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역사 - 최초의 아내 이브부터 <인형의 집> 노라까지, 역사 속 아내들의 은밀한 내면 읽기
매릴린 옐롬 지음, 이호영 옮김 / 책과함께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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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매릴린 옐롬의 <유방의 역사>라는 책을 본 적이 있었다. 당시 저자는 스탠포드 대학 연구소의 부소장으로 연구했다는 점과 그 이전에 불어와 비교문학교수로서 활동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캘리포니아에서 남편과 함께 살아가는데, 슬하에 네 명의 자녀가 있다는 점이다. 그런 이후에 이번 재 발간된 <아내의 역사>는 아내라는 존재에 통해 여자와 남자의 관계이다. 이 책을 보면서 생각한 점은 매릴린 옐롬이란 학자가 탁월한 페미니스트 인문학자라는 확실하나, 여전히 그녀는 서구사회의 발에만 물들여 있다는 점이 한계였다.

 

이 모든 역사적인 관점에서 차례대로 흐름을 간파한 책 내용에서 성경에서 등장하는 아담과 이브의 신화부터 그리스로마시대, 중세유럽과 아메리카 대장정기, 격변의 19~20세기를 다룬 점에서 모든 것이 서구중심이란 점이다. 아내의 역사라는 말처럼 아내의 역사는 서구사회의 아내를 다룬 것이다. 따라서 모든 인류의 아내를 다룬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한편 다르게 생각해본다면 오리엔탈리즘으로 입각한 서구중심문명이라고 해도, 그것에 우리는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다.

 

거기에 파생된 문화나 가치나 삶의 양식이 현재 많은 나라에서 통용되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책을 그런 문화를 지닌 국가에 대해 적용해보는 것이 좋으며, 그 문명을 따르지 않거나 혹은 일부 들인 나라는 이 책을 보고 왜 그럴까? 라고 판단해 보는 것이 좋은 것 같다. 왜냐하면 문화인류학 관련 도서를 보면 인류의 역사가 남성 중심이 아니라 오히려 모계중심사회도 존재하고, 매릴린 옐롬의 시선과 많이 다른 점도 있다. 일부다처제가 아니라 일처다부제도 확실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가령 마빈 해리스의 서적들을 보자면 그런 문제들을 잘 나타내어 주었고, <아내의 역사> 마지막 끝 부분이 20세기(1950~1999)와 2000년을 담론하기 때문에 마빈 해리스의 <아무것도 되는게 없어>와 같이 봐주는 것도 좋다. 과거의 문제는 둘째 치더라도 우리 인간은 오늘날의 현실과 미래를 생각해보기 위해 과거를 돌아보는 이유이서이다. 그런 관점에서 매릴린 옐롬의 입장에서 여성의 경제적 활동참여는 여성의 인권상승과 더불어 2차 세계대전 및 각종 전쟁으로 남자들이 군에 차출되면서 남은 여성들이 사회 전반의 노동인구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이와 다르게 마빈 해리스는 그런 점도 있지만, 더욱 중요한 사실은 19~20세기의 미국 노동자들이 근로하면서 받은 임금이 매우 부족한 것을 주목한다. 결국 남자 1명에서 벌어들인 월급으로 집안 가계운영을 충분히 지원할 수 없기에 여성들이 근로했다는 점이다. 입장과 관점에서 다르나, 여성학자와 문화인류학자가 추구하는 미국경제와 남녀평등문제의 요지는 상당히 다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매우 중요한 사실은 여성이 사회적인 참여권이 올라가고, 남자와 더불어 그 노동시장과 지식시장에서 매우 높은 자리를 차지했다.

 

이제는 과거와 같이 편협한 사고로만 여성들을 대해 줄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글을 적는 남성의 입장에서 여성이란 존재는 언제가 배우자로 삼아야할 하나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우리 사회나 이 책을 적은 미국에서 남녀 간의 문제나 부부간의 문제는 피할 수 없는 숙제이다. 적어도 여자가 왜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가에서 마르크스의 주장처럼 인간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은 노동이란 것도 있지만, 한편으로 고물가의 행진에서 치열한 현실을 살아야 하는 보통 사람의 모습도 그러하다. <아내의 역사>에서도 고학력을 소유한 여성이 남편이 고학력과 고임금을 소유하면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오히려 능력 있는 남편으로 하여금 자신의 능력을 증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다고 하여 다 그런 것만은 아니다. 미국 총리 토니 블레어의 아내인 체리 블레어는 노동법률 전문가로 유명한 여성이고,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아내 힐러리 여사 또한 상당한 능력을 갖춘 정치인이다. 어떻게 하여 여성이 남성과 같이 조우하여 자신의 인생과 동반자의 인생, 그리고 그들이 만든 생명까지 책임을 질 수 있는가이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권은 남녀 간의 사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상대방과 우정, 대의, 의견 등의 공감대라는 점이다. 물론 성적행위도 중요하나,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가치관은 무시하지 못할 점이다.

 

성적행위에 대해 조금 생각해보면 어느 아내는 성적행위를 1주일에 5일 해도 행복하다고 하나, 어느 아내는 1번 이하도 행복하다고 한다. 물론 성적행위는 이 책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룬다. <아내의 역사>라는 타이틀만큼 성적행위는 결국 고대부터는 자식을 남기는 여성의 도구화부터 현대에는 포르노적인 libido의 추구이다. 그렇지만, 1명의 여성이 살아가면서 10명의 자식을 남기는 것을 보면 끔찍하기 짝이 없다. 2년에 1번 임신해서 낳는 그녀들에게 영양실조로 인한 산모사망, 유아들의 사망은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모든 임신문제를 아내에게 떠넘기는 남편의 모습에서 과거에 임신한 채로 논밭에 나가 일을 해야만 했던 우리 할머니 세대들의 사연도 은근히 밀려온다.

 

임신을 피할 수 없어 강제로 피임하거나 유산한 경우를 보면서 아직도 오늘 우리의 모습도 본다. 피임을 하지 못하게 하거나 중절수술을 못하게 하는 모습을 보면서 말이다. 낙태는 어떻게 보면 살인에 가까우나, 순간의 실수로 미혼모로 되어버린 어린 소녀나 원하지 않은 강간으로 아이를 만들어야 할 여성들에게 치명적인 요소다. 가령 미국의 범죄의 하락이 산하제한과 낙태의 효과라는 <괴짜경제학>에서 나온 것처럼, 육아능력의 문제와 태어난 아이에 대한 애정도 결핍은 심각한 범죄양산 재목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지금은 낙태는 어느 정도 통용화하나, <아내의 역사>에서 보는 낙태의 과정은 참으로 절망스럽기도 하다. 20세기 초반 낙태수술을 받고 난 후에 사망한 여성들이 엄청난 점과 억지로 낳아서 힘든 과정을 보낸 사연도 있다. 확실하게 이때까지의 역사에서 성적인 착취를 여성들에게 주어진 것은 분명하고 여성들에겐 성적인 권리를 없다고 한 것은 분명했다. 이 책에서 그런 점을 조금 다르게 만들려고 했다. 여성에게 성적인 쾌감을 느끼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성만큼 있다는 점이고, 그들에게 성적행위로 통해 남편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서로간의 신뢰를 만들 수 있다는 점을 피력했다.

 

지금 한국에서 성적행위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 조심스럽다. 과하게 보인다면 바로 변태로 낙인찍힐 가능성이 높고, 또는 너무 저조하면 호모로 보일 수도 있다. 여전히 한국에서는 여성은 성적피해자이며 그렇게 보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 책을 보면서 내가 느끼는 점은 서양에서 추구해온 <아내의 역사>는 투쟁과 노력이 있는 반면 한국의 여성에게 투쟁과 노력이 부족한 점은 분명해 보인다. 경제적인 관점에서 보면 미국에서 여자가 일을 하고 남자가 일을 하지 못하는 것과 한국에서 여자가 일을 하고 남자가 일을 하지 않은 것의 차이는 엄청나다.

 

한국에서 남편들이 일자리 없이 집에 있는 것만큼 비참하고 슬픈 일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런 남편들에 대해 우리 사회는 용서와 인정이란 미덕은 없다. 과거에 짊어진 여성에 대한 억압과 폐단을 없애가는 것은 맞으나, 그 모든 것들이 남편의 권리를 빼앗아 가는 것만 아니다. 여성들은 남성의 권위를 가져가도 책임의 무게는 가져가지 않은 부류가 많다. 그런다고 해서 전혀 발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주변에 내 지인들의 가정을 보면 부부들 대부분이 맞벌이를 한다. 맞벌이를 하는 이유는 남편의 급료가 부족해서 아내가 일을 할 수밖에 없는 경제적 구조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매릴린 옐롬보단 마빈 해리스의 입장에 동조하는 입장이다.

 

그런다고 하여 <아내의 역사>에 공감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매릴린 옐롬이란 학자를 보면 그의 이상적인 남성철학자는 19세기 영국사상가인 존 스튜어트 밀인 모양이다. 나 역시 예전에 <자유론>을 읽으면서 자유와 인권에 대해 생각했지만, 매릴린 옐롬이 존 스튜어트 밀을 페미니스트 철학자를 인정한 점에서 보자면 말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존 스튜어트 밀은 페미니스트로 보기보단 진정한 자유주의자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는 남녀평등 이외에 흑인을 노예로 삼아 불법적으로나 혹은 비윤리적으로 대해 주는 것을 매우 부당하게 여겼고, 게다가 사회적 범죄자에게 모든 죗값을 보기보단 그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와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못하게 강제적 수단보단 사회적 보장을 주자는 것이다.

 

따라서 페미니즘에 대한 공부를 하게 되면 단순히 남녀 간의 문제만 아니라 노인, 어린이, 청소년, 장애인, 외국인, 범죄자, 동성애자 등과 같은 사회적 약자까지 거론되는 점이다. 물론 이런 문제점에 대해 한국의 인식은 취약하기 짝이 없다. 그래도 모든 인간은 한 사람의 어머니에게 태어나고, 그 어머니는 아내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아내로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아내로서 살아갈 것인지는 여성의 입장이나, 적어도 내가 말하고픈 것은 남편 역시 남편으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남편으로서 살아갈 것인가라는 선택지에서 단순히 이 책을 보면 전반적인 문제가 아니라 그 개개인의 관계가 더욱 중요한 것을 느낀다.

 

인간이 혼자 독신으로 살아가지 않은 이상 어떻게든 인간은 가족이 필요할 것이다. 그 가족이 인간에서 동물이 되든지, 혹은 입양자 내지 동성애자로 오던지 모르나, 적어도 결혼이란 과정으로 통해 가정은 탄생할 것이다. 딱히 이 책의 삶의 가치로 내세우기란 무리라도 어떻게 삶을 살아가는지 좋은 책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과거의 풍습이 지금껏 유지되기 때문이다. 결혼식장에 가면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는 형식이 중세유럽 기독교문화가 우위를 점할 때부터 있었고, 신부는 처음에 혼자 걷는 게 아니라 아버지의 손을 잡은 후에 남편의 손에 주어진다는 점이다. 곧 여자는 아버지의 재산에서 남편의 재산으로 전달되는 하나의 제의적 과정이 아직도 유효한 점이다. 대신 아버지 입장에서 자기 목숨만큼 귀한 딸이 다른 남자의 손에 간다는 점을 생각하면 위장이 모두 뒤집힐 정도로 쓰리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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