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전두환과 80년대 민주화운동 - ‘서울의봄’에서 군사정권의 종말까지 ㅣ 청소년과 시민을 위한 20세기 한국사 4
정해구 지음 / 역사비평사 / 2011년 5월
평점 :
위대한 문화와 문명 그리고 거기에 드러나는 그 유산들은 엄청난 미를 뿜어내고 있다. 마치 인간은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함과 동시에 위압으로 인간들을 매료시킨다. 그것은 지금 인간에게 무리인 것이고, 그 원리나 속성도 미스터리로 많이 남아있다. 가령 인도의 대표적인 이슬람 건축이며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꼽히는 타지마할, 이집트의 스핑크스와 피라미드, 중국의 만리장성과 진시황제의 무덤들 등을 말이다.
현대사회에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이 모든 것은 아름답고 웅장하고 비교할 수 없는 매력을 준다. 이것들이 일어난 것은 당시 신화적인 권력을 보여준다. 그 신화란 대다수의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대다수의 인간들의 억압에서 나온 신화다. 따라서 우리 인류가 바로 이 순간까지 즐기고 있는 위대한 문화라는 것은 당시 살아가던 자들의 피, 땀, 눈물로 범벅된 존재다.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병들고, 가난과 배고픔에 시달렸다는 증거다. 위대한 것들이란 바로 그런 것에서 나와도 틀리지 않음이 분명하다. 그런 착취와 폭력으로 이룩한 것들이 아닌 이상 누군가가 그것을 대신 책임을 지는 것만 남았다. 단지 그것은 착취, 폭력, 억압이 동원되지 않음에 유형적 가치보다는 차라리 무형적 가치에 어울릴 것이다. 미국 남북전쟁에서 인종차별주의를 철폐하려던 링컨 대통령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
어째든 그런 신화란 우리도 없지 않다. 가령 우리가 찾아가는 위대한 유산을 보면 경복궁, 천마총 등과 같은 문화재를 보면 다 당시 백성들의 피다. 그런 문제를 과거의 지배계층들을 알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지 지금의 나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조선후기 정조가 정약용에게 수원화성을 건축하기 위해 기중기를 제작하여 신축한 점과 그 예산을 모두 개인 자산으로 한 것으로 보아 백성을 생각하는 정치가라면 분명 위대한 문화와 그 현상을 유지할 수 있는 건축물 같은 존재들은 분명 백성들에게 힘겨운 존재였을 것이다.
물론 이제는 그런 신화적인 억압과 착취를 그렇게까지 사용하지 않겠으나, 단지 그것이 상징화된 건축물에서 다른 방도로 옮긴다. 단순히 왕권과 귀족들의 상징보다는 그 상징을 그 사회에서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생산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새로운 신화가 발생된다. 문제는 과거의 신화적인 존재가 지금이야 좋을지도 모르나, 그 당시 사람들에겐 치명적인 문제였다. 삶과 죽음이 오고가는 순간이니 얼마나 심각했을 것인가?
지나간 과거라고 하여 역사를 배우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오히려 과거로 통해 우리가 오늘날의 현실을 이래저래 다각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누가 알 수 있을까? 지금의 새로운 신화가 먼 미래에선 하나의 문화가 될지? 그리고 그 신화의 공간에서 언제나 희생제의는 필요하다. 한국의 전통적인 신화에서 건국신화와 무속신화로 분리되나, 적어도 건국신화에서는 위기와 시련이 있고, 무속신화에서는 피의 희생이 따르는 법이다. 그래서 신화는 멈출 수 없는 영원한 기계이다. 왜냐하면 인류가 사라지지 않은 이상 신화란 사라질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경제화 성장이란 신화, 특히 한강의 기적 뒤에는 어떤 신화가 숨어 있을까? 한국의 경제성장은 정말 신화와 가까운 것들이다. 일제강점기, 625전쟁에서 식민지화 된 망국의 경험에서 비롯하여 동족상잔과 이데올로기의 대립(어차피 소비에트연방이 사회주의라고 하나, 그 이면에는 독재적 전체주의를 내포한 국가자본주의일 뿐이다.)이란 큰 전쟁에서 일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고, 분노와 냉소, 절망과 고뇌만을 낳았다.
이런 국가에서 세계 경제대국은 엄청난 발전은 사실이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신화가 가속화된 것이다. 예전에 소비에트연방의 독재자 스탈린이 1930년대부터 경제대개혁을 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개혁은 굴라크라는 농민의 수탈과 숙청, 자국의 노동자들의 강제적인 억압과 폭력에서 가능했다. 특히 1930년대 후반의 대살육은 한낮의 어둠이란 소설까지 만들게 하였다. 소비에트연방은 그 덕분에 미국과 유럽에 위협을 줄 정도로 성장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따른 것이다. 대부분 성장을 이룩한 곳에서 특징은 과도한 착취, 폭력, 억압이 숨어있다. 그리고 희생 뒤에는 엄청난 발전이 따르고, 거기에 따른 이득을 보는 자가 있었다. 이런 경향은 어느 특정 역사만 아니라 대부분 그런 과도기 부분을 거쳤다. 따라서 어느 국가만을 지정하는 것이 모순이다. 모든 역사의 문명 속에는 착취, 억압, 폭력이 존재했고, 지금도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누가 가지기 위해서 누군가 포기해야 한다.
그러면 그 포기해야할 사람들이 지금 우리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국의 경제성장 신화 뒤에는 항상 이런 문제들이 그냥 외면한 채 지나왔다. 발전이라는 미명아래 희생은 따른다. 그러면 그 희생의 존재는 누가 지어 가야할 문제인가? <전두환과 80년대 민주화운동>은 그런 문제를 차례대로 보여준다. 과연 민주자유공화국은 국민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있는가? 아니면 자본의 자유만을 위한 곳인가? 분명 인권에서 자본의 자유는 자유의 1가지 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인권도 자본의 자유 아래 놓여 있다는 점이다.
독재라는 것은 그렇게 무섭다는 점이다. 무엇인가의 큰 접점이 보이면 그 다른 가치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국가주의적인 전체주의는 파시즘이란 공포의 정치가 시작된다. 폭력과 억압, 그리고 착취와 증오가 하나의 사회적 미덕으로 자리 잡히면 파시스트가 결국 왕이 되고 만다. 그런 세계에서는 신화란 그저 성공을 위한 계단에 불과하다. 그 당시의 계단을 밟고 우리는 지금 서 있고, 앞으로 가려면 다른 사람을 계단으로 만들어야 하는 점에서 그 계단의 층간 기둥과 지지대는 누가 되어야 하는가?
그 모든 것은 약자의 몫이다. 물론 그런 과도기의 일정부분은 안전하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그런 일을 다시 원하고 시도하고자 하는 것은 경악할 노릇이다. 타인의 죽음을 그저 하나의 수단으로 이용하기 때문이다. 부산에서 419혁명 때도 부산 앞바다에서 최루탄에 눈이 박힌 채 죽은 학생과 서울에선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우리 근현대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슬픔이다. 민주화라는 이름 아래는 그 민주화를 위한 희생과 고통이 따른 것이다. 경제성장과 더불어 민주화 역시 신화인 셈이다. 단지 전자는 일부 특권층을 후자는 보편적인 영역이다.
그러나 적어도 헌법이나 윤리가치를 보면 후자가 맞으나 현실은 전자로 가려고 했다. 특권층에게 다시 자신에게 특권이 갈 수 있도록 하는 하나의 장치가 있었고, 그런 점을 이용하여 권력을 재창출하려고 했다. 국민세금을 착취하고, 금융을 조작하고, 게다가 사회 불공평을 하나의 자유주의로 보려고 했다. 적어도 지상자유주의라면 상대방이 무얼 하든지 직접적으로 피해가 오지 않을 이상 참견할 권리가 없지만, 그것은 잘못된 판단이었다. 오히려 새로운 정치적 자유주의의 추구는 권력에 대항되는 반역이 되기 때문이다.
과거 스페인에서 프랑코라는 잔인한 독재자가 있었다. 20세기 중후반인 1975년까지 스페인을 공포를 준 그가 사실 스페인 봉건사회의 부산물이었다. 사관학교의 교장인 그는 스페인 내전을 일으킨 군사쿠데타 주모자이다. 그는 내전의 승리 권력을 잡았고, 그 와중에 막대한 살인과 폭력을 휘둘렸다. 그에게 대항하던 세력이 사회주의자이던, 자유주의자이든, 무정부주의자이든 적어도 과거의 독재를 인정하지 않고 저항한 세력들에겐 잔혹한 총과 칼을 겨누었다. 천재 프랑스 화가 피카소가 왜 게로니카라는 작품을 만들어냈는가?
한국과 세계의 역사 속에서 언제나 정치라는 것은 상황의 극적인 부분에서 그 이름을 새긴다. 그러나 그 이름 뒤에는 숨겨진 이면의 역사가 존재한다. 오늘날 한국의 경제화, 민주화란 것은 그냥 그대로 쉽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르나, 뒤에는 각종 폭력과 투쟁의 대립에서 시작된다. 문제는 그 피를 흘린 주체는 언제나 약자라는 점이다. 그리고 아직도 그 무서운 역사의 주사위는 현재진행형이란 사실이다. 당시 그것이 최선이라고,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최악의 수단이라고 하면 일단 그 이야기는 듣겠다. 그런데 현재까지 왜 우리는 또 막다른 가로에서 더 크고 무서운 위기를 맞이할까? 그때 말하던 것은 전부 허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