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민법
존 롤스 지음, 장동진 외 옮김 / 아카넷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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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가장 영향을 준 사상가 및 철학자라면 선택하라면 나는 2사람을 선택할 것이다. 1사람은 카를 마르크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존 롤즈다. 그 이유는 마르크스의 경우는 내가 <자본>, <공산당 선언>, <경제학철학초고>를 읽어보면서 마르크스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회적 약자를 위해 노력했는지, 그런 사회에 대한 명확한 이해와 동시에 구조적인 설명을 통해 사회과학적인 체계를 확립하였다.

 

그 덕분에 나의 사고는 단순히 나의 독단적인 판단구조에서 다소 사회구조적인 판단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 덕분으로 프랑스 구조주의학자들의 서적들을 조금씩 이해하면서 보게 되었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이 모두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보편적이란 사실에서 구조적인 사고로 통해 전반적으로 사회를 과학적으로 보려고 했기 때문이다.

 

또한 마르크스의 도서를 읽어보면 현실에서는 유토피아가 없는 것 같았다. 유토피아란 보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추구한다고 해서 다시 돌아오는 것이 없다. “어떠한 높으신 양반, 고귀한 이념도, 허공에 매인 십자가도 우릴 구원 못하네” 라는 노래가사 있듯이 그 어떤 사고관념이란 것은 허물에 매이는 족쇄이지 그 어떤 대안이 되지 못한 점이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의 서적을 보면 그들은 철학이란 관념을 생산하여 마르크스주의 철학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유물론적인 관점을 끊임없이 관념론과 대립하여 비판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자면 철학에서 지금의 자기를 만족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사유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철학자를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유토피아가 없기 때문에 오직 현실에 대한 사회과학적 비판으로 통한 일상생활의 혁명으로 통해 계속 이어나가야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유토피아란 것은 괜한 말로만 보여줄 존재라는 것인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은 존재이나, 이미 인간의 관념이란 공간에 유토피아라는 단어는 생겼고, 현실에서 형이하학적으로 존재할 수 없어도 인간의 사고라는 인식에서 충분히 가능하다.

 

형이상학이라고 하여도 결국 보이던 것조차도 왜 존재하고 그것이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 연구하지 않은가? 유토피아는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한다면, 이와 달리 분명하게 현실에서도 유토피아가 존재할 수 있다는 의견이 있어야 하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그런 현실적 유토피아에 대해 존재할 수 있다고 여기는 위대한 철학자가 있으니 그는 존 롤즈이고, 이번에 읽은 도서가 바로 존 롤즈의 만민법(The Law Of Peoples)이다.

 

만민법에서 만민이 결국 Peoples인데, 이 단어를 다르게 생각한다면 가령 한나 아렌트가 주장한 mass(대중), mobs(선동가), 그리고 people(인민)이다. 시민이라는 이 단어 속에서 과연 어떻게 우리가 대중에서 시민으로 가야할지 혹은 어떻게 해야 할지는 상당히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가 없다. 솔직하게 내 의견으로서는 시민들의 의해 정치적 입장이 분명하고, 자신의 이익만 아니라 타인의 이익까지도 같이 공유할 수 있는 하나의 정치적 자유주의와 민주적 자유주의의 업적을 올리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현실에서 보는 그런 시민사회를 일구어 갈 수 있는 만민들은 흔하지 않다는 점이다. 만민법에서 만민은 합리적이기보다는 합당한 것이 옳기 때문에 자신의 이성적인 자유의지로 통해 타인과 자신과의 올바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롤즈는 기본적으로 임마누엘 칸트, 게오르크 헤겔, 존 스튜어트 밀과 같은 이성적인 인간을 추구하는 철학자에 동의했으며, 그 중에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처럼 시민사회인 세상을 원했다.

 

단지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에서는 남녀평등과 노예제도 폐지를 인정했으나, 각 개인에 대해 1인 1표에 대한 정치권보다는 그 사람에 대한 정치적 역량과 도덕적 기준에 따라 정치적 표력을 달리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했다. 어떻게 본다면 시민이란 존재는 대중들과 차이가 나는 존재라는 점이 분명한 것이다. 왜냐하면 만민법에서는 비이성적인 사회의 국민들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했으며, 정치적인 결정에서 종교적인 개입을 반대했다.

 

그러나 종교적 관념은 이성적인 영역보다는 이성적이지 못한 영역에 더욱 가깝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종교적인 존재는 현실적인 존재라기보다는 관념적인 존재에 가까우며, 또한 인간의 믿음이 이성적인 판단보다는 심리적인 요인이 크기 때문에 종교단체가 정치적으로 개입할 경우 이성적인 정치를 하기란 어려운 법이다. 가령 1600년대부터 독일을 비롯한 유럽사회에서 발생한 마녀사냥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당시 국가와 종교가 서로 정치적 연합으로 통해 많은 국민들을 탄압하지 않았는가? 만민법에서는 종교가 정치적으로 분리되어야 하며, 또한 한국처럼 종교단체가 지나친 자선단체의 개입은 종교의 영향이 정치적으로 여전히 주고 있어서 그것이 종교적 조직으로 통해 이성적인 정치제가 어렵지 않은가 생각했다. 그런 롤즈가 이성을 중시하고 이성을 위해서는 철학적인 자세를 만민이 가지는 것을 권장했다.

 

게다가 종교적 교리가 자유를 위하 하나의 사상이 아닌 포괄적인 자유로 보며, 종교가 절실하게 자신의 도덕적 교리를 따르면 그것이 제1의 철학과 동격으로 된다고 한다. 참고로 철학 중에서 제일 첫 번째가 되는 것은 에토스가 중시되는 윤리학이란 점이다. 윤리학은 결국 인간을 위해 자신보다는 타인의 입장을 생각해주는 것이다.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에서 자신의 선(goods)보다는 타인의 선을 수동적인 입장이 아닌 능동적인 자세에서 실시하는 것이 진정한 도덕적 법칙으로 생각한다.

 

문제는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인간들은 그런 윤리적 가치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에 의해 즉 합리적인 사고에 의해 살아간다. 그 합리라는 것은 논리적으로 자신에게 얼마나 유리한지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칸트는 인간의 논리라는 것은 윤리가 선행되지 않으면 논리적 가치가 없다고 한다. 만약 카를 마르크스가 당시 많은 노동자의 인권을 위해 일하였으나, 이와 반대되던 세력은 카를 마르크스가 선동자로 보였을 뿐이다.

 

그런데 이 위대한 선동자를 만들어낸 원인제공자란 누구란 말인가? 만민법에서는 분명히 재산의 분배과정에서 모든 사람들의 재산이 일정한 기준에 도달하게 하는 것은 반대한다. 롤즈가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경제적인 부분 역시 인정하는 점이다. 하지만 그가 더욱 더 중요하는 자유라는 것은 정치적으로 민주적으로 공적으로서 정의가 존재하는 조건에서 자유주의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른바 자유를 위한 자유주의인 것이다. 또는 한나 아렌트처럼 권리를 위한 권리처럼 말이다.

 

만약 롤즈가 제시한 것처럼 만민들이 세계적으로 포진하여 가난한 자들을 업신여기거나 가혹하게 대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최악의 상황을 선택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1871년 파리코뭔들이 독일군과 프랑스 독재정치에 항거할 때 어느 소녀가 은방울꽃을 들은 채로 죽었다고 한다. 왜 그 소녀가 죽어야 했을까? 만민법적인 입장에서 보면 만민이란 부당한 외압에 의해 자신들의 인권에 위협당하지 않은 권리가 있다. 그들이 전쟁에 참가하는 이유는 오직 부당한 외침에 의해서다. 전쟁을 하더라도 전쟁을 기획하는 정치인과 군인들에 대해 군사적인 영역에서 처리하여야지 죄가 없는 민간인들에 대해 엄격히 제한해야 한다고 했다.

 

아마 그것은 롤즈가 2차 세계대전에 미육군으로 입대하면서 일본이 항복하고 난 뒤에 1946년까지 일본에 잠시 머문 점일 것이다. 일본에 머무른 롤즈에게 당시 일본의 민생이 전혀 정의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일본의 전범후손들이 계속 정권과 대기업의 사업가로 권세를 누린다. 그에 반해 일본 국민들은 비참한 삶을 영위했을 것이다. 롤즈는 일본이 6월경에 항복에 대한 부분을 천황이 각료에게 지시한 것을 언급한 것에서 1945년 8월 핵폭탄 투하한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

 

그 덕분에 일본은 핵폭탄 피해자란 생각에 자신들의 전쟁범죄를 반성하기보다는 오히려 피해자라는 입장을 내세우고 있다. 특히 더 중요한 사실은 핵폭탄의 위력은 군인보다는 아무 방비도 없는 민간인에게 심각한 타격을 준 것이다. 진실로 만민이라면 이런 야만적인 전쟁을 일으키면 안되는 것이고, 일으킨다고 하여 죄 없는 국민들을 피해주면 안되는 것이다. 전에 “롤즈의 민주적 자유주의”라는 도서에서 전쟁에서 책임을 지는 존재는 장교라고 하는데, 병사들은 그들에게 군정에 대한 권한도 없이 강제로 징용된 점과 그 군인들은 모두 평범한 국민이란 점이다.

 

그래서인지 만민법은 분명히 유토피아를 추구하고 있으나, 롤즈의 사상을 보면 현실적인 유토피아를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롤즈의 사상은 철저하게 현실의 비극에서 시작된 씨앗이란 점이고, 그 비극을 줄이기 위해 만민이란 존재가 필요한 것이다. 만민법에서 만민에 대한 법이라고 하여 그 법이 어느 국가가 지닌 각각의 법과 제도가 아니라 만민법은 그 자체만으로 범세계적인 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만민법이란 강제적인 조항과 의무사항보다는 자신의 의지와 판단에 의해 이루어지면 그것은 진정한 시민사회의 일원으로 정치적 자유주의를 위한 거대한 의지인 것이다. 자기 가족과 국가를 사랑하되 그것에 해당하는 만큼 다른 국가와 민족을 존중하고, 자신의 의견을 중시한 만큼 타인의 의견을 같이 조정해야하며, 부당하게 피해를 입거나 어려운 사람들이 계속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같이 하나의 인간체로 보는 것이다.

 

정말 그렇다면 롤즈가 제시한 만민법처럼 세상에는 분쟁이 줄어들고 전쟁이 사라지는 현실적인 유토피아가 올 수 있을까라는 점에서 오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이 다가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롤즈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얼마나 어떻게 준비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인간의 이성에 대해 인간은 자기 스스로 의심하지 않으려고 한다. 인간은 자신의 비이성적인 관념조차도 이성이다! 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지구상에 떠도는 많은 전쟁과 분쟁, 인종차별, 남녀차별, 신분차별 등이 생기는 것은 어떻게 봐야 하는 것일까? 그래도 롤즈는 그런 세상을 조금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가 심장병으로 쓰러져서 강의하지 못하게 되어도 그는 병상에서 계속 집필했다.

 

그래도 성과가 있었는지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과 힐러리 여사는 그들이 대학교에 다닐 적에 존 롤즈의 철학은 상당한 공부가 되었다고 한다. 롤즈의 서적은 다른 철학자와 달리 책이 많지 않다. 서적 1권 적는데 걸린 시간을 보니 거의 경이롭다고 할 수밖에 없다. 불세출의 명저인 <정의론> 1권 적는데 20년이, <정치적 자유주의>는 23년이 걸렸다고 한다. 2002년 자택에서 서거할 때까지 그는 세상을 좀 더 좋게 현실적 유토피아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물론 마르크스처럼 연속적인 투쟁을 살아온 마르크스와 다른 노선을 걷고 있으나, 기본적으로 본다면 마르크스와 롤즈에 대한 기본적인 철학적 마인드는 크게 다른 점은 없다.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에 치중하여 프롤레타리아의 자기 스스로 운명 개척을 주장했지만, 롤즈는 이와 반대로 인간 스스로 시민, 즉 만민이 되어 분쟁과 줄이고, 다 같이 잘 살 것을 추구했다. 뭔가 다른 방향이나 기본적으로 인간에 가져야 할 권리와 자유를 모두 인정한 것이다.

 

재산적인 부분에서 열심히 일한만큼 대가를 받는 것은 당연하나 마르크스가 살던 시절은 그렇지 못했다. 하루 12시간 격렬한 노동을 해도 1가족의 생계는 막막했다. 적어도 마르크스는 독일인에게 맥주를 프랑스인에게 포도주란 말처럼 최소한 생계를 넘어 그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 것을 추구했다. 단지 추구하지 못하기에 그런 격동의 시간을 보낸 것이고, 롤즈는 그런 극단적 상황이 오지 않기 위해 현실적 유토피아라는 대안을 내놓았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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