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맨과 레비스트로스 - 최협 교수의 인류학 산책
최협 지음 / 풀빛 / 199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인류학에 지속적으로 내가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인류학을 알아가는 것만큼 다양한 학문과 연계되지 않은 영역이 그다지 없기 때문이다. 특히 인류학자들의 글을 보면서 이들이 단순히 1가지 측면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측면이 있다는 점에서 매우 공감을 느낀다. 가령 마빈 해리스란 문화인류학자가 문화유물론에서 레비 스트로스의 구조주의-인류학을 거세게 비판하고 있지만, 적어도 레비 스트로스의 업적은 인정하고, 그가 천재적인 학자라는 것은 분명히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인류학의 영역에서 어떤 학자가 뛰어나고, 어떤 학파가 뛰어나도, 계속 새로운 이론과 새로운 발견을 시도되는 것은 마찬가지고, 그것을 위해서는 과거의 영역과 학문가지 이어가야 한다. 인류학은 인간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인간이라고 하여 철학과 사회과학에서 분명히 다루고 있는 학문이다. 하지만 내가 인류학에 매력을 느끼는 부분은 사회과학 중의 하나로 볼 수 있으면서도 여타 사회과학적인 부분보다 광범위하고 순수과학인 자연과학의 영역도 필요한 점이다.

 

 

레비 스토로스가 자신이 인류학자가 되는 점에서 3가지를 거론했다. 19세기 철학자인 카를 마르크스, 정신분석학을 열어간 지그문트 프로이트, 그리고 지질학이었다. 대부분 인문학자들과 책이나 대화를 보면 많은 정신적 성숙과 담론이 오고가나 자연과학적인 영역에서는 항상 괴리감을 느낀다. 현실속의 있는 그대로에서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통해 볼 수 있겠지만, 공학의 영역에선 한계가 있는 법이다. 인간은 현재를 살아가고 있으나, 그것은 모두 인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미디어라는 가공의 매체뿐만 아니라 실제 우리가 물리·화학·생물학적으로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점이다.

 

 

인류학은 바로 그런 부분들에서 타 사회과학이나 인문학과 차이를 둔다. 물론 철학의 역사에서 순수철학인 즉 형이상학에서 물리학은 하나의 대상이었으나, 그 당시의 과학적 사고가 계속 역사가 흐르면서 틀렸음을 증명하고, 생물학과 의학의 발전은 당시 물리학의 영역을 불용의 경지로 만들었다. 아무튼 인류학은 그런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등 다양한 학문을 결집한 학문이었다. 보통 인류학 하면 사람들은 미개인들을 연구하거나 오래된 유물들을 발굴하는 사람으로 여기나, 실상은 인류학 내의 부분적인 영역이었다.

 

 

인류학은 고대부터 시작하여 현재까지 앞으로 미래까지 넘나본다. 이 책의 저자인 최협이란 인류학자의 눈에 비추어진 현실과 한국의 현실에서 미래를 위한 담론으로 이어진다. 내가 인류학에 매력을 느끼는 것은 과거의 일들이 지난 일보단 오늘날에도 유효한 인자이고 처해진 하나의 상황이란 점이다. 바로 그로써 우리가 어떤 현실에 직면한지 앞으로 어떤 생활을 해야 하는지 하나의 의문점을 던진다. 인류학자들의 서적들을 보면 느끼지만, 그들에겐 항상 철학과 사회과학이 바탕이 되어 있다. 자연과학에서 그중 생물학에서 인간은 특수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개구리해부도나 인체해부도 그림과 사진을 보면서 인간 역시 동물 중에 하나일 뿐이다. 단지 이성 활동을 하기에 뇌가 유달리 발달되어 있다는 점이고, 화학을 본다면 개구리나 인간에게 강산을 투여하면 모두 단백질이 녹아 사망할 수 있는 위기에 봉착하는 점까지 그렇다. 그런다고 하여 개구리가 인간보다 우월하고 동등하다고 볼 수 없지만, 적어도 동물이라는 같은 성질은 내재하고 있다. 게다가 환경공학적으로 보면 공학적인 경제성도 따지겠지만, 환경적인 영역의 눈으로 관찰하면 인간이 자연에 비해 위대하다고 여기고, 무질서하게 자연을 파괴하고 훼손하는 것만큼 한심하고 멍청한 짓들은 없을 것이다.

 

 

결국 오늘날 일어나는 자연재해와 인간 사이의 분쟁은 인간이 지혜롭다고 자부함이 오히려 더 멍청하고 한심한 자들이라고 인정하는 것으로 여길 수밖에 없다. 지금 책을 읽은 후 서평을 적는 와중에 한여름의 무더위가 나를 무척이나 괴롭힌다. 왜 이렇게도 나를 괴롭게 만들까? 분명 내가 어린 시절에는 이 정도까지 아니었다. 선풍기 미풍으로 설정해도 시원하고 쾌적했다. 잠 잘 때도 선풍기 회전으로 타이머 설정해도 더운 여름의 밤은 새벽의 문을 걸터앉으면 편안한 잠자리였다.

 

 

당연히 이 원인은 지구환경의 파괴이고, 생태계의 부작용이다. 해마다 지구의 온도는 상승하고, 북극의 얼음이 녹기 시작한다. 지구의 온도가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실제 북극의 눈들이 녹아도 우리가 직접 볼 수 없음에 별세상으로 보인다(그러나 망할 인간들은 그것에 대한 심각성을 무시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내가 땀이 등줄기를 가로 지를 정도로 더운 것과 밤에 열대야로 잠 못 든 밤과 도시의 열섬, 해수욕장에 비키니를 입고 즐기려는 여성들에게 아쉽게도 해파리의 위험까지도 다 환경오염이 문제다.

 

 

인류학에서 특히 내가 좋아하는 문화인류학에서는 이런 점들을 잘 다루어준다. 마빈 해리스의 <문화유물론>에서 착취, 억압, 폭력이란 인간의 더러운 행위 3가지를 밝혀주는 것에서 이기적인 인간들은 그 대상을 초반에 자연을 목표로 했다. 결국 자연의 재원이란 바닥이 있고, 그 화살은 다른 인간으로 향한다. 레비 스트로스가 자신이 2차 대전의 악몽으로부터 시작하여 인류학자로서 남미탐방을 한 내용을 정리한 <슬픈 열대>에서 서구사회의 이기적인 문화우월의식이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그 문화마저 파괴시킨 것과 자연에 순응하며 지구에 피해를 주지 않은 그들이 오히려 문명인이라고 떠들면서 지구를 병에 앓게 하는 자보단 훨씬 더 낳을지도 모른다.

 

 

이 서평의 제목이 <부시맨과 레비 스트로스>인 것처럼 저자 역시 원시사회를 야만적 내지 미개적이라고 부르는 것조차 현대인의 편견이고, “레비 스트로스는 역사의 발전이 인간사회를 더 좋은 상태로 인도할 것이라는 환상을 거부함과 동시에, 실존주의자 같이 가정하는 인간의 자율성을 과대평가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현대사회에서 인간이 역사적 진보라는 환상 속에서 노예적인 구속을 감수하는 현실로부터 해방될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예전에 레비 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를 읽으면서 레비 스트로스가 프랑스 지성 중의 하나이며, 실존주의 철학자인 장 폴 사르트르와 논쟁을 하여 승리했다는 글을 보았다. 인간의 이성을 절대적으로 볼 수 있는 것도 좋으나, 그 이성은 절대적이지 못했다. 그동안 서구사회가 이성이 원주민들에 대한 폭력과 문화의 파괴는 실상 심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류학의 영역은 새로운 사상과 철학에 조우하는 점에서 특이하게 보였다.

 

 

구조주의-인류학이라고 해도 레비 스트로스는 구조주의의 선구자였다. 그런데, 후기구조주의에 포함된 자크 데리다나 리오타르의 이름이 여기서 거론됨도 신기했다. 포스트모더니즘 인류학의 도래도 있다는 점이다. 가령 우리가 보는 서적들은 대부분 전문가가 적고, 그 대상자는 전문가가 아닌 단순히 관찰자다. 그들의 관찰로 통해 모든 것을 알 수 있는가라는 의문과 동시에 관찰자의 입장을 명확히 들어봐야 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점이다. 물론 어떻게 보면 마빈 해리스의 <문화유물론>에서 관찰자의 입장을 듣고 서술하여 그들의 생각과 입장을 정확히 표명하는 것은 etic이라 하고, 포스트모더니즘 인류학 이전에 정해진 매뉴얼만 보고 판단하는 것은 emic이라 할 것이다.

 

 

인류학 서적에서 보며 생각한 점은 문화적인 상대주의가 되어야 하지 문화상대주의 그 자체는 무리가 있다는 점에서 마빈 해리스의 의견을 동의한다. 그러나 적어도 이 문화인류학자의 추가의견처럼 etic의 영역에서 emic으로 발전시키는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그들의 입장과 의견을 충분히 듣고, 다시 관찰자의 입장으로 정리하는 것이다. 내 생각은 각 인류나 문화의 특징이나 조건이 있는 것을 모두 인정하되, 그것을 무조건적으로 특별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특별하다는 사실 자체를 보편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들은 학문적 영역이지 현실에서 많이 어려운 모양이다. 문화라는 것은 그 사회의 기후, 지리, 인종, 식생, 수리 등에 따라 달라진다. 예전에 한국에 1988년 올림픽으로 많은 서구사회의 사람들이 몰려왔는데, 이때 우리가 개고기를 먹는 것을 상당히 혐오했다고 한다. 미국에서 맥도날드와 같은 대형음식점의 경우 쇠고기의 대량사육과 도살이 가능하기에 가격이 저렴한 햄버거를 제공했고, 그것은 곧 값이 저렴한 고기를 먹을 수 있었으나, 한국은 고기가 당시 귀했던 시기였다. 개고기의 식용은 여름철 무더위를 견딜 단백질의 섭취에서 시작했다.

 

 

한국의 주식이 쌀이란 점이고, 감자나 고구마를 곁들인데도, 이것을 동물들에게 주어 식용 가축을 많이 키울 만큼 넉넉하지 못했다. 상대국가의 문화적 차이나 환경적 차이를 이해하지 않아 그런 국제적 비난이 일어난 점이다. 하지만 다르게 보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는 달팽이를 요리하거나 혹은 원숭이 머리를 그 자리에 프놈펜으로 갈라 원숭이 뇌를 파먹지 않는다. 말고기를 만들어 개의 먹이로 준다던지 하는 것도 우리로서 생각하지 못할 부분이다. 결국 문화는 상대적인 부분이 있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절대적인 배타주의는 심각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점이다.

 

 

문화라는 것은 인간이 그 사회를 살아가는 하나의 양식이라는 점으로 정치, 경제, 사회, 하다못해 의식주 영역까지 영향을 미친다. 게다가 문화를 비교하여 분석하는 문화인류학의 눈으로 보면 한국의 현주소는 지나친 서구화와 동시에 그 서구화로 통한 많은 문제점을 도출하기도 한다. 그런다고 세계화로 통해 교류와 연계는 필수적이다. 그런다고 하여 거기에 모든 것을 맞추기보단 우리가 스스로 존재성을 인지하는 것이 맞다. 한국에서 세계문화교류대회에서 내놓는 것은 서양화 내지 조각이라면 일본에서 자국의 다도문화를 내놓았다.

 

 

국가라는 내이션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다른 내이션이 존재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 역시 자국의 트렌드는 존재해야 하는 점은 분명하다. 그런다고 하여 보통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이율배반적인 무비판적 수용과 적대적인 문화이질감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상대와 나의 차이점을 이해하고, 거기에 대한 서로간의 문화를 보여줌으로 같이 이해하자는 의미다. 20세기 말에 저술한 이 저자의 글에서 21세기 지금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런 화두를 전해준다. 사라져 가는 한국사회 문화 속에서 우리 문화도 지키는 것이고, 그것 역시 여러 가지 부분들을 보존하게 하는 것임을 알린다. 아마도 너무 획일화된 서구가치의 무분별한 수용이 그렇지 않나 싶으나, 미래의 한국이 한국으로 존재하기 위해 다시금 생각해볼 같이 있음은 분명하다. 문화강국이 되는 점에서 한국의 경제화는 이루었다고 볼 수 있어도 민주화는 여전히 진행 중이라고 강조하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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