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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사케르 -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 ㅣ What's Up 3
조르조 아감벤 지음, 박진우 옮김 / 새물결 / 2008년 2월
평점 :
책을 읽으면서 조금 생각한 도서가 <감시와 처벌>이었다. 그것은 우리 인간에게는 생물학적인 신체가 있다면 생물학적 이상으로 존재하는 신체가 있는 것이다. 단지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의 다루는 신체는 신성한 존재, 즉 임금에 대한 것이다. 루이15세를 암살하려다 실패한 다미엥이 처참한 고문을 당하면서 죽어가는 사형을 집행할 적에 앙시앵레짐에서 인간의 존재는 전제적인 군주 아래 모든 것이 결정되었다.
왕권신수설이 강하여 짐이 곧 태양이라고 말한 루이왕정에서 인간의 신체를 나누는 기준에서 단순히 생물학적 요소가 아니라 영원성을 강조하는 신성성이 있었다. 그러나 그 신성성도 영원하지 않았다. 호모 사케르에서 sacer라는 단어는 신성하다는 뜻도 있으나 그것은 이제 더 신성할 수 없는 존재이다. 왜냐하면 호모 사케르는 죽일 수는 있되, 희생양으로 삼을 수 없는 존재다. 루이왕정의 앙시앵레짐에서 1789년 7월 프랑스대혁명 이후 1793년 1월에 루이16세는 사형을 집행 받는다.
그의 사형에서 상징적인 요소가 있다. 프랑스 인권은 국민의 대부분이 되는 인민에 대한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는 헌법의 기초이다. 세계 대부분의 헌법이 프랑스 인권선언문을 바탕으로 헌법으로 제정되어 있다. 인권선언문의 기초가 된 것은 로크와 홉스와 같은 근대철학의 기본이 되던 자와 특히 시민사회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루소의 <사회계약론>이 가장 큰 공헌을 한다. 이런 프랑스 인권선언문의 중요한 점은 루이16세에게도 그런 조항이 해당될 수 있는가이다.
루이16세는 외국으로 망명하던 도중 붙잡혀 파리로 붙잡히고, 재판도 없이 그냥 단두대 아래 처형당한다. 당시 국민공회라는 프랑스 혁명위원들의 결정에 의해서다. 따라서 인간의 처분이 결국 죽일 수는 있지만, 희생양으로 될 수 없음은 절대적으로 법을 넘은 인간 내지 권력이 존재함에서 가능함이다. 루이16세의 죽음은 인권선언문에서 제7조에 해당되는 “법에 의해 규정된 경우가 아니거나 법에 의해 규정된 형식에 따르지 않고서 누구도 기소되거나 체포되거나 구금되어서는 안 된다. 누구든 자의적인 명령을 간청하거나 선동하거나 집행하거나 집행되도록 원인을 제공하는 자는 처벌받아야 한다. 하지만 법에 의거해 소환되거나 체포된 시민은 누구든지 지체 없이 그 조치에 따라야 하며, 이에 저항하는 행위는 범죄가 된다.”와 무관계되는 점이다.
루이16세는 프랑스공화국의 범죄자가 아니라 프랑스공화국을 부정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에게 프랑스인이면서 프랑스공화국민이 아니라는 점에서 루이16세는 중간적인 존재, 즉 어떻게 되어도 문제없는 인간이 되었다. 노모스에 대한 부분에서 너무 난해한 개념이라 딱히 말하기 어려우나, 적어도 인간은 법아래서 공평하게 지배관계(인간 위에 인간 없고 인간 아래 인간 없다) 명제를 지켜야 하나, 노모스의 관계에서 인간은 오히려 그 법이라는 것에 대한 규칙을 초월하는 것에서 법을 실행할 수 있다는 점이 모순적이나 현실적이었다.
그런 이유를 보면, 우리는 법을 집행함에 있어서 법적인 절차를 법 스스로가 움직이지 않고, 결국 법을 집행하는 준수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점이다. 사람이 법을 이용하여 다른 인간을 통제하는 것에서 인간이 법의 위와 아래에 있게 되는 것은 결국 공평할 것이 공평하지 못하게 되는 것과 같음이다. 권력의 관계에서 모순적인 관계가 형성된다. 법을 집행하는 자에 대해서 논하면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오히려 인민들의 심부름꾼이 되어야 하나, 그 사회적 공간에 대한 질서를 위해 법을 집행할 경우 결국 모든 사람들이 법의 아래에서 위로 승격되어 버린다.
그렇다면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의라는 이름이 법으로 행하는 점에서 어떤 문제가 있는가? 그런다고 하여 호모 사케르의 영역은 민주주의 사회만을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생명의 여부와 심지어 끔찍한 독일 나치즘까지 다룬다. 호모 사케르는 말 그대로 살아있어도 살아있음을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다. 그것은 있음과 있었음의 차이라고 할 것이다. 있음은 그저 그 자리에 있다고 하나, 있었음을 그것이 있음에 대해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길거리에 걷다보면 옆에 사람이 있지만, 그들에 대해 우리는 있음이라 물리적으로 각인해도 그들에 대한 존재성에 대한 의미부여를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것이 스쳐가는 시간과 공간의 흐름 속에서 사라져버릴 존재라면 몰라도, 대상자가 인간이어도 인간이 아니라는 인식이 등장하면 어떨까? 이 책에선 매우 끔찍한 이야기로서 독일 나치가 실행한 인간실험을 다루고 있다. 자국의 항공기조종사의 생명유지에 대한 연구를 위해 유대인 포로를 실험실에 넣고 상공 12,000ft의 조건을 부여한다. 호흡곤란을 일으키다가 결국 청색증올 죽고 만다. 이런 잔혹한 방법은 단순히 유대인을 가혹하게 다루는 독일 나치즘만이 아니다.
미국 12명의 사형수도 생물학적 실험에 의해 죽는다. 그들은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 만약 실험에서 살아남는 경우 그들은 죄를 사면 받는다. 어차피 죽을 목숨 이렇게 하면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하나, 그들은 모두 실험 도중에 죽고 만다. 사형수의 법적인 절차에 의한 집행은 당연성을 가져도 그런 목숨에 대해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는 권리를 준다는 것에서 이것이 자유의지인가? 호모 사케르에겐 그런 권리란 없다. 단지 권리라는 것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권리다.
자살이란 단어는 사회적 타살이란 의미다. 사회적 타살을 맞이하는 많은 호모 사케르에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 파멸할 것인가이다. 그냥 혼자 죽을 것인가? 혹은 옆에 주변사람과 같이 죽을 것인가? 아무 관계없는 사람을 같이 죽을 것인가? 다시 생각해보자. 루이16세의 죄는 분명 크다. 미국독립전쟁으로 인해 영국에 대항한 프랑스의 군비지출에 경제적 제정은 붕괴하고, 토크빌의 <구체제와 프랑스혁명>을 보면 대부분의 귀족들은 세금을 내지 않고, 그 세금의 비용부담을 부르주아와 농민에게 전가시킨다.
삼부회의 소집에서 프랑스 루이왕조는 국운이 다 한 셈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 프랑스혁명 시기에 가장 활발한 혁명가이면서 제일 무서운 공포정치를 펼친 로베스피에르의 말을 상기시키는데, 인민에 대해 2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people로서 생물적 기능, People이란 사회적 기능을 말이다. 하지만 로베스피에르는 전자의 초점에 대해 말하는 것 같다. 그가 프랑스 국민에 대해 가엾게 여기는 것은 프랑스 혁명의 시발점이 경제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토크빌의 지적대로 만약 무의미한 제정낭비가 없었더라면 혁명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거기다가 지방자치단체적인 코뮌의 체계마저 허물고 중앙집권화로 되자 예산운용이 더욱 어려워졌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역전의 관계일 것이다. 프랑스혁명 이전의 구체제에서 일반 농민의 경우 살아있는 생물체이지 국가적인 존재로 될 수 없다. 그들은 영주나 봉건귀족의 소유물이었다. 그들은 농노와 같이 착취당하다가 혁명 이후 왕족과 귀족이 농민들과의 위치가 역전되었다. 로베스피에르가 공포정치를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왕족과 귀족이 사라지는 대신 그 사회적 통치기능이 분산된 시점에서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존재의 한계성이 바로 비정치적 존재의 정치적 존재로 전환이다.
법의 취지는 공공선의 추구인데, 그 법의 공공선에 대한 철학적 인식에서 시민의식이 부족한 이유다. 게다가 혁명이 가난이 문제라도 혁명 이후라도 가난은 해결되지 않았다. 그저 사회구조적인 해결보다는 한 순간의 체제전복만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만약 혁명이 없으면 그 사회구조 병폐를 해결할 기회조차 없었다. 게다가 그 체제가 이익이나 이권에 관여되는 다수의 무리가 나타날 경우, 법의 정신은 이제 이권에 개입되는 자들에 의해 움직인다. 홉스는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을 말하면서 그 만인 대 만인에서 한쪽이 강력한 만인일 경우 나머지 만인들은 소외될 수밖에 없다.
이익을 위해 결국 희생된 자에서 현대 민주주의에서 한계점은 자본주의적 경제구조 결합이다. 자본주의는 경제적 구조이지, 정치적 구조는 아니나, 그것이 정치적 구조에 대한 압력으로 결국 호모 사케르는 주권의식에 대한 부분에서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경제적 이익에 초점이 맞추어져 나온다. 예전에 에티엔 발리바르의 <정치체에 대한 권리>에서 프랑스가 시민주의 국가보단 오히려 민주주의 체계를 이용한 전체주의적 요소를 고발한다. 외국인 노동자가 들어오면 인건비가 하락하고, 노동운동단체는 이들 외국인들에 대해 반강제적 조치를 국가에 요구한다.
일반적으로 노동자운동을 두고 좌파적인 행위라고 한다면 이것은 오히려 우파적인 행위에 가깝다. 사실 전체주의가 가장 되기 좋은 사회는 민주주의국가이다. 루소가 말한 일반의지에 대한 의지표출에서 인간은 공통요소를 찾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것이 공공선이 아니라 개인적 이익을 위한 카르텔이 될 경우 무서운 일들이 벌여지게 된다. 참고로 <정치체에 대한 권리>에서 에티엔 발리바르는 출산을 앞둔 외국인 임산부가 강제로 항공기에 태운 채로 추방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인간을 분리하는 공간이 단순히 나치가 만든 실험소나 수용소가 아니라 공황 대기실이나 혹은 그 밖의 많은 공간도 해당된다.
생명에 대한 담론에서 그것이 생명이 있지만, 사회적 존재로 용인될 수 없는 사례는 많다. 우리 주변에도 흔하게 본다. 예전에 영화 <두 개의 문>에서 용산참사에 대한 부분을 다루는데, 그 주민들은 보상 문제를 두고 합리적인 절차를 요구했으나, 이내 무시되고 용역깡패가 들어오자 옥상으로 연결되던 출입문을 봉쇄하고, 이후 경찰특공대가 진입하면서 그들이 농성하는 곳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결국 아까운 인명이 죽고 만다. 이들은 생명이 있으나 사회적인 존재로서 인정받지 못했다. 현실에서 호모 사케르는 단순히 수용소의 포로나 참수당하는 왕도 아니라 슬프게도 우리 사회의 만연한 이기심에서 발생된다. 아니라면 그 이기심으로 만들어진 욕망의 대상자가 지시하는 명령에도 존재하는 법이다. 더욱 슬픈 이야기는 호모 사케르의 죽음은 사회적 이슈가 되어 사회문제로 대두되기보다는 오히려 불편한 존재로 여기거나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