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으로 읽는 폭력의 기원
존 도커 지음, 신예경 옮김 / 알마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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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인간은 폭력으로 얼룩이 진 역사다. 가려진 역사 뒤에는 죽음과 파괴, 모순과 왜곡으로 가득하다. 오히려 모순과 왜곡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정상일까? 세상은 불편한 진실에 대해 보여주기 보단 감추고 은폐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신화라는 이름이 탄생하고, 그 신화에서도 폭력에 숨은 영광과 동시에 폭력에 대한 억압을 담은 것 역시 신화다. 인류가 모조리 멸망하지 않을 그 순간까지 우리는 신화의 세기인 것이다. 우리들에 대한 억압은 부조리하나 타인에 대한 억압은 생각하지 않는 풍조는, 인간들의 집단주의적 행동들이 불러일으키는 광기다.

 

광기는 개인적 광기는 예술과 문학, 철학과 사상을 전파한다. 미셀 푸코의 <광기의 역사>에서 광인들이야 말로 기존 시대에 새로운 이야기를 열어가게 하는 사람이다. 아니라면 신과 조우한 자들일 수 있다. 한국의 경우 샤머니즘이란 전통신앙체계가 있고, 거기에 무당들은 알 수 없는 무아지경에 빠져 누군가와 대화를 나눈다. 그 과정에 춤과 노래를 부르고, 작두 위에서 맨발로 뛰어 오른다. 작두에 오이를 떨어뜨리면 두 동강이 나는데, 그들에게서 상처 따위는 없다. 개인적 광인들의 출현은 오히려 그 사회의 대중들 속에의 자리 잡은 숨은 광기를 해소해주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광인들은 모두 정신병원이나 수용소로 넘어가고, 미신이라는 이유로 남들이 보이지 않은 공간에 유폐된다. 그러면서 인간의 광기는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하나의 공통습성이 되는 것이다. 언제나 자신들에게 관대한 태도를 가진 부류들은 결국 관대하지 말아야 하는 존재가 필요하다. 또한 자신들이 스스로 관대하기 위한 우월감에 젖을 필요가 있다. 고대 그리스의 전쟁역사를 다룬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대해 이 책의 저자는 계속 언급하는데, 그들만의 민주주의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들만의 민족주의가 우선되어야 했다.

 

자신들의 우월한 통치체제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그렇지 못한 존재가 필요하고, 그들을 짓밟는 것이 필요했다. 결국 관용과 환대라는 정신보단 항복하지 않으면 죽음이라는 협박만이 존재했고, 그것은 그리스가 멜로스라는 작은 국가를 침공하면서 잔인한 인간을 보여준다. 대부분 남정들은 전투요원이 된다는 이유로 모조리 죽이고,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삼는다. 결국 일국의 나라와 민족의 씨를 모조리 말리는 것이다. 물론 노예가 된 아이들이 어른으로 성장하여도 후세를 남기기 어렵다.

 

여자들은 모조리 전리품이 되어 종살이를 해야 하고, 잦은 착취와 성폭력에 시달린다. 다른 부족 남자에 의해 성폭행당한 여성은 아이를 놓으면 그 아이는 성폭행 자의 아이가 아니라 단지 종의 아이일 뿐이다. 피로 연결되어 있지만, 결국 죽는 순간까지 비참한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만약 이들이 살아남아 다른 곳에서 생존하여 다시 되찾으러 오는 순간 커다란 전쟁과 폭력의 공포에 빠지게 된다. 기억나는 부분은 유대인에 대한 부분이다. 그들은 분명 주변 국가로부터 박해를 받았으나, 그들은 메시아주의에 의해 약속된 땅을 찾으러 간다.

 

문제는 그 땅을 찾아가는 곳에 이미 다른 주민들이 정착하고 있었다. 그들과 공존하기보단 그들을 내몰거나 죽이는 행위를 했다. 오히려 그런 힘이 없는 부족의 죽음이 신의 명령이라도 하듯이 말이다. 그런 피해자 속에 잠재된 피해의식이 억압과 분노에서 다른 부족들에게 공격과 파괴로 이어진다. 흔히 피해자가 가해자로 되어버리는 현상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런 비극은 1982년 레바논 대학살로 이어지는 사태로 이어진다. 전쟁에서 군인들의 전쟁에서 전쟁 후의 처리는 결국 민간인들의 참살 내지 노예화다. 죽이는 것에서는 농경사회 이전에 보이는 것으로 수렵이나 사냥에서는 에너지효율을 생각하면 대부분 몰살시키는 제노사이드가 용이했고, 농경사회 후에 재물을 축적하게 되면서 노예가 오히려 편한 것이다.

 

노동을 타인에게 부과한 만큼 강력한 군사력을 만들 수 있었다. 플라톤의 국가정체에 대한 부분에서 우수한 아들들을 훌륭한 지도자로 성장시킬 수 있는 방법은 어릴 적부터 체육과 학문을 연마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부모가 누군지 모르고, 귀족시민들의 공통된 자녀로서 살아가기에 부모 자식 간의 인연이란 필요가 없다. 단지 전쟁을 위한 전사, 정치를 위한 정치가로서 발전시킬 뿐이다. 이들이 가진 우월감에서 결국 그 외의 신분이나 계층들은 모두 하등한 것으로 간주하고, 여기서 상대국가에 대한 관계에서 그대로 반영된다.

 

플라톤이 이룩한 철학적 과업은 위대하나, 그런 만큼 자신들의 우월성을 강조하여 이민족이나 유목민, 원주민들을 무참하게 살해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는 아이러니가 발생한 것이다. 이런 관념적인 틀에서 서구 중세 기독교로 이동하면 신대륙 환상이 가득하다. 이들이 도전한 땅에 원주민들은 본래 그 곳의 주민인데도 이들을 모두 이민족으로 여긴다. 진짜 이민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영국에서 종교적 자유와 인권을 위해 미국으로 온 백인들은 거기서 살고 있던 인디언을 살해하고, 흑인들이나 유색인종에 대해 폭력과 억압을 실행한다.

 

그런데도 자유와 평등이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에서 자유와 평등은 자신 안이 아닌 타인에게도 존재하는 것에 대한 철학적 명제는 없다. 이런 모습들은 계속 역사적으로 되풀이가 되어오고, 학살은 계속 이어간다. 제노사이드에 대해 상식을 가진 자들에게 물어보면 그런 사건들은 분명 옳지 않고 무섭다고 하나, 살인의 향연에선 늘 주인공은 그런 상식을 가진 자들이다. 인간이 이성적이라고 하는 합리주의적 사고와 계몽의식은 오히려 그 뒤에 숨겨진 추악한 진실을 가린다. 스피노자가 이성도 감정 중에 한 가지라고 한 것처럼 이성적이라고 여기는 부분이 결국 더 잔인한 인간상을 부여한다.

 

물론 그것을 진작부터 알았다면 비극은 피할 수 있으나, 그럴 수가 없다. 상식적인 부분은 보편적인 면과 동시에 모두가 비슷한 생각을 지니고 유사한 인간상을 가진 것과 같다.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에서 어린 시절 그녀 집 근방에 독일군 포로를 가둔 수용소가 있는데, 거기에 있는 나치에 대해 수전과 그 시대 사람들은 그들이 인간이 아니라 마치 괴물이나 흉악한 존재로 여겼다고 한다. 하지만 막상 그들을 보면 보통 인간이었고, 감정이 풍부하고 때로는 이성적이며, 온화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괴물이라고 여기는 존재가 오히려 선량하게만 보이던 사람이니, 그들을 악마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진정한 괴물과 악마는 상상 속에 존재하는 자가 아니라 바로 내 옆에 있고 내 속에도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부정하고 싶은 것이다. 자신에게 처한 위기에서 애절한 구원의 손길을 주기를 원하는 오디세우스가, 어느덧 자신이 구원의 순간을 결정할 때 아주 냉정하게 몇 마디로 잘라낸다. 당하는 자는 예전에 자신을 구해준 사람인데도 말이다. 인간이란 본래 이런 존재인가? 하지만 그것이 정답이란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 내 자신이 왠지 허탈하다.

 

비폭력의 정신으로 모든 것을 안으려 해도, 결국 비폭력 정신은 폭력에 의해 짓밟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간디즘이라고 하여 영국에 대항한 인도의 성인, 그러나 그도 폭력적인 종교주의자에게 살해당한다. 이 책에서 언급한 칸트의 영구평화론에서 타인에 대한 관대함은 좀처럼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허망한 꿈이다. 그런다고 해서 지금까지 일어난 세계의 인종 학살극과 지금도 계속 이루어진 민간인 학살은 우리의 뉴스에서 나오는 일들이다. 하지만 단순히 이런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에만 생각만 할 수 없다.

 

과거의 역사와 역사의 숨은 이야기인 신화조차도 우리의 모습이 계속 되풀이된다. 신화적인 사실의 왜곡에서 인간들이 보여준 이야기는 매우 잔인하다. 그런데 더 잔인한 짓은 그 잔인한 행동들을 오히려 영웅적인 행태로 속인다는 점이다. 은폐와 모순, 왜곡 이 모든 것이 신화적 동기에서 중요한 촉매를 한다. 폭력의 정당화는 그 폭력에서 보이는 의미의 부여다. 건국신화를 보더라도 영웅이 거기에 정착하였다는 점에서 기존에 부족이 있다는 점과 그들과 교합하여 동맹을 이루지 못하면 결국 침략이다.

 

침략의 행위를 하나의 신화로서 명예로 간주하는 것들은 문명화라는 이름의 오만이고 야만이다. 레비 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를 읽다보면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가 보던 남미의 삶에서 상처와 고통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그들의 소실은 반대로 그 소실만큼 이익을 챙기는 자의 증대다. 균형의 추에서 어느 한 곳이 내려가면 다른 곳이 올라가게 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원주민을 야만스러운 존재라고 억지로 교화시킨 그들의 모순적 행동은 문화의 소멸과 부족의 소멸이다.

 

이 책의 뒷면에 아주 좋은 말이 있다. 에우리피데스의 <헬레네>의 대사 일부로서 “인간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유형이 낭자한 참사에 뛰어드는 수밖에 없으리. 언제쯤 폭력이 사라지고 증오가 누그러드는가? 언제쯤 사람과 도시가 평화롭게 살아가는가?” 여기에 대한 좋은 답은 코멘트가 달려 있다. 헤로도토스 <역사> 제3권 21장 에티오피아 왕이 페르시아 특사에게 한 말로 “그대의 왕은 공정한 사람이 아니다. 만일 공정한 사람이었다면 남의 땅을 탐내지도 않았을 테고, 아무 죄 없는 민족을 노예로 삼지도 않았을 것이다.”

 

지금이야 왕국들이 자취를 사라지고 있어도 저기 숨겨진 의미는 여전히 유효하다. 왕은 대표되는 인물이지 그 왕들의 아래에 있는 자들은 모두 그런 심리를 느끼는 점이다. 피를 보는 만큼 자신이 정당함을 몸소 정의로 보여주는 것이다. 정의란 선악의 도덕적 구분에서 그 대상이 심각한 행위가 아닌 이상 결국 선은 힘에 의해 구분이 지어지게 된다. 정의의 실현은 곧 폭력의 실현이다. 폭력의 미학에서 인간은 그것이 틀렸다고 여기지 않는다. 더 잔인하고 상대방의 목을 베는 것이 지겨워서 못할 정도가 되어야 그 행동을 멈춘다. 그리고 제노사이드가 틀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광의 순간으로 칭송되는 것이 여전한 전쟁논리다.

 

전쟁에서 민가에 폭탄을 투하하는 것을 민간인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적에 대한 보급과 은식처를 제거하는 것이고, 민간인에 대한 총격은 적군의 지원을 막기 위해서라고 한다. 예전에는 남자들만 죽이는 것에 비해 최근 학살은 어린이아와 여자 할 것 없이 모조리 살해한다. 20세기 파시즘이 활개를 칠 때 같은 시간에 누가 더 많은 목을 베는지 시합을 했다고 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괴물이고 악마라 여기지 않았다. 단지 자신들만의 정의를 행사하기 위한 행동일 뿐이다. 폭력에 항상 정의란 단어가 들어간다. 정의의 이름으로 적을 처단하는 행동에서 오히려 정의가 없다는 게 드러날 뿐이다. 적군으로부터 그 나라 국민을 해방한다는 자들이 오히려 그 국민들에게 저지른 학살들은 모두 아닌 척하고 있다.

 

결국 피해자의 세계에서는 정의란 그저 허울만 좋은 폭력이고, 피해자의 상흔은 드러날 수 없는 숨은 이야기다. 약자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조차 부여되지 않으며, 설사 한다고 해도 그저 퇴치되어야 할 선동가로 될 뿐이다. 우리 사회에서 역시 그런 기류를 잘 볼 수 있다. 냉전 시대의 메카시즘이 다시 21세기에 신메카시즘으로 우리 앞에서 폭력의 신화가 부활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폭력적 메시아주의에서 진정한 정의를 찾을 수 있다. 힘으로 누르고, 그 힘에 굴복한 이들은 모두 악으로 규정지게 하면 된다. 정의는 우리의 것이라는 슬로건이 <고전으로 읽는 폭력의 기원>에서 계속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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