계 3대 균형을 가진 권력집단이었다. 그런 2가문의 혈통을 이은 시영은 결코 권력을 유지하고 이들에게 가장 제거하고 싶은 존재 중에 하나일 것이다. 시영이 더러운 세계에 입성하는 것을 아마도 마리아의 사촌언니인 이자벨은 고대했는지도 모른다. 오직 시영만이 마리아가 가진 기계적인 합리성을 배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로스차일드 가문이 시영과 얽힌다는 것은 삼각구조의 권력에 변화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작품을 보면서 또한 생각한 것 중에 하나가 작가가 영화를 많이 본다는 것이다. 백련의 재판이 열릴 때 시영이 갑작스레 돌입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시영이가 한 마디를 한다. “이게 재판입니까. 개판이지.”, 요 대사는 영화감독 정지영의 <부러진 화살>에서 배우 안성기 씨가 맡은 김교수가 재판에서 하던 말이었다. 물론 <부러진 화살>이란 영화는 서사의 엔딩이 완벽한 마무리가 아니라 영화관에 들어온 관객에서 그 영화의 뒤를 이어가길 바라는 열린 서사로 마무리된다. <부러진 화살>에서 보인 재판과정도 그러하나 사실 권력이란 이름 아래 벌여진 현실의 부조리를 고발한다.

 

실제 있었던 일을 각색하여 만들었다고 하나, 일단 영화다 보니 다소의 허구가 들어간 것은 사실이나, 영화의 본질적 가치로 본다면 부조리에 대한 정당한 도전은 결국 부조리에게 패배하고 만다. 따라서 나는 <세계 제일의 여동생님>이란 작품이 부조리에 대해 부조리적인 것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는 설정에 대해 논하는 것이다. 문제는 폭력을 부른 원인은 분명 계기와 원인이 있으나 그 폭력을 제공한 당사자는 그 폭력이 하나의 정당성이란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시영의 선택은 폭력을 폭력으로 대할 수밖에 없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2권의 중요한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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