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에 대하여 동문선 현대신서 119
루이 알튀세르 지음, 서관모, 백승욱 옮김 / 동문선 / 1997년 5월
평점 :
품절


루이 알튀세르라는 인물을 알게 된 것은 2011년 3월이었다. 당시 나는 프랑스 사회학자 겸 철학자인 삐에르 부르디외라는 교수의 “구별짓기” 상권을 읽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구분짓기라는 도서는 결국 사회학과 문화학에 대한 담론인 도서로 상당히 구체적이면서도 통계적인 자료도 많았으나, 한편으로 기본적인 철학과 사회학 등 다양한 인문학적 내용을 알지 못하면 도저히 읽을 수 없는 도서였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책 겉표지에 적힌 <왜 노동계급은 떠들썩하게 먹고, 마시고 즐기는 일에 몰두하는 반면 ‘사회지도층’은 가리고, 삼기고, 절제하는가? 경제자본, 학력자본(학벌), 문화자본, 사회관계자본(인줄) 상징자본의 계급별 구성과 사회적 궤적을 추적하면서 상징이 지배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를 해부해낸 문화연구 분야의 ‘자본론’>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아직 뚜껑도 열어보지 못한 채 나는 1년이나 이 책을 집에 사두고 방치했다. 왜냐하면 이 책을 읽기 위해서는 선행적으로 읽어야 할 도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나에게 당시 우연히 발견한 도서 경희대학교 영미문학전공의 이택광 교수의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을 보면서 단순히 좌파와 우파라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넘어 <인문좌파 즉 지금 뭐가 잘못된 현상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보고 이것이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논하는 것이 인문좌파이다.>

 

이것이야 말로 정말 우리가 생각해야할 철학과 사회학에 대한 부분이 아닐까? 철학이란 학문은 항상 보면 지금이야 우리가 일반적으로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나오는 당시만 해도 이것은 전혀 반갑지 않은 존재이며, 기존 인식에는 상당히 위험한 사고이다. 가령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는 당시 신을 믿지 않고 청년들을 현혹한다는 이유로 그리스 아테네 폴리스의 가치를 따라 독배를 들어 그 생을 마감한다.

 

그리고 플라톤과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자신의 신변이 그렇게 좋은 입장은 아니었다. 그것은 당시로 그들의 존재는 기존 지배계층이나 권력가들인 소피스트에게 매우 도전적인 인물로 비추어졌기 때문이다. 혹자라면 프랑스 봉건세력의 상징인 바스티유 감옥을 함락하고,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를 단두대 아래 이슬로 만든 프랑스혁명의 원죄자를 찾으라면 장 자크 루소가 나온다.

 

당시 루소의 철학적 견해는 봉건사회에서는 위험하고 배척해야할 가치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루소의 서적은 철학이나 사회학, 역사학에서 다루어야 하나의 학문으로 변했다. 당시에는 학문적인 가치영역이 아니라 실제로 정치적 여파가 큰 존재다. 그래서 루소의 철학을 민주주의사회의 기원에 설명할 수 있는 지금이나, 당시로서 루소는 혁명적이고 극좌파적인 존재다. 그러면 루소는 좌파인가? 우파인가?

 

그런 이유로 인문좌파라는 것은 이런 정치적, 사회적, 역사적인 일들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 또한 지금과 미래를 어떻게 보고 듣고 판단해야하는지 사고할 수 있게 하는 하나의 이론가이드 도서이다. 말 그대로 인문좌파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좌파의 기원은 어디인가? 흔히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로 보통 보겠으나, 좌파의 근원은 프랑스혁명 후 루이의 목을 베고 난 후에 생긴 자코뱅당이다.

 

봉건적인 권익을 추구하는 우파에 반대하여 좌측에 있어서 좌파로 통한 것이다. 아마 지금 좌파하면 무조건 매도하는 사람으로서 프랑스역사와 철학사 따위는 머릿속에 제대로 인지되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진짜 좌파의 기본은 마르크스주의라는 사실이다. 그런 마르크스주의로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19세기에 눈을 감고 후발주자로서 나타난 이들이 있다.

 

그런 이들을 다룬 도서가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이고 거기에 등장하는 인물로 그람시, 발터 벤야민, 장 폴 사르트르, 게오르크 루카치, 루이 알튀세르, 자크 데리다, 자크 라캉, 슬라보예 지젝 등이다. 이중에는 슬라보예 지젝, 자크 랑시에르, 조르조 아감벤은 현재 실존하는 철학자 및 사상가로 21세기를 대표하는 대석학적인 지식인이다.

 

이 책을 읽으면 나는 현대철학과 철학자, 그리고 그들까지 이어져 있던 사람들을 하나 둘씩 알아갔다. 물론 모든 것의 시작은 마르크스의 <자본>과 <공산당선언>이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자본은 계속 새롭게 적어지고 교정되어 가야할 도서지만, 공산당선언은 약간 금이 새어가고 있다. 그 도서의 취지와 달리 현실 속에 보이는 현상들은 어긋나 있었다.

 

이런 문제를 초기에 인식한 사람은 시각의 현상학을 저술한 모리스 메를로 퐁티였다. 최근에 읽은 <휴머니즘과 폭력>에서 메를로 퐁티는 마르크스주의가 반드시 공산주의가 아니라 반공좌파라는 것을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리고 그런 스탈린주의로 변질된 공산주의에 대해 1976년 프랑스 공산당에서는 스탈린주의에 대한 공산주의를 자신들이 추구하던 마르크스주의에서 결별을 선언했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의 생각과 의견을 틀렸는가? 아니면 무엇부터 문제인가? 그런 고민은 남을 수밖에 없다.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지금 내가 적으려고 하는 루이 알튀세르의 “철학에 대하여”는 그런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에서 어떻게 루이 알튀세르가 이끌어 가려고 하는지 잘 나와 있다. 이 책은 1부에서 페르난다 나바로라는 멕시코 산 니콜라스 데 이딜고의 미초아키나의 대학의 철학교수와 루이 알튀세르의 대화를 나눈 것이고, 2부는 루이 알튀세르가 편지를 받은 다음 나바로에게 답장을 하는 내용이다.

 

내용을 보면서 생각하는 점은 루이 알튀세르가 기존에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를 메를로 퐁티가 한국전쟁을 보고 비판한 것처럼 그 후에 다가올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미래와 그리고 진정으로 마르크스로 돌아가려 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재미난 사실은 마르크스의 자본은 사실 철학도서가 아니고 사회과학이라는 점이다. 그의 도서는 하나의 역사적 사실을 과학적인 시점으로 통해 현실에 대한 끊임없는 분석과 비판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혁명 성공이후 대부분의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들은 그것을 망각했다. 아니 마르크스주의는 철학적인 영역에서 다루고 있으면서도 결코 철학으로 생산하지 않았다. 또한 분명히 마르크스는 철학과를 전공했고, 당시 헤겔청년파에서 상당히 유명한 사람이었다. 헤겔의 변증법을 연구하여 그것을 토대로 자신의 철학적 사명을 수행하였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의 철학이란 무엇인가?

 

예전에 내가 알던 사람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대학교 강의에서 마르크스에 대한 과목은 개설되어 있고, 마르크스주의는 그렇지만 마르크스의 학문과 그에 대한 사상을 소개하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그 사람은 나에게 강의를 하던 교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그것은 교수는 마르크스의 이론만 내놓지 그 자신은 마르크스주의적인 면이 없다는 점이다. 그것은 행동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실천이 아닌 단순히 관념적인 영역에 속한 부류라는 점이다.

 

철학이란 무엇인가? 철학 그것은 인간이 가진 모든 관념과 행동 그리고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심지어 보일수도 없는 저 너머까지 연구한다. 그런 철학에서 오히려 철학을 말한다는 것이 철학적인가? 아니면 덜 철학적인가? 상당히 난해하다. 왜냐하면 철학은 인간의 이성으로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생각하고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순수철학인 형이상학에서 칸트는 이성으로서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순수이성을 논함으로 철학이란 관념적인 부분에 상당히 큰 기여를 했다.

 

하지만 그 역시 순수이성비판에서 논리는 윤리가 선행되어야 논리적이라는 점과 후에 실천이성비판에서 다루듯이 이성이 실천적으로 행함으로서 타인에게 좋은 것을 주는 것은 윤리적인 가치를 제시했다. 그렇다면 철학은 관념적으로 봐야할 것인가? 아니면 행동적으로 보는 것인가? 참 난해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점을 본다면 루이 알튀세르는 자신의 마르크스주의적인 견해는 관념적일 수고 없고, 유물론적일수도 없다고 했다. 아니라면 두 가지를 동시에 대립하면 꾸준히 발전해 나가야할 가치라고 했다.

 

그런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존재하는데, 그 철학이 철학으로서 생산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 철학이 그 자체로 움직이는 것이 옳다는 점이다. 철학에서 철학적이라 하는 것은 단순히 철학만 논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점이다. 마르크스의 생애에서는 그는 분명 철학을 많이 알고 있었으나 그는 비판적인 경제학과 사회과학으로서 행동했다. 그런다고 해서 그가 철학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의 인생 자체는 철학을 논한 것은 거의 없었으나 그의 인생 자체가 철학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모순된 사회구조와 더불어 그 사회에서 고통 받는 많은 대다수의 약자인 노동자와 농민을 생각했고 그리고 그들을 위해 행동했다. 마르크스의 행동 자체 하나마다 철학적이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지만 자본을 집필하면서 그는 철학적인 부분 관념적인 부분보단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부분으로 저술했다.

 

또 다르게 생각하면 그렇게 적는 것 자체도 관념적인 부분이 아닌가 싶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처럼 마르크스가 언제나 약자인 노동자와 농민을 생각하며 저술한 것 자체가 하나의 관념 속에서 태어난 것이 아닐까도 싶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관념적으로 철학적으로 저술한 게 아니라 현실을 보고 적은 것이다. 하지만 우습게도 관념적이거나 합리주의적인 면에 대항하는 하나의 안티테제 역시 관념적인 영역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또 다르게 생각해보면 하나는 분명히 관념적인 부분에서만 나온 것이고, 하나는 유물론적인 부분을 관념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단순히 역사적 사건이나 정치적 문제를 Yes or No로만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원인과 구조를 분석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마르크스주의가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런 관념론적 영역과 유물론적 영역을 한쪽만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중요하다.

 

왜 스탈린이 정권은 잡은 소비에트가 마르크스주의에게 독이 되었는가를 생각해보면 그들에겐 하나의 관념만 사로잡고 있었다는 뜻이다. 자신들이 거기에 얽매여 착취적 자본주의에 대항하고, 게다가 파시스트에게 대항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문제는 자신들이 거기에 대항하였으며, 자신 역시 그러지 않았을까 이다. 분명 그들은 나치즘과 파시즘에 대해 대항했다. 하지만 그들 역시 그렇게 되어가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관념이 결국 공포정치로 변화하고, 현실 속의 대중들은 착취에 벗어나지 못했다.

 

스탈린이 레닌에게 선택받은 후계자 6인 중의 한명이라고 하여 그 자체가 하나의 관념적인 영역으로 끝나 버리고, 그가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외쳐도 그는 그 관념 안에서 머물고 있었지 그 후에는 없었다. 바로 스탈린은 마르크스주의에 분명히 철학이 있어도 그것인 철학으로 생산되는 게 아니라 하나의 실천으로 철학이 완성되는 것을 망각한 점이다. 노동자와 농민을 억압하는 것에 반대하여 발생한 1917년 2월 볼셰비키혁명이 철학을 내세워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철학적으로 되었다는 것과 같다.

 

하지만 끊임없이 현실을 바라보고 비판하고 나가야 할 마르크스주의가 러시아혁명에 묶여 결국 자신들에게 위기를 안겨준 셈이다. 이 책에서는 마르크스주의가 스탈린주의를 바라보면서 반면교사하여 새롭게 나갈 것을 권장한다. 마르크스주의는 정치적 헤게모니에 대해 주도권을 잡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헤게모니로 인해 고통 받는 노동자와 농민을 인간다운 인생을 살기 위해서이다. 레비나스가 말했듯이 제1의 철학은 윤리학이다. 마르크스가 윤리학을 위한 도서를 만든 적은 없으나, 그가 살아온 행동은 상당히 윤리적인 입장이다.

 

하루 12시간 넘게 좁은 공간에서 움직이지도 못한 채 계속 일을 해야 하는 여성, 하루 12시간 넘게 탄광 속에서 안전 보호 장구도 없이 일하다가 탄광이 무너져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어린아이, 철로를 놓다가 공장에서 일하다 깔려죽거나 폭발하여 죽는 노동자들, 이런 행동들이 지금 도덕적인 가치관에 아니라면 윤리적인 가치관에 옳다고 여기는가? 당시 19세기 유럽의 문제는 단순히 마르크스주의를 넘어 민주자유주의 사회에서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의 가치는 그 개인의 존엄성이어야 하며, 그 개인에겐 최소한의 삶을 보장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후자는 존 스튜어트 밀과 존 롤즈의 사상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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