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 유동의 철학 - 한 철학자의 지적 초상화 리좀 총서 6
우노 구니이치 지음, 김동선.이정우 옮김 / 그린비 / 200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말로만 들어본 질 들뢰즈, 그에 대한 이야기는 가끔 현대 한국이나 일본과 같은 동양권 국가에서 유명한 프랑스 철학자 중에 하나란 사실을 인지하게 한다. 전에 인터넷 사이트 철학관련 게시판에서 이런 글을 보았다. 질 들뢰즈가 직접적으로 언급된 것은 아니나, 적어도 한국인지 세계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으나 3가지 학문사상이 주류로 차지하고 있다고 말이다. 1번째는 마르크스주의, 2번째는 구조주의, 3번째는 라캉주의라는 것이다.

 

적어도 주류에서 마르크스야 말로 비주류에서 탄생한 주류학파이고 20세기 초반부터 21세기가 도래된 시점에서 마르크스의 유령은 사라지지 않는다. 아니 마르크스 유령이 오고 싶은 것이 아니라 계속 오게 만드는 사회적 현상일 것이다. 마르크스 이외에도 다른 사상가의 사상을 흡수하여 탄생한 구조주의, 그 구조주의 안에서 4인방 중 하나인 자크 라캉, 일단 그래도 자크 라캉은 정신분석학자로서 마르크스보다는 프로이트의 사조를 재발견했다.

 

그러나 일단 요 3가지 사상이 주름잡는 것은 사실이다. 이미 프랑스에서 구조주의가 쇠퇴하고 있다고 하나, 한국에서 쇠퇴하기 어려운 것 같다. 한국이란 워낙 사상적인 자유나 담론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들뢰즈와 무슨 관계가 하냐면, 지금 막 읽어본 <들뢰즈, 유동의 철학>에서 들뢰즈에게 영향을 준 사람은 흄, 스피노자, 니체, 베르그송, 프루스트와 같은 사람들인데, 그가 말년 죽기 전에 마르크스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저술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그의 철학적인 자세는 언제나 활성화라는 것을 추구하려 했던 것 같다. 단지 예전에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를 직접 만나고 친분이 있던 우노 구니이치라는 일본인의 <들뢰즈, 유동의 철학> 속에서 내가 들뢰즈를 알기란 어렵다. 이 책은 우노 구니이치라는 사람이 들뢰즈란 인물을 알고 그의 서적을 읽고 연구하였기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나는 것은 천의 고원에서 보이는 리좀이란 단어였다.

 

어디든 심오하게 영상비평이 들어간 자리에 리좀이란 단어가 그물망처럼 단단히 자리잡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나라는 존재 역시 들뢰즈의 이름을 알았던 계기는 철학을 배웠기 때문이 아니라 미학과 비평에 관련된 책들을 보면서 알았다. 그는 철학자이기도 하나 오히려 영화평론가로서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는 이 책을 보면서 그가 서구철학의 반항아인 니체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고, 그가 실존주의적인 면에서 삶의 부정보다는 긍정을 추구하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는 폐가 너무 좋지 않아 자살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람들은 인간의 죽음에 관하여 죽음은 인간에게 좋지 못한 행위이며, 신의 가호 아래서는 죄악이라고 한다. 어떻게 보자면 죽음이란 인간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극단의 상황이다. 하지만 죽음이라고 하여 그 죽음을 택하는 것에서 긍정의 철학자 들뢰즈를 두고 부정적이고 비관적이라고 하기에는 그가 해온 인들이 아닌 것 같다.

 

어느 구문에 적혀있는 것처럼 죽음은 자연적인 현상이고, 그 자연적 현상에서 개인이 그 죽음은 선택하므로 죽음이어야말로 최고의 자연적인 행위가 아닌가라는 점에서 죽음을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 그저 언제나 같이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망각의 세계가 아닌가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플라톤이 저술한 서적 중에서 주인공이 대부분 그의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많이 나온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죽음이란 존재가 힘들고 괴로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이 철학자라고 한다. 죽음과 삶이라는 것은 반대되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같이 함께 하는 존재이므로 삶이란 죽음과 같이 걸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란 점이다.

 

아니라면 죽음이 당장의 생물학적 생명에는 멈추어서 정지하더라도 인간의 이성과 영혼은 끊임없이 부활한다면 그것은 죽음일까? 아니면 또 다른 삶이란 것일까? 하지만 인간의 인식과 존재에서 어느 특정한 영역에서 업적을 남기지 못하면 존재의 상실은 영원히 이어진다. 그러면 존재라는 객체가 있더라도 그 존재가 있었다로서 종말을 고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20세기의 슬픔은 하이데거가 차지하고 20세기 기쁨은 들뢰즈가 차지한다고 했다.

 

그것이 왜 그런지 몰라도 하이데거와 같은 경우 니체의 실존주의를 따라가고, 그의 초인사상을 이끌렸다. 문제는 하이데거가 살아가던 시절은 유럽에서 가장 시끄럽고 잔인하고 무서운 시기였다. 현대사회는 참으로 변증법적인 역사가 눈에 보인다. 왕정사회의 붕괴와 착취와 투기의 시대 그리고 민주주의로 위장한 파시즘의 세계 그 모든 것이 유럽의 20세기 중반까지의 모습이다. 그 파시즘의 극치는 결국 전쟁이다. 전쟁은 어느 순간 전쟁이란 그 자체에 목적이 아니라 국가란 장치아래 하나의 도구로 되었다.

 

당시 하이데거가 문제된 이유가 독일 나치스의 히틀러를 긍정적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현대에 사는 사람치고 히틀러하면 떠오르는 것은 독재자에 전쟁광이다. 물론 당시 독일의 상황과 주변관계를 보면 그가 하는 전략은 독재자로선 합리적 판단일 것이다. 내부의 갈등과 분열을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묶어내어 외부의 상대를 적으로 만들어 자신들의 제국이어야 말로 최고고 선이라는 가치로 무장하면 그것만큼 쉬운 선동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2차 대전의 그늘은 들뢰즈에게 존재했다.

 

이 책에서 안 사실은 그의 가족 중에 형이 2차 대전 중에 사망했다는 점이다. 전쟁이란 광기 아래 가족을 잃은 것은 참으로 비극이다. 그러나 전쟁의 비극이 있으면 항상 철학의 사유란 새로운 동이 트이는 것 같다. 플라톤 역시 청년시절에 고대그리스 아테네에서 살던 시절에 전쟁이 있었다. 28세 때는 그의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이성 아닌 이성에 죽임을 당했다. 이 책에 언급된 “이성은 감정 중의 하나”이듯이 소크라테스가 신을 모멸하지 않음에도 모멸됨이 성립되는 것은 이성이 정말 감정 중의 하나로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질투라는 감정이 이성화되었다는 것이고, 그것은 권력으로 하여금 한 인간의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비극이어야 말로 오히려 인간을 다시 성찰하고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라고 여긴다. 물로 그런 점들은 들뢰즈가 오래 전부터 눈여겨본 스피노자에서 시작된다. 스피노자에 대해 자세히 모르나 단지 “내일 당장 지구가 망한다고 해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를 주장한 사람이다. 그의 철학은 당시로서 무척이나 박해를 받았다고 한다. 유대인이면서 유대인 사이에서 배척당하고, 유대인을 배척한 기독교인들에게 역시 배척당하고, 그의 사상과 생애는 배척의 역사이다. 괴로움과 좌절감으로 맛보면서 눈감던 그에게 이제 그의 철학은 현대 기라성들에게 하나의 귀감이 된다.

 

당시의 패배, 오늘의 패배가 내일과 미래의 승리라는 여러 가지 역사적 사실이 그의 가치를 드높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들뢰즈에게 그의 사상은 많은 변화를 준 모양이다. 스피노자가 당시에 아주 거친 인생을 살았으나, 스피노자의 지구멸망에서는 그의 인생관은 정말 철학적이라고 볼 수 있다. 죽음이어야 말로 오히려 차분하게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다르게 보자면 사과나무 한 그루의 의미에서 세계가 망해도 평정심을 잃지 않으면서도 또한 사과나무를 심는 그 행위로서 희망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그것이 들뢰즈가 희망으로서의 철학을 두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지나갔다. 내가 아는 블로거 중에서 분명히 이 이름을 사용한 분이 있었다. “천의 고원”이라고 말이다. 천의 고원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저술한 명저이다. 물론 앙티 오이디푸스도 있겠지만, 천의 고원에 녹아들어있는 사상의 깊이와 사유의 세계는 과연 얼마나 되는지 몰랐다. 그저 그런 아이디에서 그런 책제목이 있다는 사실을 여기서 알고, 그 안에서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오고가는지를 측정할 수 없을 정도라고 생각이 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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