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 것인가 - 힐링에서 스탠딩으로!
유시민 지음 / 생각의길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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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말 잘하는 논객으로 3사람을 생각하면 우선 모두 까기의 달인진중권 교수, 한국의 마초주의적 달변가 딴지총수 김어준, 그리고 문재인 의원과 더불어 친노의 쌍두마차인 유시민일 것이다. 다들 말도 잘하고 글도 어느 정도 쓰는 사람이다. 그러나 말의 선동적인 힘에서는 김어준, 필력과 수사학과 논리적인 말투에서는 진중권 교수이나 막상 책을 보면서 가장 읽기가 좋은 사람은 유시민이다. 유시민이란 사람은 정치인이란 인물로서 유명하나 막상 그의 책을 보면 글을 적는 작가로서 혹은 비평가로서의 역할이 더 두각을 나타난다.

 

그의 글을 읽는 순간 분명 철학적이면서도 상당히 가치 있는 글인데 반해 읽기가 수월하다. 대신 진중권 교수의 서적은 생각을 깊이 하면서 봐야 한다. 그나마 다행인 게 나도 독설적이고, ‘모두 까기의 달인의 그 모습을 좋아한다. 예전에 본 서적 중에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테제들>에서 아도르노 편을 읽으면서 많은 부분을 진중권 교수에게 느꼈다. 진정한 자유란 이원화의 흑백논리에서 네 편과 내 편을 벗어나야만 진정한 자유가 있다고 했다. 우리나라에서 이분법적 사고로 살아가지 않으면 이방인 내지 외톨이로 만들어버리는 군중심리의 무서움에서 진정한 자유란 무엇인가?

 

자유라는 것은 분명히 달콤하고도 아름다우나, 생각보다 잔혹하고 어려운 길이다. 인간의 역사를 알면 지금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유시민의 인생은 언제나 만인 대 만인의 투쟁보단 그 만인 대 만인의 투쟁에 대한 투쟁이라고 봤다. 그 점에서 김어준의 경우는 만인 대 만인 사이에 만인이라면 진중권 교수와 유시민의 경우 그 만인 대 만인의 투쟁에 대한 투쟁일 것이다. 생각해보자. ‘모두 까기의 달인과 언제나 제3선택지를 고른 자의 운명에서 말이다. 정치라는 세계는 항상 더럽고 치사하고 위험천만한 롤러코스터다.

 

그렇지만 정치와 우리와 무관하지 않으나, 사람들은 그 세계를 외면한다. 자신만 더럽히는 것이 싫은 것인지, 아니면 골치가 아프니깐 그런지 알 수 없다. 단지 중요한 것은 언제나 우리들만은 옳아야 하는 것과 누군가는 더러워야 그 정의관을 실현할 수 있다는 천박한 정의관이 아닐까 싶다. 더러운 세계에서 맞서 싸우려면 더러움에 발을 들일 수 없다. 언제까지 혼자 깔끔한 척할 수 없다. 문제는 제일 더럽고 질이 나쁠수록 가장 아름답게 보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인간의 오만과 왜곡은 그 더러움과 추악함이 커질수록 자신을 미화시키려고 한다.

 

한국은 영원히 신화의 제국이 될 것이다. 진실 뒤에 가려진 불편함을 영원힌 은폐하고 대체하려는 것들이 신성하니 말이다. 폭력에 대한 최종적인 해결은 평화적 비폭력이라고 간디가 가르쳤으나 그것은 결국 틀린 답이다. 영국에서 인도는 해방되어도 가난과 내분에서 해방되지 않은 채 간디 역시 종교적 갈등으로 인한 내분으로 암살되었다. 원래 경제학도였으나 이상하게 문학과 철학 그리고 역사까지 글을 적는 유시민의 입장에서 보면, 항상 역사라는 것은 뭔가 실패와 좌절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본다.

 

개인적으로 프랑스혁명과 러시아혁명에 관심을 기울이기에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도 당통이 프랑스혁명을 주도하였는데, 결국 같은 동지였던 로베스피에르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 로베스피에르 역시 같은 혁명가 손에 죽는다. 트로츠키도 레닌과 같이 러시아혁명을 성공하고도 스탈린에게 정치적 패배와 함께 남미 대륙에서 암살당한다. 우리가 보는 세계역사는 성공보단 그 성공 뒤에 보이는 패배와 좌절의 쓴맛을 보고, 더 큰 고통으로 이어진다. 그런 세계의 역사와 우리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라고 말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위에 3남자는 2009년 서거한 노무현 대통령과 뭔가 관계가 있는 사이다. <이런 바보 또 없습니다. ! 노무현>이란 책에서 3명의 남자 모두 그의 죽음을 추모했다. 진중권 교수는 너무 이성적으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역사의 굴레에서 정치의 숙청과 피 냄새는 영원히 이어지는 비극에서 노무현의 죽음 역시 그런 비장미를 제공했다. 얼마 전에 읽은 <레퀴엠>에선 전쟁과 전쟁에 관련하여 힘없이 그저 사라져간 군인, 민간인들의 죽음을 추모했다. 그때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의 이라크파병에 대한 진중권 교수의 비판, 레퀴엠이란 죽은 이에 대한 추모에서 이제는 그 비판을 가한 자가 죽어 다른 식으로 진혼곡을 울린다.

 

김어준의 경우 노무현을 남자가 남자로서 좋아했다고 한다. 진짜 사나이로서 말이다. 그러면 유시민은 어떠한가? 대통령 최초 탄핵소추에 의해 임시적으로 업무를 중지당할 때의 이야기다. 유시민 의원은 국회에서 고뇌에 찬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면서 저지하려고 했다. 몸싸움이 격했는지 그의 바지가 내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20082월 봉하사저에 내려갈 때도 같이 내려가고, 20095월의 그 절망으로 가득한 날에는 죽은 자의 영정 아래 주저앉았다. 그런 그가 정치인을 마무리하고 자유가 없는 자유인으로 내려온다는 것은 참 인생의 전환기라고 볼 수 있다.

 

책 본문에서 이 글귀가 인상적이다. “세상을 바꾸었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물을 가르고 온 것 같네. 자네는 정치 말고 더 좋은 것을 하게!”라고 노무현 대통령이 유시민에게 한 덕담은 왠지 모르게 내 가슴을 찌르는 느낌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유시민에게 노무현이란 존재는 그 삶과 죽음을 모두 흔들어 놓았을 것이다. 도대체 이때까지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아니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내가 살아온 길과 살아야 길은 옳고 그른 것인지, 세상이란 무엇이고 인간이란 무엇인지까지 말이다.

 

엄연히 말하면 <어떻게 살 것인가>는 유시민 자신의 인생을 돌아본다. 마치 장 자크 루소의 <참회록>과 같은 느낌일 것이다. 잘한 것과 못한 것에서 후회가 넘치는 지난 일들, 그리고 지금의 자신, 삶과 죽음에 대한 경계에서 오히려 죽음을 잊지 않고 살아가기 삶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과 같이 실존주의적 자세는 약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죽음이란 인간이 피할 수도 없는 절대적인 종착지, 내가 어떻게 죽을 것인지는 결국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란 의문도 준다.

 

개인적으로 락과 메탈, 재즈나 블루스와 같은 음악을 좋아하기에 이 책 처음부터 조금 의아한 부분이 있었다. 국내 펑크락을 대중에게 알린 크라잉넛이 나온 것이다. 크라잉넛의 공연에 가서 나도 머리도 흔들고 소리를 지르고, 이래저래 재밌게 즐겼다. 우리의 인생에서 우리가 주인공이어야 하는데, 솔직히 우리가 주인공인적은 없었다. 크라잉넛이란 펑크하는 사람들이 글쟁이로 알아주고, 국회의원과 장관까지 역임한 사람이 부러워한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 아닌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중요한 것은 알고 있으나, 돈으로 인간을 모두 올리면 결국 남는 것은 극한의 허무이다.

 

돈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면, 자신이 평생 살더라도 남아도는 돈이 있더라도 결국 마음의 빈 공간을 채울 수 없기 때문이다. 크라잉넛이 부러운 이유는 그들은 돈이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다. 그들의 인생은 곧 놀이이고 예술이었다. 인생은 예술이라고 말하려면 예술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하나, 우리의 인생은 예술이 아니라 그저 전시관에 전시된 박제된 동물에 불과하다. 폴 비릴리오의 <소멸의 미학>에서 우리가 진짜 살아있으려면 그 존재가 어느 곳에 머물기만 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있는가? 삶이란 그저 박제되어 있는 피조물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열정도 없이 꿈도 없이 그저 정해진 틀에 살아가는 인생이란 행복이란 있는 것인가? 사무실에 있는 다른 직원, 나보다 어린 직원이 나에게 아직 철이 덜 든 같다는 말을 들었다. 크라잉넛에 대한 이야기와 그런 밴드를 좋아하는 나, 사실 크라잉넛은 나이 40을 바라보는 중년이다. 그런 중년을 바라보는 남자들의 음악에 지난 청춘이나 지금도 같이 머리를 흔들고 목소리를 지를 나에게 철없어 보일지 모른다.

 

철이 없다는 것에 대해 나는 이제 오히려 좋겠다고 받아들인다. 철이 들었다란 무엇인가? 과연 그 철이란 어떤 것을 말하는가? 그것은 인생을 말하는 것일 터이다. 계산적이고 이기적이고 현실의 부정함에 타협하는 것에서 말이다. 나라고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현실 속에서 매우 계산적인 스케줄을 관리하거나 또는 개인적 업무를 한다. 물론 현실의 부정함에 타협할 수밖에 없는 내 자신을 보고 있다. 힘이 없기에 그래서 그것을 극복하고 싶기에 철이 없어지고 싶었다.

 

그런다고 내 행동에 책임을 회피하거나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인 유시민도 이 책에서 가장 많이 인용하는 저자와 책이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이다. 자유에 대한 책임과 그것에 대한 자신의 의지가 중요하다. 하지만 한국에서 그 의지를 실행하기에는 철드는 것이 어려울 뿐이다. 내 자신만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존재적 공감, 나는 정의에 대해 생각하면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다. 현실에 대한 정의란 그저 쓰레기도 못한 허울 명제이다. 우리 모두가 행복해야 한다고 하나, 사실을 그렇지 않다.

 

병원에서 언제 죽을지 모를 사람을 붙잡아 두고 생명장치를 연결하나 그는 다시 말을 하고 걸어다닐 수 없다. 심지어 의식조차 있다고 볼 수 없다. 하지만 그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안락사에 대해 반박하고 생명윤리를 논한다. 그러면서도 길거리에 얼어주는 노숙자나 독거노인, 소외된 사람들의 죽음에 대해 생명윤리를 제외시킨다. 결국 그 논리란 무엇이냐 말인가? 거울뉴런이란 단어가 참 신기했다. 내가 아닌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여 인간이 거기에 대하여 사회적인 고민과 동시에 새로운 변화를 주려는 감정적 반응을 말이다.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을 보면 인간이 자신이 아닌 타인은 그 수단이 아닌 그 목적으로서 존엄성을 두고 타인에 대한 대가를 바라지 않고 선을 주는 것을 정언명령이라고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보이는 정언명령이란 어려운 모양이다. 당장 먹고사는 것도 중요하는 것은 인정하나 결국 그 사회적 합의가 모두에게 좋은 결과를 돌아오기를 바라지 않는다. 지금 조금이라도 보이는 작은 이익, 그것에 모든 사람들은 순간적으로 반응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내가 살아가는 것은 나만이 사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연대로서 시작된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말이 있다.

 

그렇기에 살아가는 세상을 혼자가 아니라 다수의 존재라는 것을 인지하고,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이 바를 것이다. 개인적으로 존 롤즈의 <만민법>이란 책을 보면서 인간은 공공선이란 정해진 공중도덕을 지나 공동선을 추구하여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딱히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점이다. 그것이 살아가는 길이고, 죽을 때를 대비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죽으면 지난날에 대해 깊이 돌아본다고 한다. 내가 무엇을 했고, 어떤 삶을 살고, 그리고 주변에 어떻게 했는지 말이다. 공부도 싫어하고 오락실 좋아하고 만화책 보기 좋아하고 타인과 어울리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은 나에게 마지막 내 모습은 후회로 가득할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그런 세상살이만 한 것은 아니다. 때로는 주변에서 너는 아무런 도움과 이익도 안되는 일을 왜 하냐는 말까지 들은 적도 있었다. 생각해보면 내 인생에서 그런 도움과 이익도 안된 것들이 나에게 보물이었을 것이다. 당시는 조금 손해 보는 마음이나 지금은 그것이 있기에 나라는 존재가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가능했다. 단지 조금 비뚤하고 어긋난 것이 흠이나 그것도 나름 매력 있다. 남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것 역시 능력이니 말이다.

 

그런 삶을 살아오고 생각하기에 지금이 있어 앞으로 그것에 의해 영향을 받을 것이다. 유시민의 책처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서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도 같을 것이다. 그런다고 그는 당장 자살하고,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죽음이 올 시기에 죽음에 대한 준비를 위해 옆에 많은 사람을 불러 같이 어울리고 놀고, 축제처럼 만들고 싶다고 하다. 단지 죽음을 욕되게 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죽음, 그 죽음에서 나는 안락사를 행위를 찬성한다. 내가 자주 가는 예술영화관에서 유럽영화 중에 <아무르>라는 작품을 상영한다고 한다.

 

노부부의 인생에서 아내가 불치병에 걸린다. 소중한 사람을 옆에 두는 것보다 그저 그 사람이 죽음을 선택하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사랑을 실천하는 것 같았다. 고통이란 육체적으로 받는 사람도 괴롭지만 옆에서 정신적 내지 물질적 고통을 받는 사람 역시 괴롭다. 안락사 추구에서 더 이상 가망 없는 자에게 억지로 살아가라는 것은 그 대상자의 존엄성을 정말 생각한 것일까? 차라리 실직하여 절망에 가려진 어려운 사람들을 자살하지 않게 하는 것이 더 소중한 것 같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충격을 받은 것은 2011년 한 해 동안 한국에서 자살한 사람이 11,000명 정도라는 점이다. 죽음의 선택은 쉬운 것이 아니다. 때로는 고통과 절망의 기로 속에서 방황해야 한다. 하루에 40명 넘는 사람이 죽음을 선택한다. 직업적 원인, 삶의 고독에서 오는 외로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암울한 현실, 게다가 그 자살에서 어린 학생들의 비극까지 들린다. 우리는 도대체 어떤 식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보이는 우리의 사회의 어두운 면에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이 책에서는 유시민의 지난 일과 나가야할 자신의 미래도 담고 있으나, 왠지 보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 자유인으로 돌아가기에 그 자유라는 것이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에서 그의 자유란 인간의 행복이었다. 인간이 행복해야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닐까? 나라는 인간은 어떻게 보면 하루 3끼 먹고, 청년실업자들이 넘치고 있어도 어떻게든 중소기업에 다니고 있어서 그나마 행복할 기회는 있을지 모르나, 행복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행복이 무엇일까? 삶의 기로에서 어차피 우리는 일회용 인생이다. 죽으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많이 웃고, 많이 울고, 많이 돌아다니고, 많이 생각하고, 우리는 사실 열정적 인생을 가져야 하나 그것이 정말 어렵다. 나도 당장이라도 만화책을 내 방을 다 채워서 며칠이나 계속 읽고 싶다. 최근에는 어려운 철학이나 사상도서를 접하고 있으나, 기본적으로 나 역시 놀이라는 것을 좋아한다. 인간에게 놀이가 소중하기에 나 역시 그 놀이를 중요시하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그런 문화를 용서하지 않는다. 언제나 벽에 박힌 것처럼 붕어빵을 만드는 기계 안의 붕어빵처럼 잘 찍혀야 한다. 만약 단팥이 옆에 튀어나오면 팔리지 않는다.

 

오늘 우연히 내가 중학교 시절에 좋아하던 <프린세스 메이커>에 대한 자료를 보다가, 어느 사람의 덧글을 보고 매우 놀랐다. 자신의 아버지가 아주 예전에 하던 게임인데 그것은 자신의 자녀에게 주면서 해보라는 것이다. 나도 언젠가는 저런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 어린 시절 만화책을 보면 핀잔주거나 오락실에 가면 마구 혼내던 지난 일을 생각하면 나 역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한다. 소통과 교감이 그다지 뛰어나지 않은 이방인 같은 존재이기에 모르겠다. 유시민은 자신의 아들이 축구에 빠졌다는 것을 거론했다. 단지 아쉬운 것은 정신적인 부분은 이미 프로급인데, 신체적 조건은 자신의 DNA라는 것이다.

 

축구선수로 되지 못해도 그래도 축구에 관한 여러 가지 직업을 선택할 수 있으니 거기에 몰입하고 최대한 도와주겠다는 그의 결심이 왠지 부러웠다. 물론 부모의 재산에서 자식의 인생은 크게 좌우되나 더 큰 것은 부모로서 가질 태도다. 평소 나는 누가 나에게 말을 걸면 ?”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한다. 집에서는 왜는 왜라니 그저 예하면 되는 것이지 하나,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를 부르는 것은 다 이유가 있으니 왜라고 한다. 조금 그 왜는 안 좋은 부분도 있다. 주변 친구나 사람들이 귀찮게 할 것 같아 왜라고 하는 것도 있다. 나 역시 상당히 귀찮은 것을 싫어한다. 그래도 그 왜는 중요하다.

 

왜라는 것은 이유와 그 이유가 된 원인과 그 원인에 대한 결과적 해석이 가능하다. 삶의 발견에서 우리는 언제나 철학적인 자세가 없다. 그저 힘과 권력 앞에서 이유를 불문하고 억지로 따라가야 하는 현실에서 인간의 존엄성이란 존립할 수 없다. 삶과 죽음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는 결국 왜 그래야 하는가에서 다시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생각해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무엇 하러 살 것인가? 라는 다소 회의적 관념이 존재하는 나라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단지 현실에서 느끼는 보이지 않으나 마치 넘어갈 수도 지나갈 수도 없는 거대한 벽이 내 앞에 막혀있어서 그럴 것이다. 그래도 삶은 살아야 하니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 그러나 그냥 그렇게만 사는 것만큼 짜증나는 일이 없으니 삶은 언제나 괴로움의 가시밭길일 것이다. 그렇기에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이다. 나는 오늘도 내일도 어떻게 살 것인가? 아니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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