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소통하기 영화처럼 글쓰기
이대현.김혜원 지음 / 다할미디어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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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하면 보통 우리 일반 사람들은 “나는 영화 좋아해! 저번에 그 영화 좋았어! 재미있었어! 좋은 작품이야, 에이 별로야!” 수많은 반응이 오고간다. 하지만 그들의 문화산업에 대한 취미생활에 대한 부분을 별로 말하고 싶지 않으나, 다소 위선과 가식의 냄새가 나는 점에서 재미가 없다. 영화를 왜 보는가? 라는 점에서 단지 나오기 때문에 혹은 killing time이란 영역에 집착하여 어떻게 보면 kill in the name으로 될 판국이다. 영화라는 것은 하나의 우리에게 존재성에 대한 의문을 준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 본래 영상에서 1초에 24프레임의 이미지가 겹치고 우리 인간이 미쳐 볼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한다. 영화라는 것은 인간이 시각정보로 받아들일 수 없는 세계를 보게 해준 하나의 새로운 세계이다. 무의식적으로 인간의 모습이나 카메라 앵글에서 보이는 피사체의 행동들은 감독이 의도하든지 혹은 의도하지 않아도 보이고 싶거나 보이지 않을 것들이 보인다.

 

영화는 인간의 이야기를 다룬 것에서 매우 재미있는 이유는 그것은 우리라는 인간들을 마치 타자로서 대하기 때문이다. 타자의 대한 카메라의 시선은 관객들로 하여금 자신과 머나먼 존재에서 때론 자신과 같은 모습을 발견한다. 하지만 cliche의 영역에서 지나친 소재의 남발은 우리에게 몰입감만 요구한다. 영화 역시 문화산업의 일환이므로 경제적 요소가 배제될 수 없다. 영화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데올로기 추구에 당연히 부합되는 점이다.

 

이데올로기에 접근한 영화이기에 영화라는 속성에서 우리는 당연성에 대해 당연성을 생각하지 못하게 된다. 영화로 소통하기와 영화처럼 글쓰기라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보편적 관점에서 서술해야 하는 미학적 가치와 더불어 그것이 하나의 헤게모니로 이어지는 아이러니는 영화에서 예술이냐? 아니면 입맛 맞추기 급급한 인스턴트 햄버거이냐? 물론 인스턴트 식품도 맛있게 먹는 것이 아니라 재구성할 수 있다.

 

영화로 소통하는 것이란 그 함축된 의미와 숨은 의미를 잡아낼 수 있고, 영화처럼 글쓰기를 하면 그 세계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된다. 진중권 교수의 서적 <icon>에서 문화비평을 논한다. “문화비평이라는 이름의 글쓰기는 결국 말 없는 사람을 읽는 작업이다. 그것은 말 없는 사물에 인간의 목소리를 주어 그것들이 스스로 자신을 말함에 이르게 해야 한다.” 이것에서 가장 좋은 것은 영화다. 영화에서 배우들은 말을 하고 대사를 나눈다.

 

하지만 보는 자가 주체이지 보이고 있는 자가 주체가 아니다. 결국 자신의 말을 하지 않은 채 그것에 의해 지배당하는 헤게모니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담론화에서 자신의 상상력과 판단력으로 문화를 수용하여 재생산하여 사적인 영역의 현상화를 위한 길에서 영화 역시 좋은 소재다. 나는 어제 그것을 봤어! 너도 그것을 봤니? 그것 재미있지로 모두 끝이 나고 동의와 동질감을 느끼고 있을 때 영화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는 이미 안드로메타 성운에서 헤엄치고 있다.

 

영화든 기본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 서사의 허구성에서 오히려 개인의 역사가 아닌 무의식적 신화의 공간을 보여주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서사의 맛이다. 영상서사에서 영화는 바로 우리 인간이 가진 모습을 보여준다. 단지 조금 다른 점은 스토리텔링 소재들이 이전에는 가상이야기에서 이제는 진실이 재구성되어 보이는 것이다. 영화의 본질에서 허구로 통해 허구의 인식이 중요한데, 사실과 허구의 재구성이 해체되어 하나의 사실감으로 변모될 위험이 있다.

 

그것이 때로는 순기능을 할 수 있지만, 때로는 악기능을 한다. 스펙타클이란 단어 연발에서 우리 대중들이 영화를 두고 스펙타클한 것이 아니라 그 영화를 보고 무단히 거기에 얽매여 자신의 주체성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스펙타클이다. 예전에 아는 분의 추천으로 파이팅클럽을 봤는데, 인간이 속한 사회에 어떻게 인간은 속박을 벗으려 하나, 그 속박을 푸는 방법조차도 속박이었다. 스펙타클의 사슬을 푸는 것은 개인의 의지이지, 결코 남의 의지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단지 스펙타클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부분이다. 스펙타클을 전복해도 다른 스펙타클로 올라오고 수많은 스펙타클이 각기 서로에게 또 다른 스펙타클로 재생산된다. 때로는 스펙타클이 하나의 사실을 만들어버리는 시뮬라크르 세계다. 최근 pata-physics의 세계에서 스펙타클이란 진실한 의미도 부여한다. 피할 수 없고 도망칠 수 없다면 받아들여 즐기고 소비하자! 하지만 이런 과정을 위해서는 영화로 통해 소통해야 한다. 소통조차 불가능한데 어떻게 그것을 본다고 해서 말할 수 있으랴?

 

영화처럼 글쓰기는 자신이 영화를 다시 만드는 과정이다. 영화에 가려진 이야기를 찾아 우리 인간들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영화란 다소 불편한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편안한 영화에서는 우리 모습이란 없다. 단지 욕망의 신화에서 완벽한 허상만 존재한다. 현실에 있을 것까지도 않을 불편한 이야기가 오늘의 우리를 비추어준다. 전에 회사원이란 영화를 보았다. 살육이 하나의 회사일이 되어버린 잔혹한 세상에서 평범한 인간이 매우 잔인함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남들과 같이 밥먹고 야유회가고 출장가고 그런다. 그런데도 거기에는 살인과 폭력이란 무서운 행동이 있더라도 죄책감이 없다. 그 모습은 바로 우리들의 일상이다. 나라는 존재는 단체라는 패거리에 숨겨 자신을 타자화 시킨다. 그때부터 괴물은 탄생하기 시작한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에 가서 아우슈비츠 나치수용소의 악마 소장인 아이히만을 봤을 때, 그는 너무 단조로운 인간이었다. 사디즘이 없고 그저 권태롭게 보이는 평범한 인간이다.

 

그건 우리 보통 사람들이 그렇다. 사디즘의 미학이 오히려 고통과 상처에서 즐거움과 괴로움의 감정을 가진 채로 폭력을 수반하는 것이 더 미학적으로 우위를 차지하는 것은 나도 모른 채 타인을 죽이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파시즘적인 영역에서 문화란 집단광기 도구의 방법이다. 독일 나치의 괴벨스의 프로파간다의 위력은 완벽한 우리를 추구함이다. 완벽하기에 너무 완벽하기에 결점은 모두 제거된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완벽하지 못하다.

 

이미 자신만의 구원성이란 신화적 열망은 결국 스스로 파탄하는 것이다. 회사원은 그런 우리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다소 내용을 보면 이퀄리브리엄이란 영화가 생각난다. 마치 조지 오웰의 <1984>와 같은 디스토피아 세계에서 감정을 잃은 인간이 무척이나 잔혹하다. 그 잔혹한 인간이 오히려 그 세계를 부순 영웅의 창조가 된다. 회사원은 영웅 대신 자신의 세계를 되찾는다. 동기는 사랑하는 여자가 죽은 것에서 집단주의에 대한 저항의식이다. 폭력의 사회는 결국 폭력으로 구원할 절대적 신화로 이어지는 것인가?

 

영화로 소통하는 것은 결국 불편한 것에 대한 의미를 잡아 보는 것이다. 순수하게 포장되어 있는 바비인형은 아무 것도 낳지 못한다. 아이들에 의해 즐겁게 가지고 노는 도구에 불과하다. 문제는 바비인형을 만들고 즐기는 것은 우리 인간이다. 스스로 바비인형을 가지고 놀기에 갖가지 험상궂은 바비인형이 탄생한다. 물론 바비인형 스스로는 자신이 추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것은 외적으로 완벽하게 꾸며져 있으니 말이다.

 

영화처럼 글쓰기에서 헤겔과 아도르노 식의 변증법은 매우 효용이 있을 것이다. 찬, 반, 합에서 부정의 부정은 긍정인가? 또 다른 부정인가? 영화의 세계에서는 이런 방법이 계속 통용된다. 회사원이란 영화는 부정의 부정이 결국 긍정이 되었다. 파괴적 이데올로기의 정당화란 카타르시스의 염원을 관객에게 부른다. 그러나 부정의 부정이 또 다른 부정을 낳는 그로테스크에선 우리는 어떻게 보면 좋을까? 지구 종말에서 위기를 넘어도 해결되지 않은 채 또 다른 여정을 걷는다.

 

최근 영화 <남영동 1985>에서 실제 인물인 김근태 전 의원에 대한 이야기를 각색했다. 서사의 마무리는 부정의 부정에서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이 아니라 고문전문가의 휘파람 소리에서 또 부정의 시기가 온다는 것으로 영화서사를 마무리해도 그 영화서사의 소비자에게 영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이제부터의 영화는 당신이 감독이야! 이런 의미를 던진다. 문제는 그 영화감독들의 인원이 다소 부족함에서 <남영동 1985>는 신화의 파괴로서 신화를 만들려 했으나 결국 신화의 한 조각으로 되어버렸다.

 

어째든 이 책을 보면서 과거에 내가 영화비평을 해본 작품이 있었다. 아니 영화리뷰라고 해야 하나? 생계를 위해서나 전문가 세계가 아니라 아마추어적인 취미와 성향에서 영화텍스트에 대한 재생산은 반가운 내 자신을 만난다. <부러진 화살>, <고지전>, <글러브>, <코쿠리코 언덕에서>, <마당을 나온 암탉> 영화가 아닌 소설로 본 <걸리버 여행기>, <고백>은 내가 소설과 영화라는 문자서사와 영상서사에 대한 텍스트 세계에 있던 지난 시간을 돌아보게 하는 계기라고 볼 수 있다.

 

지금도 물론 가끔씩 영상서사를 분석한다. 그러나 아쉬운 부분은 영상서사의 분석은 시청이 2시간 내외라면 글을 적는 시간 역시 2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아니 그 이상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영상서사에 대한 의미해석과 주변 정보 관계 그리고 좀 더 보완할 상황은 스스로 찾아야 할 숙제다. 그래서 영화보기보다 영화읽기가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고, 그것을 아는 맛만큼 보기만 하는 것 이상으로 즐거움을 준다. 영화로 세상과 소통하고 영화처럼 글쓰기를 하여 영화를 보는 것에서 주인공은 영화 속이 아니라 영화를 보고 판단하는 나라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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