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스피에르 : 덕치와 공포정치 레볼루션 시리즈 2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 지음, 슬라보예 지젝 서문, 배기현 옮김 / 프레시안북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로베스피에르, 그의 이름은 프랑스혁명 이후 폭력적이고 냉혹한 공포정치의 선두주자였다. 특히 그의 곁에는 생 쥐스트라는 과격한 혁명사도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과연 그는 잔인하고 냉정한 혁명의 공포정치가이었는가? <당통의 죽음>에서 당통이란 인물은 같은 자코뱅당 소속이고 프랑스혁명에 따른 혁명정부의 위원이었다. 그는 라이벌과 같은 로베스피에르와 친분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결국 서로 간의 뜻을 달리했다. 당통은 자신이 죽으면서 언젠가 프랑스혁명의 위대한 자유는 무너지고, 자신에게 단두대의 키스를 주던 자 역시 죽음의 신과 마주보리라고 한다. 과연 그의 예언대로 로베스피에르는 테르미도르 반동과 함께 단두대 아래에서 하데스의 궁전에 초청받았다.

 

그렇게 악명 높은 로베스피에르라고 해도, 그는 분명 프랑스혁명의 위대한 영웅이었다. 사실 영웅과 반역자의 차이는 종이 한 장의 사이다. 어떤 상황과 분위기가 조성되느냐에 따라 다르다. 로베스피에르가 과연 처음부터 공포정치가 목적이었는가에 대해 생각해보면 조금 유달리 판단해야 한다. 그는 처음부터 민주주의를 원했고, 공화주의 이념을 실천하려고 했으며, 각종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문제는 그것은 개인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로베스피에르가 혁명정부 초기에 그의 연설을 본다면 지금 대통령선거가 보이는 2012년의 한국과 아니 본래 로베스피에르가 태어나고 죽은 예술도시 파리가 있는 프랑스의 대통령 선거에서도 심지어 그 어떤 국가에서 열리는 선거에서 로베스피에르의 연설을 얼마나 따라갈 수 있을까?

 

프랑스혁명에 대해 알아보고, 루소에 대해 알아보면서 루소의 사상이 그대로 직결된 프랑스혁명에서 당통과 로베스피에르는 반드시 한 번은 보고가야 할 사람이다. 모두 단두대 아래 죽음의 여신과 키스를 나누었으나, 그들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생각해야 한다. 이 책의 후면에 이런 문구가 인상 깊다. “개혁 없는 혁명은 곧 어리석음이다! 공포 없는 덕의 무력함을 연설한 혁명의 산증인, 로베스피에르”, 그의 연설문이 뒤에 나와 있다. “평상시에 인문정부를 움직이는 동인이 미덕이라면, 혁명의 시기에 그 동인은 미덕과 공포 모두입니다. 덕이 없는 공포는 재난을 부르고, 공포가 없는 덕은 무력합니다.”

 

민주주의사회에서 공포의 테러리즘은 그 혁명의 근원이고 종점이다. 덕이 있는 공포라는 것은 결국 폭력이란 수단이 정치적 발전과 동시에 퇴락을 일으킨다. 로베스피에르가 루이왕정 붕괴 후에 루이의 목을 효수하려한 이유는 그의 사회계약에 대한 믿음이다. 루소는 그 나라의 사람이라면 사회계약적으로 합의해야 하며, 거기에 대하여 거부하거나 위협할 존재는 그 사회의 일원으로 여기지 않았다. 루이는 앙시앵레짐이란 구체제의 산물이고, 로베스피에르는 구체제가 아니라 신체제 혁명 이후 공화정의 프랑스사람이다.

 

루이는 공화정의 사회계약적인 인간이 아니고, 그 공화정의 존재자체를 부정하는 존재로서 낙인찍혔다. 그의 절대적이고 강력한 믿음은 루이를 기요틴 아래 보냈다. 그러나 그의 선택이 과연 옳았는지 지금도 제기된다. 적어도 미국독립을 선구해온 토마스 페인은 루이의 죽음을 원하지 않았다. 그런 재판 없는 사형선고는 인간이 누리는 인권에 대해 모순적이었다. 인권을 위해 일어난 프랑스혁명, 그리고 그 인권의 탄압의 근본이 되던 군주정, 정의의 기준은 결국 그 시대적 흐름과 가치에 요동칠 수밖에 없다.

 

루이의 경우 토크빌의 <구체제와 프랑스혁명>에서 마음이 연약하고, 상대방을 헤치기 싫어한 군주였다. 그런 심약한 군주가 백성의 슬픔을 외면하지 않으려 했으나 당시 관료들의 반대와 귀족들의 득세, 신흥세력 부르주아는 이권과 권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 만큼 그들은 단두대의 세례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그런 제도적 문제를 해결하려한 로베스피에르는 결국 그 제도에 대한 반역에서 자신도 죽음을 맞이한다. 그의 연설은 장문이다. 그의 진실함은 자기만의 진심에서 모두에게 공감과 부담이 되었다. 테르미도르 반동이 시작하던 그 전날까지 연설하고, 그 당일에 붙잡혀, 다음 날에 몸에서 목이 분리되었다.

 

자기 동료들마저도 불화로 같은 무덤을 가게 된 로베스피에르를 연설로 통해 만나보니, 그는 위대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위대하다고 다 옳은 것이 아니다. 옳은 행동에 대한 의지에서 그 역시 많이 앞을 막혔다. 자유를 원하려면 자신의 자유보다 남의 자유가 중요한 것처럼, 로베스피에르는 자국민의 자유뿐만 아니라 세계민들의 자유를 원했다. 만약 우리가 자유가 있고, 상대국가에서 없다면 다른 국가에서 자유국가를 침범하려기 하기 때문이다. 또한 경제적 부분이었다. 당시 프랑스는 부르주아 신흥세력들이 성장할 시기고, 프랑스혁명의 실패는 부르주아 혁명이란 이유도 있었다.

 

로베스피에르의 강연에서 그는 이미 복지국가의 틀을 원했다. 프랑스혁명 자체에 인권의 중요성은 가난하고 의지할 곳 없는 자의 인간적 생활 부여다. 천부인권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배고픔과 추위에 쓰러지는 사람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1792122일 로베스피에르가 프랑스 파리에서 연설한 내용은 220년이 지난 우리나라에서도 정말 잘 통용되는 내용이다. 그 내용을 보면

 

사회의 으뜸가는 목표가 무엇입니까? 바로 인간의 불가침 권리를 지켜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권리 중 으뜸가는 권리는 무엇입니까? 바로 생존할 수 있는 권리겠지요.

그러므로 사회법의 으뜸이라면 사회 구성원 전부에게 생존의 수단을 보장하는 것일 테지요. 이 법은 다른 모든 법 위에 존재합니다. 재산도 사실 이법을 견고히 하기 위해 제도적으로 보장되는 것입니다. , 사람이 재산을 소요하는 것은 우선적으로 생존하기 위해서라는 거죠. 재산이 인간의 생존권에 위배된다는 주장은 옳지 않습니다.

사라에게 필요한 식량은 사람의 생존 저채만큼이나 신성한 것입니다. 삶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것들은 모두 전체 사회의 공유 재산입니다. 영여분만이 개인의 재산이 될 수 있으며, 상인이 장사의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제가 동료의 목숨을 희생하면서까지 상업적인 투기를 감행한다면, 그건 결코 거래가 아닙니다. 그것은 약탈이고, 형제들에 대한 살해입니다

 

먹는 것, 자는 것, 입는 것 인간의 의식주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하지만 인간은 동물적 신체기관을 가지므로 먹지 않으면 죽는다. 굶어죽는 자들이 넘치고, 가난으로 고통 받는 사회는 이미 잘못된 사회다. 로베스피에르는 루소의 사상 중에서 시민들이 옳지 않은 정치를 하는 정치가들은 시민들에 의해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혁명 이전에 프랑스에서는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판매 금지된 불온도서였다. 그리고 로베스피에르의 연설에서 사회계약이란 단어가 자주 나오며, 어떤 어른이란 말이 나온다. 당연히 루소일 것이다.

 

평화적으로 살기 위해 평화롭지 못한 수단이 유일한 방법이었고, 그 평화를 지키기 위해 평화롭지 못한 방법이 수단이 되어버린 로베스피에르의 모순 속에 우리는 오늘날의 민주주의를 어떻게 봐야 하는 것일까?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면서 한편으로 국가적 합의도 중시했다. 그런 점에서 루소가 생각한 민주주의 개념에서 국민의 성숙도에 따라 그 사회의 민주주의적 성장이 다를 수밖에 없다. 루소의 자서전 중에서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을 읽으면 루소가 얼마나 프랑스인에게 조롱받고, 파리에서 그는 얼마나 외로웠는지 알 수 있다.

 

그의 서적에 프랑스인들은 지적이거나 윤리적인 사람보다, 오히려 감정적이고 이기적인 존재로 비추어진다. 그런 자들이 로베스피에르의 연설에서 대단히 이성적이고 옳은 사람들로 표현된다. 그런 상황에서 이 책의 서문을 적은 신영복 교수와 세계적 지식인인 슬라보에 지젝의 글을 보면 다시금 우리는 로베스피에르를 생각해봐야 한다. 신영복 교수 역시 지난 세월 파시즘의 시대에서 고생했고, 지젝의 경우도 냉전의 시대에 큰 역사의 순간을 맞이한 인물이다. 특히 지젝의 서문에서 나는 이 책이 로베스피에르가 연설한 것을 모운 도서인지 아니면 지젝의 프랑스혁명과 정치적 판단을 제시한 도서인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지젝의 긴 서문에서 정치적 민주주의는 폭력과 희생 아래 이루어진 산물이란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단지 프랑스혁명은 주로 지도층과 유명 인사들의 죽음이 토대라면, 우리나라는 일반 국민들이 많이 희생된 점에서 아쉬울 뿐이다. 우리 인간은 이성을 중시한다. 그러나 나는 인간에게 이성이 주어질 뿐, 결코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젝이 칸트의 윤리학을 언급하면서 이성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고, 직관 없는 이성은 공허하다는 왠지 모르게 공감이 없는 소통은 의미 없는 행동인 것처럼 느낀다. 공감은 상대방에 대한 입장과 표현을 충분히 이해하고 느끼는 점이다. 레비나스가 추구하는 타자의 윤리학에서 우리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건강한지 의문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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