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공간 - 우리시대 지성 11인의 삶과 시공간 이야기
황인숙 외 지음, 고종석 엮음 / 개마고원 / 2006년 11월
평점 :
절판


인간이란 혼자 있을 때에는 다른 사람이랑 같이 있고 싶고, 다른 사람들이랑 있으면 혼자 있고 싶을 때가 있다. 그렇기에 인간은 타인과의 조화와 더불어 자신과의 조우가 필요한 것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 다른 사람들과 있는 시간이나 혹은 자기만의 시간을 더 중요하게 여길 것이다. 사람이란 늘 마음이나 기분, 심리적 변화가 같을 수가 없다. 때에 따라서 혼자 있고 싶기도 혹은 같이 있고 싶은 것처럼 말이다. 그래도 혼자만의 공간은 너무 중요한 것 같다. 자신만의 공간, 즉 <나만의 공간>이란 것은 현재 나를 구성해주는 정체성이다.

 

정체성의 영역에서 나만의 공간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내 인생에 큰 영향을 줄 수 있으며, 그것이 남들을 모를 나만의 추억과 기억이 있다는 점이다. 모두 같은 시간과 공간만 있고, 똑같은 환경적 조건을 주면 그 사람만의 개성과 특유한 인상이란 존재하지 않게 된다. 내가 나로서 있어야 비로소 나라는 존재가 성립된다. <나만의 공간>은 그런 자신만의 세계가 무엇인지 어떤 것인지 적은 도서다. 그냥 마음 편하게 읽으면 좋은 책인 듯하다. 사회적으로 제법 유명한 시인, 법조인, 의사, 작가, 철학자 등이 나와 자기만의 공간을 이야기한다.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들은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을 저술한 홍세화 선생, 모두 까기의 달인인 진중권 교수, 법무부장관을 역임한 강금실 변호사 등이 보였다. 나만의 공간에서 다른 이들도 제법 인상적이나 그래도 아는 이름이 있다는 점과 그들의 진솔한 이야기나 혹은 삶에 대한 애착이 인상 깊었다. 홍세화 선생은 15년 동안 파리에서 택시운전을 했는데, 그 운전을 하면서 생계수단이 아니라 자신의 위안을 삼은 공간이란 게 인상적이었다.

 

이름 없는 망자들에서 지난 우리 사회의 아픔을 토로하는 그의 심정은 뭔가 시대의 아픔 내지 그 이상의 가치를 갖고 있었다. 남산이란 것이 어떤지 모르나, 적어도 남산의 어느 한 고문실에서 쓰러져간 많은 사람들의 비명은 아직 우리가 갚아야할 민주주의의, 빚이다. 그런 암울한 현대사에서 좁은 택시운전석이 홍세화 선생에게 편한 공간이었을까? 딱히 편하다는 것은 아닐 터이다. 하지만 인간에 대한 성찰에서 자신만 아픈 과거를 잊고 마치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위해 그 아픔까지 담고 가야하는 것이 진정한 자신만의 공간이라 여긴 것 같았다.

 

이런 모습을 봤을까? 강금실 변호사의 이야기도 독특했다. 서울 명동성당 입구에 세워진 가상감옥을 체험한 이야기는 특별한 것 같았다. 남편이 억울하게 국가보안법으로 신체적 구속을 빼앗긴 적이 있고, 아버지 역시 억울하게 누명의 그 인생마저 파탄을 맞이했다. 그래서 강금실 변호사는 민변에서 활동한 이유가 있었다. 법조인으로 법 위에 사람이 없어야 하나 사실 우리 법 위와 아래에 사람이 있다. 때로는 사람이 법을 초월하여 다른 사람들을 법으로 다스리려고 한다.

 

예전에 <호모 사케르>의 노모스처럼 법의 정의에서 인간이 법 위에 올라가고 그 사람이 법을 초월하여 예외적 존재이기 때문에 법이란 것이 성립되는 점에서 그 절대적인 힘을 가진 자에 의해 다른 사람의 운명이 결정된다. 살아있는 존재이면서도 사회적으로 소외되거나 인정받지 못한 우리 사회에 있는 낯선 존재들, 법조인으로 그런 사람들이 정식적인 사회적 합의가 아닌 권력의 이름아래 희생되는 것이란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 체험이 강금실 변호사로 하여금 눈물로서 그 아픔을 상기한다.

 

그래서인지 강금실 변호사는 마당이란 것을 중시했다. 마당에 나온 사람은 그냥 자유로이 이래저래 움직일 수 있다. 갇혀버린 감옥은 마당이 없다. 그저 좁은 공간에 갇혀있으니 사람은 새장에 갇힌 새처럼 답답할 뿐이다. 공간 이란 것은 사람에게 역시 어떤 특별한 그 무언가를 주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성찰과 추억, 아픔과 자유 등등을 말이다. 특히 나만의 공간은 나만의 자유라는 것과 같을 것이다. 사람의 자유에서 자유란 혼자만의 공간에서 무엇을 해도 상관없는 것이다. 단지 그 자유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 영원히 즐길 수 있다.

 

그래서일까? 진중권 교수의 이야기는 나만의 공간이 추억과 변덕스런 지난날이다. 개인적으로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어른의 몸을 가진 아이로선 진중권 교수의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공책에 그림을 그린 후에 페이지를 계속 넘기면 마치 움직이는 느낌이 든다. 이런 기법을 애니메이션에서는 페이퍼 애니메이션이라고 한다. 비록 전투기 2기가 서로 싸우고 격추하는 것이나, 참으로 진중권 교수는 개구쟁이인 모양이다. 지금도 경비행기 모는 것을 좋아하는 모양인데, 어린 시절부터 비행기 그림이나 혹은 비행기 모형을 만든 건 재미난 사실이다.

 

인간의 상상력은 혼자만의 공간에서 망상에서 비롯한다. 특히 강의에서 meta-physics에서 형이상학적 세계, 즉 눈에는 보이지 않은 이상과 현실의 분리된 것을 담론하는 것에서 pata-physics 형이상이상학이란 새로운 세계를 말한다. 현실이 아닌 가상이 오히려 현실화되는 것이다. 아마 진중권 교수의 시작은 어린 시절 그 다락방인 모양이다. 모두 까기 달인인 진중권 교수도 별나지만, 그의 2명의 누나 역시 별난 모양이다. 예술도 하고, 노동운동도 하던 누나로서 그들의 기질은 새삼스런 것이 아닌 것 같다.

 

부모와 누나의 눈치전쟁, 거기서 남은 남동생은 후퇴하여 자기만의 공간을 찾는 것이 정답이다. 거기서 사라지는 것은 오히려 나의 존재를 찾기 위한 자아탐험이다. 폴 비릴리오의 <소멸의 미학>이란 도서를 자주 인용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감 찾기와 망상에서 시작되는 상상력과 아이디어를 추구하기 위한 하나의 단계이다. 혼자만 있으니 정말 다락방은 망상이 현실화되는 기분인 듯하다. 사용하지 못할 물건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어 오브제들이 그 어린 시절의 개구쟁이 손에서 하나의 콜라주가 된다.

 

심심하면 여기저기 가위로 오려 몽타주를 실현한다. 아니라면 성적인 호기심이 있다면 좋아하는 연예인의 얼굴사진과 야한 옷을 입은 여자 사진을 붙이는 효과도 볼 것이다. 그런 유치한 기억과 추억이라도 그것이 소중한 모양이다. 책의 시점에서 얼마 전 찾아가니 없어진 그 어린 시절의 공간이 없는 것은 슬픈 것이다. 어느 애니메이션을 보면 주인공 소녀의 대사가 기억난다. 자신이 우주로 갈 나이가 되면 자기가 살던 마을의 모습은 없으나, 그 마을에 대한 기억과 추억은 언제까지 살아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사람마다 전부 다 느끼는 것은 아니나, 어린 시절 그 공간이 오랜 시간 뒤에 존재할 리가 없다. 나도 학부시절에 다니던 그 대학교의 모습이 여전하지 않음을 최근에 알게 되면 조금 슬프다. 내가 보던 공간과 시간, 그리고 거기서 이루어지는 모든 존재들의 풍경은 이젠 내 마음의 추억이 되었다. 게다가 나무들이 이루는 숲의 세계가 없어지는 것은 더욱 마음이 아프다. 창가 너머로 보이는 숲들과 그 중에서 특이하게 큰 나무와 잎이 유독 노란 은행나무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서글프기 때문이다.

 

또한 그때의 추억이나 기억을 가진 주변 사람들마저 흩어지고, 인간이란 영원성이 없기에 때로는 그 학교에서 또는 이 세상에서 존재성이 사라질 수 있다. 그래도 그때의 나나 그 모습들이 여전히 머리에 맴도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이 <나만의 공간>이니 말이다. 일단 이 책을 다 읽은 후에 나도 나만의 공간이란 것이 있는가에서 떠오른 것은 내방과 오락실이다. 특히 오락실에서 게임만 미친 듯이 한 나에게 딱히 나만의 공간으로 삼기는 그렇다. 만화방도 그렇고 말이다.

 

지금의 나만의 공간은 내방이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내 방에 있는 컴퓨터로 다양한 글도 보고 적으며, 음악도 게임도 영화도 애니메이션도 즐긴다. 그리고 컴퓨터 옆에 있는 책장 안에 많은 책들이 있고, 그 책에서는 철학과 사회과학 등과 같은 어려운 책도 있지만 만화책이나 라이트노벨도 있다. 그저 내 방에서 조용히 내 시간을 즐기는 것도 나만의 공간이다. 단지 그 나만의 공간이 강력한 게 흠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내가 나로 있기 위해서는 필요한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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