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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세스 바리 - 제2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박정윤 지음 / 다산책방 / 2012년 10월
평점 :
삶의 욕망인 에로스와 그리고 죽음의 욕망인 타나토스, 이 갈림길에서 우리의 인생은 욕망에 의해 살아간다. 그런데 만약 죽음과 삶에 대한 욕망을 상실한 채 살아가야 하는 입장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가끔 나는 그런 생각을 해본다. 살고 싶어도 제대로 살맛이 안나고,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거나 혹은 죽지 못하게 만드는 세상을 말이다. 때에 따라서는 만약 어느 사람이 자신의 처지를 비통하게 여길 때 죽음을 선택하는 욕망조차도 두려움으로 가득하여 실행하지 못하는 경우는 어떻게 보는 것일까?
우리의 주변은 언제나 밝은 부분만 보고 어두운 부분을 보지 않으려고 한다. 진실은 언제나 아름다운 존재보다는 차라리 추하고 괴롭고 지루한 것에 가깝다. 진리라는 진실은 언제나 화려하고 웅장한 거짓이 하나의 사실로 감추어 버린다. 아마 신화라는 것도 그렇다. 제목만큼이나 <프린세스 바리>라고 하여 우리 한국 전통 무속신화 중의 하나인 ‘바리데기’를 떠오를 것이나, 그렇게 바리데기처럼 결말은 행복하지 않았다. 물론 바리데기에서 바리공주가 마지막에 부모님을 구하는 약을 구한 후에 신으로 봉해질망정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서사라는 거대한 운명 앞에서 바리공주의 희생을 강요했다.
아니 그 강요로 인해 받아들이는 바리공주의 행동조차도 하나의 정당성으로 간주해야 했다. 주체적인 존재로서 희생자의 고통은 미화되었다는 사실이다. 아름다운 효녀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으나, 그 서사 너머의 희생제의란 쉽게 말할 수 없는 대가가 존재했다는 점이다. 그 모든 대가에 대해 최대수혜자는 그저 강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강요로 부탁했고, 모든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못 본 척 외면한 것이다. 신화라는 것은 결국 내가 하기 싫은 일을 누가 해주면 좋겠고,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누가 알아주면 좋겠다는 이중성의 세계이다.
현실적인 것을 현실적으로 말하지 못하고 비현실적으로 이야기해야 하고, 오히려 비현실적인 신화가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바로 그런 연유다. 그런 신화성이 <프린세스 바리>에서는 전반적으로 탈신화를 한다. 그것은 신화의 제의에서 어느 대상 특히 여자아이에 대한 희생에 대한 정당성과 그 희생으로 통해 얻어지는 하나의 보상이다. 남근주의 세상이던 한국사회에서 신화를 보면 여자의 희생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프린세스 바리>는 그 희생에 대한 정당성은 유효해도 그 희생에 대한 보상은 일체 없었다는 뜻이다. 게다가 희생 후의 보상이 삶과 죽음을 다스리는 신관이란 점에서 분명 바리공주의 신직은 에로스와 타나토스라는 삶과 죽음의 욕망 중에서 그 욕망을 제외한 부분을 관장했다는 점이다. <프린세스 바리>의 최바리는 그녀에게 보상이 없는 것은 지독한 가난과 문맹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녀에겐 바리공주처럼 무장승이란 아주 신출 난 남편을 얻지 못했으며, 겨우 혼인신고식을 올린 남편 청하는 굴뚝청소부로 굴뚝 안에서 일을 하다가 굴뚝이 붕괴되어 석화되었다.
게다가 아이도 청하의 아이가 아니었다. 바리는 청하와 사랑을 나누면서 그에게 자신을 좀 더 만져달라고 요구했으나, 청하는 그러고 싶으나 출근해야 하는 이유로 아기씨앗만 먼저 바리에게 주고 출근했다. 그와의 사랑을 나눈 후에 옆방 친구인 나나진과 대화하면서 나나진은 바리가 처음 자본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그것은 바리가 자신을 기른 산파 할매가 죽고 난 뒤에 토끼 할머니의 권유로 친부모를 찾아가면서부터 일어난 사건이다. 그녀는 아직 초등교육과정을 밟지 못하였고, 집 근처 외에는 가본 적이 없었다.
세상물정을 전혀 모르던 바리는 화물차가 모이는 곳에 가서 태백에 태워달라는 부탁과 함께 어느 아저씨의 트럭에 타게 된다. 어두운 길을 달리면서 어느 휴게소에서 밥을 먹은 후에 잠이 곤히 들었고, 트럭기사는 잠든 바리에게 수면제를 먹였으며, 잠든 바리의 몸을 덮친 것이다. 임산부가 된 바리가 청하도 없이 병원에 찾아가서 검사받지만, 병원에서 아이가 아버지를 닮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청하의 마지막 핏줄까지 놓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청하의 아이를 갖고 싶던 바리에게 그 사실을 몰랐다는 사실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만약 그랬다면 청하의 죽음을 보고도 삶의 욕망을 뱃속의 아이에게 찾았으니 말이다. 만약 아이가 청하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바리는 자기가 이때까지 바리공주가 했던 일의 일부를 자신 스스로 겨누게 되리라는 것을 말이다. 바리는 배운 것도 없고, 산파 할매가 무리하게 바리의 어머니에게서 속여가면서 빼앗은 아이이기에 바리에게 문맹 상태로 키웠으며, 게다가 호적조차 올리지 않았다. 바리의 호적이 올라간 것은 산파 할매의 죽음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이다.
그리고 사랑의 보상인가 아니면 바리의 도덕적 판단을 할 수 있는 지식이 없었는지, 산파 할매는 바리의 손아래 죽었다. 물론 바리가 일부러 살인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산파 할매가 죽음을 선택하고 싶었으나, 그 죽음의 용기를 바리에게서 찾은 것이다. 온 몸이 암으로 가득찬 산파 할매는 약초를 잘 다루었으나, 약초내성으로 한방이 듣지 않고 양방으로 처방이 가능하나 돈이 없어서 더 이상 암을 치료할 수 없었다. 죽을 것만 같은 고통, 바리의 결혼을 볼 수 없는 삶에 대한 아쉬움, 그렇다면 그 고통과 에로스의 욕망을 에로스의 대상에게서 타나토스라는 욕망으로 전이시킨 것이다.
독초로 이루어진 욕탕 물에서 고통스런 죽음을 선택한 산파 할매였으나, 마음만은 고통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서 바리의 바리공주가 아닌 바리공주 일이 시작된다. 사는 것에 낙이 없는 사람들,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사람들을 저승으로 인도한다. 바리가 아주 좋아했던 연슬 언니, 그녀의 죽음은 매우 비참했다. 그 동네는 유리방이라고 있었고, 그 유리방에 유리가 살았다. 유리들은 바리의 친구 나나진이 만들어진 망사스타킹이나 야한 드레스를 입고 가랑이를 벌리며 살아가고 있었다.
연슬은 그곳의 유리였고, 그녀는 자신의 힘든 몸을 뒤로 한 채 동생들의 살림을 돌보았다. 하지만 그녀도 지쳤고, 자살기도를 위해 기름으로 유리방이 있는 집을 태우려 했으나 실패하고 대신 얼굴에 화상자국만 남겼다. 그녀는 엄청난 학대와 얼굴이 망가진 이유로 가족에게 버림을 받았다. 살아도 살아 있지 못한 호모 사케르 같은 존재였다. 그런 연슬에게 바리는 대신 내가 죽여줄까? 라고 묻는다.
친구도 없이 가족들에게 버림받은 외톨이인 연슬에게 더 이상 삶의 희망을 찾아볼 수 없고, 죽는 것마저도 외로워서 죽지 못했다. 자기가 죽으면 누가 나를 생각해주고 슬퍼해주고 알아줄 수 있냐고 말이다. 그런 연슬에게 바리는 입에 독약을 넣어 그녀를 저승으로 인도한다. 죽은 후에라도 그녀의 얼굴을 다시 화장해주고, 흐트러진 옷을 다시 정돈해주던 바리의 손길에서 삶과 죽음에서 인간에게 의미 없는 삶과 그런 삶에서 죽지 못해 살아가는 비참함을 어떻게 보는 것일까?
바리는 이 2사람 말고도 2사람을 더 저승으로 인도하고, 마지막에는 정신강박증으로 괴로워하던 토끼 할매까지도 저승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마음속으로 기대한다. 어떻게 보면 남의 사주를 받던 혹은 당사자의 사주를 하던 사람을 안락사 내지 유도살인을 하는 것은 명백한 범죄다. 그러나 그 범죄는 도덕적, 문화적이라는 법률적인 부분에서는 인정되나, 윤리적으로 과연 범죄일 수 있을까라는 점이다. 최근에는 논란이 되던 안락사도 서로간의 논쟁으로 갈팡질팡하나, 막상 그 죽음을 원하거나 죽음이 최후의 수단이고, 최고의 평화인 절망으로 가득한 사람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오히려 그들에게 죽음을 당당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저승사자의 역할을 하는 바리에게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일까? 이것이 문학소설이란 장르는 분명하고 기존의 신화적 영역에서 탈신화하여 다시 새롭게 신화로서 만들어진 서사라는 것도 분명하다. 하지만 삶의 억압에서 죽음으로 향하는 해방조차 욕망할 수 없다면 누가 그것을 대신 이루어줄 수 있는가? <프린세스 바리>는 당연한 윤리의식을 내포하나 도덕적, 문화적 의식에선 거론할 수 없는 욕망을 숨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