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동 - 고문기술자 이근안!! 그는 누구인가?
김근태 지음 / 중원문화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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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영화 <남영동 1985>만 보고 주인공 김종태, 그의 본래 존재인 김근태의 고통을 알았다면 오산일 것이다. 여기 그가 적은 옥중 수기인 <남영동>은 더욱 모질고 잔혹했다. 단순히 영화로 보여주던 고문의 한 자락에서 모든 것을 판단해서는 안 될 정도였다. 나는 이 책을 보고 마지막에 혼자 공포에 떨어야 했다. 사람을 죽이고 파괴하고 송두리째 빼앗아 가는 그 지옥과 같은 상황이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이다.

 

아직도 울분과 분노의 19805월 광주, 예전에 TV에서는 북한의 공작이라고 하더니 어느 순간 북한군이 내려와서 광주시민을 학살했다고 한다. 이런 non-sense 같은 이야기가 아직도 흘러나오는 것이 지금의 우리 사회다. 내가 왜 충격을 받았는가? 이 문구가 너무 잔인하게 들렸다. “광주항쟁은 또 소수의 매판군부독점세력이 민중의 요구를 적대적으로 짓밟고 자신들의 이익실현구조를 필사적으로 방어하는 잔인성을 보여주었다. 위험을 느낀 전두환 친위 세력은 평화적인 시위를 추적, 학살했으며 또 예방진압을 목적으로 집집마다 뒤지며 청년을 붙잡아 구타연행학살했고 심지어 여학생의 유방을 도려내고, 임산부의 배까지 가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정말 그들이 폭도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냉정하게 생각해보자. 어느 편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응징의 폭력을 가해야 하는 대상이 단순히 건장한 남성이라면 이해가 간다. 그러나 여학생들 그 아직 어리고 몸도 가늘고 꿈 많은 소녀들의 가슴에 총검을 들이대는 것도 모자라 그 아이들의 유방을 도려냈다니 말이다. 게다가 임산부의 배를 가르다니 말이다. 이것은 과거 일본 731부대에서 인체실험 대상인 마루타에게 하는 행동과 거의 다름없는 학살극이다. 전쟁이었더라도 민간인에 대한 학살은 분명 불법이고,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는 대상에 대한 폭력은 악마의 짓거리다.

 

우리의 폭력의 시기에 <남영동>의 수기는 단순히 김근태만의 이야기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최근 검찰의 비리와 정치, 기업, 권력에 결타하여 언론에 문제되든 일들이 보인다. 이들은 불과 20년 전만 해도 폭력으로 죄 없는 사람들을 패고 때리고 짓밟고 마지막에 사형 내지 평생을 정신병원에서 광기에 빠져 살도록 하였다. 법이란 무엇인가? 법은 인간이 인간됨을 위해 존재하는 하나의 제도적인 방어선이다. 하지만 그 방어선은 어떤 인간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권력이 있는가? 없는가?

 

고문으로 자백 받은 증거는 분명히 불법이고, 법적 효력을 부여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검찰과 판사는 그 거짓 증거를 받아 자신들의 정의를 실현했다. 정의란 무엇인가? 라는 이 단어에서 정의란 단지 그 사회에서 통용되는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권력이 하나의 도덕적인 교조주의로 통용되는 것이 정의일 뿐이다. 그래서 정의란 윤리가 없는 하나의 위선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 정의 아래 김근태를 고문을 받는다.

 

물고문, 전기고문, 굶주림, 추위, 수면의 박탈, 외로움 등으로 그의 고문의 이야기는 마치 소설과 같다. 정말 이것이 소설이라면 좋겠다. 이런 일들이 어느 고문서에서 등장할 만한 중세유럽의 마녀사냥 이야기로 끝냈으면 좋겠다. 안타깝게도 이것은 개인의 이야기고 사실이고 그 당시 존재했던 사람 모두 실존인물이다. 살이 타들어가고 입술이 바짝 말라가며, 추운 가을밤에 추위에 벌벌 떠는데 거기에 물을 뿌려 고문하여 땀이 베여 나올 정도라니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문제는 그런 고문을 하는 존재조차 하나의 인간이었다. 나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아이히만이란 소장에 대해 당시 연합군은 악마의 탈을 쓴 인간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평범했고, 가족에게 다정하고 이웃과 잘 지내던 남자였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끔찍하고 잔인한 일을 할까? 물론 아우슈비치 수용소처럼 독가스를 날리지 않으나, 차라리 독가스가 낳을지도 몰랐다. 인간의 죽음으로 그 고통을 모두 끝낼 수 있다며, 그 충격으로 죽을 때까지 두려움에 고통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더 무서운 것은 그런 억지로 끌려온 사람이 죄가 없음을 알고, 알리바이가 있음을 알아도 소설로 만들어 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소설의 창작력은 지독한 고문이고, 그 고문의 성과품은 새로운 소설이다. 이것은 재판의 증거이고, 그 재판과 소설은 사회에서 방송과 신문으로 다시 재생산되어 간다. 진실은 아득한 저 안개 너머로 사라지고, 어둠의 거짓이 우리의 마음을 불안과 증오 그리고 불신으로 이어지게 한다.

 

김근태의 고뇌는 여기서 보인다. 우리 인간은 겉으로는 언제나 바른 말 옳은 말하면서 다른 상대를 비판이 아닌 비난을 한다. 정작 그 상황이 되면 자신은 어떻게 될까? 우리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김근태의 고문에 대한 공포와 절망에서 더 큰 공포와 절망은 바로 우리 인간 자신의 이중성이었다. 자신을 고문하는 사람들이 세상만사에 대해 고민한다. 월급이 적거나, 자식이 공부가 잘되는지, 자기가 좋아하는 많은 것들에 대해 말이다. 김근태가 민주주의를 위해 활동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고문하던 사람들처럼 일상적인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도리어 그것이 자신을 폭행하고 억압하던 수단이 되었다. 김근태를 고문하는 자도 어쩔 수 없이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해야만 하는 관료주의의 인형이었다. 그들의 이중적인 가치관에 김근태도 나도 흔들린다. 자신에게 고문을 가하는 경관에게 이제는 고문 받는 것이 습관화되었다라고 할 정도로 고문은 받는 자와 가한 자 모두 정신을 파괴했다. 영화 <남영동 1985>에서 나온 말이 이 책에서 나온다.

 

고문을 전담하던 한 경관이 김근태의 손을 잡고 말한다. “고문을 하는 것을 보고 구역질이 났다. 여기서 빨리 나가라. 허위라도 다 인정해라, 여기 있으면 당신은 죽는다라고 그는 눈물을 흘리며 사정했다. 인간의 인간성이 파괴되는 것이 여기서 드러난다. 만약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 고문기술자가 김근태에게 한 말이 인상적이다. “장의사 사업이 이제야 제 철을 만났다. 이재문이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느냐. 속으로 부서져서 병사를 했다. 너도 각오해라. 지금은 네가 당하고 민주화가 되면 내가 그 고문대 위에서 서 줄 테니까, 그때 네가 복수를 해라.”

 

상당히 비웃음이 섞인 얼굴로 김근태의 면전에 날렸을 연설이었다. 복수의 날도 네가 이길 날도 오지 않는다는 디스토피아의 세계관, 우리에게 유토피아란 없다. 단지 그것을 위해서 끊임 이 나갈 뿐이다. 그러나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의 고문을 듣고, 그의 고문 후에 감옥살이에서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못 본채 갇혀 있음에 인간의 권리는 어디 있는가? 라고 반문한다. 온 몸이 망신창이가 되어도 밥 한술 제대로 못 먹고, 추워도 움직일 수 없어 그대로 주저해야 하며, 억울한 자신의 처지에 호소하느냐 까지 말이다.

 

더 분노하게 만든 것은 그에 대한 검찰과 재판의 행동이다. 그들은 법조인의 양심을 버린 채 그저 시대의 흐름 즉 권력의 흐름에 충실했다. 그리고 계속 그 자리를 유지하며, 변호사로 개업하여 지금도 성공한 사람처럼 우리 주변에 숨 쉬고 있을 것이다. 바른 말을 하고 옳은 행동을 하는 게 진실한 삶을 살아온 것일까? 이런 책들을 보면 내 인생 가치관에서 혼란이 온다. 내가 바라는 것은 맑은 공기 아래 산책을 하며, 예술과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간의 이야기로 통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폭력이 아니라 미덕으로서 세상에 고통 받는 사람 없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그런 세상을 위해 조금이라도 노력하는 것이 비웃음을 받고 폭력과 억압으로 다스릴 대상이라면 무엇이 인간에게 진실한 가치라 호도될 수 있는가? 인간이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는 타인에게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고 한다. 그래야 서로 간의 차이가 없이 균형을 맞추어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어릴 적에 부모님과 주변 어른들에게 말 잘 못하면 끌려간다. 병신이 된다. 인생 망친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초등학교부터 중학교까지 그런 이야기를 은연 중에 들었다. 철없는 어린 녀석이 무엇을 이해할까? 싶겠지만 생각하면 이가 떨릴 정도로 무섭다.

 

이런 무서운 이야기를 담고 있는 <남영동>은 다시 나오면 안 될 서적이나, 항상 우리가 봐야할 서적일 것이다. 다시는 이런 일들이 오지 않게 폭력과 고문이 마치 정당한 관례로 되지 않기 위해서다. 이 수기를 적은 자는 고문 후유증으로 결국 201112월에 눈을 감았다. 최근에 그가 고문을 당하지 않았고 이근안이 옳았다는 미친 소리에 망자를 2번 죽이는 일들이 생긴다. 고문을 하지 않았다면 이근안이 왜 옳았는가? 라는 논리적인 이야기를 해도 소통과 대화를 거부한 이들에겐 그저 부정하고 싶은 일들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순간 그들 역시 삶을 부정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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