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전자책] 중학생이 보는 인간 실격 - 중학생 독후감 필독선 98 ㅣ 중학생 독후감 따라잡기 (중학생 독후감 필독선) 106
다자이 오사무 지음, 성낙수.임현옥.이승후 옮김 / 신원문화사 / 2010년 9월
평점 :
예전에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기획 중에 푸른 문학 시리즈란 방송을 보았다. 푸른 문학 시리즈란 일본의 유명한 문학가들의 소설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 방영한 이른바 영상문학의 개념이었다. 보통 한국 사람들은 애니메이션이라고 하면 애들이나 보는 그런 유치하고 저속한 콘텐츠로 여기기 쉬우나 사실 애니메이션이라고 하여 무시하지 못할 작품성이나 예술성이 없다고 할 수 없다.
푸른 문학 시리즈는 바로 그런 작품성과 예술성을 토대로 만든 애니메이션이다. 青い文学シリーズ라는 원제로 시리즈 안에는 여러 일본 문인의 작품을 각본을 하여 제작했다. 1번째 작품은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人間失格)”, 2번째는 사가구치 안고의 “벚나무 숲의 만개 아래서( 桜の森の満開の下)”, 3번째는 일본 근대문학의 대문호인 나츠메 소세키의 “마음(こころ)”, 4번째는 카와시마 스미노의 “달려라 메로스(走れメロス)”, 5번째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거미줄(蜘蛛の糸)”, 마지막 6번째도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지옥변(地獄変)”이었다.
작품을 보면 알듯이 다들 일본 문인계에서는 내놓는 작가들이다. 이중에서 나츠메 소세키의 등장인물의 심리묘사는 정말 잊을 수 없다. 또한 다자이 오사무가 좋아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와 같은 경우, 마치 문학소설이기보단 차라리 애니메이션 원작을 위한 각본이라고 생각할 만큼 상상력이 거대했다. 그러나 그 문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왜 그는 모습을 버려야 했을까? 추후 인간실격의 작가인 다자이 오사무 역시 자살을 한다. 죽음이 아니라면 탈출구가 없는 그런 인간이었을 것이다.
다른 작품에서 인상 깊은 점은 달려라 메로스다. 이 작품은 문학소설가 작품을 쓰면서 어떤 연극 시나리오를 적는다. 그런데 이 달려라 메로스는 그야말로 고대그리스에서 보여주었던 비극시와 동일했다. 비극의 주인공 메로스 그는 친구를 볼모로 하여 동생의 결혼식에 참가한다. 그러나 그는 돌아오면 왕의 노여움으로 죽게 된다. 죽고 싶지 않은 그의 무의식과 친구의 의리를 위해 죽음을 이상적 가치로 받아들인 그의 고뇌가 그 각본을 적은 작가의 심리와 일치한다.
애니메이션이라고 하나 그 주된 이야기 속에 주인공이 작가가 되어 다시 작품을 만들어 연극으로 보인다. 마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나온 것처럼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인 것처럼 말이다. 그런 푸른 문학 시리즈를 보면서 애니메이션 역시 문학적 가치가 있다고 단언하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애니메이션 원작의 토대가 되던 소설을 보면 어떤 느낌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상당히 다른 느낌일 것이다. 왜냐하면 애니메이션은 이미지로 통한 시각적 정보와 더불어 대사, OST, 효과음으로 통한 청각적인 정보를 동시에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각적 정보와 청각적 정보로 통해 하나의 서사 즉 narrative를 완성하여 거기에 담고 있는 하나의 가치관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반해 문학소설은 이미지의 시각적 정보도 없고 더구나 소리로 통한 청각적 정보도 없다.
오로지 문자 텍스트로 통해서만 본인이 이미지를 생각하고 소리를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책을 읽는다는 것은 많은 생각과 고민이 필요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같은 서사적 내용을 담은 작품이라도 그 표현방식이 다르면 받아들이는 이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미 애니메이션을 보고 난 뒤의 인간실격의 스토리는 대략적으로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에서는 이 작가의 사상적 특성을 알 수 있었다.
이 책의 작가소개서에 나온 듯이 그의 아버지는 부유한 집안에 권력가에 특히 일본 자본주의 가속화와 군국주의적인 활성화로 그의 집안은 매우 번창했다. 대신 번창한 만큼 주변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기 시작했다. 작가인 그인 다자이 오사무는 부유한 자기의 집안만큼 아버지에 대해 혐오했다. 그래서 그런지 주인공인 요조는 아버지에 대해 상당히 배척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중간 작품에 주인공 요조는 자신이 진보적인 가치관도 없었으나, 마르크스주의 청년단체에서 활동을 한다. 그는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가 자기가 익숙한 세계와 다른 세계라는 점이다. 자기가 있는 세계에는 어떤 패턴에 강제로 해야 한다는 것과 거기에 어울려 맞추는 것이 싫은 요조였고, 가식적인 세계에 가식을 맞추기 싫어하여 더욱 가식적으로 대한다.
그냥 넘어갈 것을 억지로 오버를 하고, 그냥 거절하면 되는 것을 싫은 내색하지 못한 채 불안해하며 말없는 동의를 한다. 특히 그가 아무런 말도 없이 싫어하면서 억지로 받아들이는 모습은 왠지 모르게 과거에 나의 모습이 보인다. 너무 순수하기에 더욱 더 순수하지 않음으로 보일 수 없는 영혼을 말이다. 그는 아주 솔직하고 순수했다. 너무 순수했기에 할 말보다는 할 말이 아닌 것으로 했다. 누군가에게 가서 의지하다 싶다가 어느 순간 훌쩍 도망친다.
남들이 보기에는 이상해 보일지 몰라도 자기 내부의 이성적 가치에서 합당하다. 그러나 그것은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 오로지 요조의 안에서만 존재하는 하나의 진실일 뿐이다. 더럽혀지고 싶지 않아 더 더럽혀지는 그의 슬픈 영혼 속에서 그는 정말 인간이고 싶었으나 인간실격이 된다. 무엇에 의지할 수 없는 요조, 그리고 그런 요조에게 빠져드는 여자들까지.
요조에게는 여자들의 공간 속에 묻혀 살아간다. 그의 최초의 여자는 어린 시절이다. 그는 아주 잘생기고 지적인 남자다. 게다가 비위 맞추는 것에 길들어진 그에게 남이 싫어하는 기색이 보이면 금방이라도 그 기세에 따라간다. 그러다가 어린 시절 집안의 하녀에게 성적 희롱을 당한다. 그로부터 그에겐 여자라는 존재는 하나의 안식처로 보이기보단 어둠으로 끌고 가는 세계로 되었다.
여자에 술, 담배, 수면제, 모르핀까지 그의 인생은 오로지 타락과 정신적 피폐로 얼룩지게 된다. 이 이야기에는 고정되어 있는 하나의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그 진리를 무시하고 파괴하고 무시하는 것이다. 그의 모습은 아마도 작가의 심리를 반영했을 것이다. 소화 10년은 1935년, 일본이 대동아 전쟁을 일으키기 전이다. 소설에서 나오지 않으나 애니메이션에서 요조의 친구 아닌 친구로 나오는 호리키는 처음에 마르크스주의자로 나오나 이후에는 전쟁의 소용돌이로 빠져간다.
이에 반해 요조는 그 세계에 빨려 들어가지 못한다. 자신은 그런 전체적이고 숨 막히는 곳에는 살 수 없었다. 단체생활을 거부하고, 오로지 개인적인 행동을 하는 요조, 그런 주제에 사람을 정말 그리워하는 요조, 그의 절망은 삶에 대한 희망이나 꿈보다는 현실 자체에 대한 무기력한 자신을 혐오했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은 되지 못하고, 자신이 믿었다고 생각한 것은 더 큰 배신으로 돌아왔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운명이고, 그저 자신을 몰아넣을 수밖에 없는 젊은 청춘이었다. 아니 슬픈 청춘이었을 것이다. 그는 어떻게 보면 미남자에 예술과 문학까지 두루두루 아는 지식청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지식인에겐 그 세계란 그저 숨도 쉬기 어려운 세계였을 것이다. 강제적으로 억지로 따라야 하는 것이 사회의 규율과 도덕이 되어버린 따분한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공간에 물들어 갈 수 없는 작가와 요조이었기에 더더욱 타락한다. 오로지 타락하는 자신에게서만 자신이 있을 공간이라 여긴 것이다. 작품 마지막에 요조는 정신병원에 갔다가 어느 시골 바닷가에서 늙은 노파의 시중을 받은 채로 살아가나 여전히 약물에 의존하고 살아간다. 27살인데도 40대처럼 보이는 흰머리들은 그가 살아온 인생이 얼마나 괴롭고 슬펐음을 상기시킨다.
부끄러운 자신의 아버지와 그 아버지 밑에서 눈치를 보며, 아무 의지를 품지 못한 채 죽어간 자신을 말이다. 인간실격을 보면 요조는 정말 겉으로 본다면 인간이하의 존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인간이하로 만든 요인은 무엇일까? 광인이란 존재는 근현대사회로 들어서며 분리와 격리 그리고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진정한 광인은 자시만의 세계를 마음껏 보일 수 있는 하나의 예술, 종교, 철학의 승화자이다.
그런 것이 허락되지 않은 세계와 공간 그리고 그 속에서 마음이 병들어가는 요조, 그가 단순히 인간답지 못함을 지적하는 것보다 그가 인간다움을 잃은 채 낙담하는 이 세계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식이라고 보는 것이 정말 상식인지 그것이 도리어 인간 자기 자신에게 독으로 물들지 않은가 라는 의문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