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모더니즘 편 (반양장) - 미학의 눈으로 보는 아방가르드 시대의 예술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2013년 2월 24일 오늘 나는 하루 종일 잠만 잔 것 같다. 그동안 마음속에서 참고 참은 여러 가지 정신적 고통과 고뇌, 그리고 방황도 있었고, 매일 야근과 잔업, 외근이란 업무 속에 쌓인 스트레스도 있었을 것이다. 허나 그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늘 내가 서평 할 도서인 진중권 교수의 <서양미술사-모더니즘편>에서 조금 찾아낸 부분일 것이다. 내가 원래 아방가르드에 대해 우연히 맛을 들인 이유는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에 대해 공부하면서이다. 여기서 미셀푸코, 레비 스트로스, 자크 라캉, 질 들뢰즈, 자크 데리다, 장 보드리야르 등의 서적들을 찾아보고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여러 가지 책을 읽어보았다.

 

어려운 책들이고, 시간적 여유가 한계가 있기에 모든 것을 이해할 수도 봤다고 할 수 없으나 이들에 대해 알아가면서 프랑스 철학이나 사상이 기본적으로 20세기의 양대 사건에 의해 구성되었다는 점을 알았다. 특히나 많은 철학자들이 2차 세계대전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질 들뢰즈의 경우 2차 세계대전에 자신의 형이 죽었고, 루이 알튀세르와 같은 경우 전쟁 후유증으로 평생 시달렸으며, 정신적 착란상태에서 아내의 목을 졸라 죽였다. 인간에 대해 연구하고 고찰하는 철학자 역시 전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구조주의 이전에 장 폴 사르트르나 메를로 퐁티와 같은 철학자들 역시 전쟁에 대해 여러 가지로 영향을 받았으며, 전쟁이 곧 사상과 이념 그리고 자본의 유동에 의해 이루어진 하나의 거대한 스펙타클이란 점에서 사르트르나 메를로 퐁티를 친구에서 학문적 적으로 변했다. 그것도 이 책의 서평과 연결되어 있다. 왜 모더니즘의 예술에서 아방가르드가 위와 같은 철학자나 사상가들과 연결되는가? 그것은 인간에 대한 담론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딱히 나는 이 책을 읽어보아도 다다이즘, 표현주의, 극사실주의, 초현실주의, 야수주의, 미래주의, 신즉물주의를 일일이 판단하고 누가 어느 작품을 만들고까지 일일이 파악할 수 없다. 내가 찾는 것은 이들의 작품을 보고 지금의 기준으로 미적 감각을 찾기보단 왜 저렇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알고자 하는 것이다. 이중텐의 <미학강의>에서 예술이란 삶을 광학적으로 보는 것이라고 한다면, 미학이란 그 예술을 철학이란 칼로서 보는 것이라고 한다. 철학을 알면 결국 미학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보인다.

 

미학의 학문적 시초라고 볼 수 있는 칸트의 <판단력비판>을 보더라도 그것은 미에 대한 직접적 판단을 제시하기 보다는 그 미에 대하여 기준에 대한 기준을 제시하고, 그 밑바탕은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을 기초로 한다. 결국 미학은 철학자가 만든 하나의 새로운 영역의 학문이다. 미학이란 딱히 미학으로서 존재하기 보다는 다른 학문과의 조우에서 태어난다. 만약 건축물에 대해 알려면 건축학을 어느 정도 파악하지 않으면 불가능할 것이다. 도시미학에서 도시계획을 모르면 불가능할 것이고, 특히 조경을 모르면 많은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중앙의 원근법이나 사물배치에서 과학적 지식 역시 중요하다. 빛의 미학에서도 태양의 운동과 기상적 조건 역시 중요하지 않은가? 미학은 미학으로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미학은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런데 왜 모더니즘의 미학에 내가 눈을 돌리는가? 이미 지금 시대는 모더니즘을 지나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에 살아간다. 그런데도 우리는 모더니즘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에 이런 말이 나온다. 키치에 의해 지배받는 대중, 대중문화는 이미 자신들의 개성이나 주관성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아도르노가 비판한 것처럼 문화는 대중들을 그저 그 조류에 따르게 하는 하나의 헤게모니가 되었다.

 

스펙타클의 사회처럼 우리는 과연 우리의 의도대로 살아가는가? 스펙타클이 강렬할수록 대중의 열광 역시 뜨겁다. 같은 모습만 찾고 서로 간의 단결력을 키운다. 파시즘의 미학에서 대중들의 영합에서 민주주의 사회의 오류로 나타낸다. 민주주의만큼 가장 전체주의로 발달하기 좋은 구조는 없는 것 같다. 모두가 같은 생각을 아주 민주(民駐)적으로 만든다. 그것은 주인이 아니라 어디에 갇혀버려 자신의 존재성을 그저 상실한 채 같은 것을 모양만 바꾼 것에 열광하는 저들에게 말이다.

 

모더니즘편의 아방가르드란 그런 것들 깨는 것이다. 내가 그런 시기의 작가와 작품을 다 알 수 없고, 찾아볼 수 없으나 그런 연유를 중시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모습 역시 저 당시와 별반 차이가 없음을 인지하는 바이다. 내가 아방가르드에 관심 갖게 된 동기는 바로 구조주주와 후기구조주의를 알아가면서 1968년 5월 혁명에 대한 관한 것이다. 이때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이란 특이한 존재가 나온다. 이들은 1972년에 해체한 20세기 마지막 아방가르드이다. 지금 아방가르드하면 패션이나 혹은 공예물에서 허울 좋은 이름으로 통하나, 막상 아방가르드는 다른 얼굴이다.

 

1968년 5월 혁명에서 매우 중요한 서적 2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기 드보르이 <스펙타클의 사회>이고, 다른 하나는 라울 바네겜의 <일상속의 혁명>이다. 이 책의 마지막에 이런 문구가 인상적이다. “우리가 얻을 것은 즐거움의 세계요. 우리가 잃을 것을 권태뿐이다,”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좋은 영화가 있다. “사드를 위해 절규”라는 것이 있는데 대략 런닝 타임이 65분 정도 된다. 보고 난 뒤에 관객들은 엄청난 쇼크를 받을 것이다. 엄청난 기대감과 함께 왔으나 그 기대감을 모조리 망치는 그들의 계획을 말이다. 하지만 이것이야 말로 그들이 관객의 행동을 예측하고 원하는 것이다. 스펙타클을 전복해도 어차피 또 다른 스펙타클이 등장하는 것이 우리 사회이다.

 

그런 스펙타클의 전복과 생성조차 못하는 것이 “사드를 위해 절규”이다. 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듣고만 있었던 나로서도 당황스러웠다. 그것도 근무시간에 모니터 2개에서 오른쪽은 영화를 왼쪽은 근무하고 있었으나 말이다. 아방가르드는 바로 당황스러움을 제공하는 것이다. 책의 들어가기 부분에서 잠시 내용을 빌려온다면 이렇다.

 

제들마이어에 따르면, 현대예술이라는 복잡한 숲을 이루는 그 모든 가지는 결국 네 개의 “공동의 뿌리”에서 자라 나왔다고 한다. ’순수성의 추구, 기술적 구축, 광기의 탐닉, 근원의 탐색‘이 그것이다. 이 네 가지를 제들마이어는 현대예술의 ’근원 현상‘이라고 부른다. 순수, 기술, 광기, 근원, 이것이 20세기의 아방가르드(avant-garde) 운동을 추동해온 네 가지 충돌의 이름이다.

 

그래서일까? 아방가르드에 대한 모더니즘에서는 현실에서 보이는 예술가들의 모습이 다소 힘든 상황이 보인다. 예전에 이런 글을 본 적이 있다. 대중 앞에 전위예술가가 나와도 문제인 것은 그가 소통을 할 수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 아닌 가이다. 한편으로 다르게 생각해보자? 대중들이 처음부터 소통할 생각조차 없다면 말이다. 이래저래 보아도 현대미술에서 미국이란 곳에서 아방가르드는 현대미술의 한폭에 걸린 소재가 된 것은 분명하다. 그린버드인가?

 

그 자는 이른바 트로츠키주의자라고 한다. 다행히도 전에 아이작 도이처의 <무장한 예언자>, <비무장한 예언자>, <추방당한 예언자>라는 트로츠키 3부작을 읽어보았다. 레온 트로츠키는 1917년 10월 레닌과 더불어 볼셰비키혁명을 이끈 혁명가고, 러시아 내전을 승리로 이끈 사령관이었다. 그리고 스탈린에 의해 꿈이 깨어져버린 망명가이었다. 트로츠키와 스탈린의 차이에서 트로츠키는 영구혁명론을 내세웠다면, 스탈린은 일국사회주의로 이어지고, 지금의 북한까지 영향을 미쳐서 소비에트연방의 공산주의는 결국 독재와 폭력만 난무한 파시스트적인 요소로 되었다.

 

아방가르드에서 5월 혁명가들은 이런 문제를 아는지 소비에트연방에서 낡은 정치사상을 비판하는 전문을 보낸다. 나에게 바로 아방가르드란 존재는 엘리트주의에 대핸 도전의식과 더불어 대중문화에 대한 권태의식을 동시에 이해해주고 새로운 공간으로 보인 것이다. 단지 나는 그렇게 만든 것을 미적 감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그 감각이 살아있을 수 있는 것에 대한 것을 관심을 두었다. 그러다 보니 역사, 문학, 철학이란 인문정신을 빼놓을 수 없는 분야가 된 것이다. 아방가르드란 끊임없는 현실에 대한 분리를 요구한다.

 

조금 다시 생각해보면 모든 인간의 욕망을 현실화를 위해 자연주의적 인간상을 추구한 루소에게도 아방가르드는 빚이 있는 게 아닌가 싶다. 헤게모니라는 거대한 틀에서 인간이란 정신적 지배를 받아도 그 지배가 자유라는 공간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나오는 “나는 노예의 평화보다는 위험한 자유를 택할 것이다.”는 민주자유주의 정신의 기본 중에 기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 자유라는 것은 무엇인가? 차라리 만인 대 만인을 주장하는 홉스일까? 최근에 나온 <민주주의는 죽었는가?>라는 책 제목처럼 우리가 추구하는 세상은 무엇일까?

 

아방가르드 문화는 1차와 2차 세계대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전쟁 전·후 문화현상에 가깝다. 전쟁과 인간의 광기, 오히려 그 광기가 이성이라고 믿는 인간에게 줄 수 있는 현실적 방법은 오로지 충격이다. 괴이하고 이상한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이성으로 회유다.아니라면 광기의 초현실주의가 인간의 근원을 되찾을 길인지도 모른다. 미셀 푸코의 <광기의 역사>처럼 광인은 그 시대의 현학자이며 시인이며 고상한 능력을 가진 자인지도 모른다. 우리 역사에서 볼까? 샤먼의 화려하고 알 수 없는 춤과 노래는 보는 이로 하여금 긴장감을 주게 한다.

 

그들은 보이지도 않은 누군가와 대화하고, 혼자서 모든 한과 열정을 토해낸다. 무속신앙에 대한 진귀함에서 우리의 감추어진 내면의 율동화이다. 우리는 언제나 자신 안에 있는 그 무언가를 속이고 감추는 삶을 살고 있다. 그것을 표출할 수 있는 초현실적인 경험이야 말로 인간이 본연의 모습을 찾는 길 중에 하나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아방가르드에서는 그런 것을 여러 길 중에 하나일 것이다. 과학을 기반으로 한 구축주의에서는 유물론적인 가치관인 관념 안에 있는 세계를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아방가르드 문화가 나오기 어려울지 모른다. 아방가르드의 출현은 어지러운 국제사회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는 전쟁이 일어나고, 러시아에서는 혁명이 일어나니 전 세계적으로 피 냄새가 진동했고, 인간의 광기가 전쟁에 의해 미친 듯이 춤을 춘다. 전쟁 후에는 인간의 자유와 평화가 도래할 것이라 믿었을 것이다? 아니 진짜 자유와 평화가 왔다. 그들만의 자유와 그들만의 지배에서 누릴 평화가 말이다. 1935년 초현실주의자가 코뮤니스트와 결별에서 그들의 결별은 정해진 것인가? 스탈린이 1936~1938년의 대숙청은 이미 그 전에 전초전을 알린 것과 같으리라. 그리고 러시아에선 아방가르드는 완전히 사라진다. 진취적이고 현실도전적인 사상을 누가 관료주의 파시즘이 용납하는 것인가?

 

지금에 와서 하나의 고착된 세계관계에서 아방가르드는 설자리가 없을 것이다. 지금 세계가 변화하는 것은 맞으나 변화에서 더 이상 사람들은 아방가르드를 보고 하나의 정신적 충격이기보다는 하나의 수집품에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피카소의 작품들을 보면 분명히 저항의식이 분명하고, 절대적인 권력자와 착취자 앞에서 희생당하는 약자에 대한 아픔을 간직한 그림이다. 그런 그림을 그런 세상을 원하는 자들에 의해서 수집당하거나 혹은 그것을 용인하는 형태라는 참 신기하다. 아니 아방가르드는 대중적인 세속을 피하려고 했다.

 

키치, 이제는 시뮬라크르로서 피카소의 작품들이 우리 주변에 모사품으로 걸려 있다. 아비뇽의 처녀들이나 게르니카와 같은 작품들은 미술교과서에도 실린다.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그저 “아! 피카소이니깐.”라는 말과 함께 말이다. 지방에 사는지라 서울에서 열리는 국제상황주의 전시회에 가지 못하는 것이 이렇게 아쉬운 적이 없었으나, 적어도 우리는 오늘날 개인적 인간으로서 개성과 주관을 가지고 있는가? 왠지 가지고 있으면 이상한 녀석으로 취급당하는 것에서 회의적인 기분이 드는 이유는 어쩔 수 없으나, 적어도 아방가르드의 정신은 배울 점은 분명히 있다.

 

예술이란 것은 정치적 도구로서가 아니라 우리가 정치적 수단으로 예술이라는 점이다. 인간은 이야기하기 위해 생각하는 존재이다. 이야기라는 것은 말로서도 할 수 있으나 하나의 사물로서 표현할 수 있다. 캔버스 위로 펼치는 그림이나 혹은 레디메이드(신문)와 놀이(가위질)의 결합이 콜라주에선 삶이 예술로 되고자 하는 것은 놀이를 위한 방법이다. 예전에 강신준 교수님의 강연에서 인간이 동물과 다르게 가지고 있는 것이 오직 한 가지였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여가시간을 이용하여 놀이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고전주의는 숭고를 위한 것이라면 모더니즘은 숭고를 파괴하는 것이다. 그러면 예술의 파괴는 새로운 예술의 출현이다. 그러면 그 뒤에는 예술이 일상이어야 하는데, 아쉽게도 예술이 너무 흔하고 흔해 넘쳐서 어느 것이 예술인지 아닌지 모르는 것이다. 그것의 아쉬움은 인간 누구나 만드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자에게 주어진 헤게모니의 특권이란 점이 유감이다. 레디메이드에서 마르셀 뒤샹이 서명이 들어간 것이 결국 큰 특권이 되는 것을 알았기에 마르셀 뒤샹은 그 물건을 사진만 남긴 채 실체를 없앴다. 지금은 그것보다 더 좋은 소변기가 화장실에 있는데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