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 신문 가난한 독자
손석춘 지음 / 한겨레출판 / 2002년 4월
평점 :
절판


부자신문과 가난한독자, 이 책은 다소 불편한 진실을 알리는 책이다. 보통 신문의 기능을 무엇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신문(新聞) 그것은 새로운 것을 널리 알리는 도구이다. 지금이야 인터넷과 TV, 전화, 휴대폰 등의 미디어를 접촉할 수 있는 도구가 있으나, 적어도 이런 체계들이 없거나 아직 실용화되지 않았다면 정보의 필수적인 도구는 사람과 대화함으로써 직접 알 수 있는 대화(對話)가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는다면 사람의 눈으로 정보가 가능한 방법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눈으로 볼 수 있는 정보라는 것은 사람이 직접 대화하는 것보다 담을 수 있는 정보량이 엄청난 것이다. 게다가 사람과 사람이 대화할 수 있는 것에서 사람의 하루에 주어진 시간이 한정되어 있으며, 그 한정된 시간에 말을 계속 할 수 있는 체력의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제일 효과적인 방법은 오로지 시각적 정보다. 시각적 정보는 말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기록으로 관리할 수 있기에 매우 효과적이다.

 

그렇다면 그런 정보의 공간적인 체계를 담을 수 있는 정보체계가 바로 신문이다. 이전에 어떤 애니메이션에서 신문의 위력을 본 적이 있었다. 신문의 복제로 통해 사람들을 주술에 빠지게 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런 내용은 충분히 가능하다. 신문이란 정보매체가 진실 된 보도가 아닌 거짓된 허위정보로 채우거나 또는 왜곡 내지 허황된 소설로 지어내면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어느 순간 그것이 거짓이 아닌 사실로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특히나 신문은 글과 그림으로 이루어진 정보체계이므로 청각적 정보처럼 인간의 무의식적인 부분을 건들기 보다는 이성적인 영역에서 더욱 강조할 수 있으므로, 인간의 판단능력 즉 이성적인 사고 관념까지 조작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신문이 이토록 중요한 이유는 바로 그 정보의 매체와 더불어 그 매체는 미디어로서의 기능을 톡톡히 전가할 수 있는 점이다.

 

특히나 문자라는 언어정보를 기록할 수 있는 체계에서 기존 인간들은 문자에 대해 잘 몰랐다. 가령 중세유럽에 자국어로 성격을 기술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라틴어로서 기술했다. 만약 자국어로 성격을 보거나 번역할 경우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았다. 심하면 심지어 인간의 생명까지 그냥 빼앗을 수 있는 점이다. 언어라는 것은 지식을 담은 하나의 방법이므로, 언어는 곧 지식이고, 지식은 일부 사람들에게 집중되어 있기에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런데 그 문자와 언어가 대량적으로 유포되면 어떻게 될까? 기존에 언어는 일부 엘리트만 허용되었다. 어려운 라틴어가 성격으로 되어 있다면 교회의 권위에 응대할 수 없다. 또한 과거 한국역사에서 조선시대 상황을 봐도 마찬가지다. 모든 문서를 한글 즉 훈민정음이 아닌 한자로 되었다는 점은 글을 배울 수 있는 사람이 한정적이란 것을 의미한다. 한정된 자들의 문자체계에서 지식과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지식은 권력이고, 권력은 지식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공개된다면 지식의 분배가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따라서 언어의 순환화로 통한 지식의 전파가 신분체계를 바꾸는 것에 큰 변화를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반드시 그렇다고 하여 사회적인 인식 그 자체가 변화되지 않았다. 오히려 글을 배우게 하여 한정적인 부분만 배우는 것으로 세뇌시킬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신문의 기능을 사람들의 인식이나 의식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으면 이것만큼 무서운 방법은 없다. 미디어라는 것은 사실 정치적, 경제적인 권력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 권력의 원하는 바가 대중 통치라는 것이라면 더더욱 심각하다. 가령 "국민을 통제하는 방법은 국가권력보다는 미디어가 훨씬 유용하다"라는 문구처럼 미디어로 통한 정신적 통제는 매우 심각하다.

 

이런 문제를 언론의 양심적인 행위에 따라서 얼마나 많은 정치적, 사회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가를 알 수 있다. 바로 여기 “부자신문, 가난한독자”에서는 그 동안 우리가 알지 못하던 지난날의 추악한 모습을 지닌 신문사들의 악행들을 고발한다. 제일 인상 깊은 모습은 현대사회에 와서 최고의 독재자 전쟁광으로 평가되던 히틀러가 나왔다.

 

어느 신문사에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세계를 전쟁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히틀러에게 히총통(總統)이란 단어와 더불어 대사자후(大獅子吼)를 외치고 있어 우리도 질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 민족은 독립주권도 가지지 못한 채 징용되는데 말이다. 게다가 그것을 만든 기사매체에서는 관동군으로 가는 것을 독려하고, 전쟁에 참전한 군인들에 대해 영광된 죽음이라고 하고, 심지어 그의 가족까지 당연한 대장부의 도리라고 한다.

 

그런 부당한 행위를 한 신문사를 이성적으로 판단해 보자면 우리 민족에 대해 과연 도움이 되는가 마는가에서 정상적인 이성능력을 가진 사람일 경우 반드시 의문을 품는다. 1932년 이봉창 열사가 독립투쟁을 하는 기사에서 우리는 어떻게 보는가? 그런데 그 이봉창 열사를 비난한다. 그런 신문사가 지금까지 잘 먹고 잘 사는 회사로 변모했다.

 

이것이 합리적인 결과라고 보는 것일까? 시대적으로 사회진화론적으로 그럴 수 있다고 보자? 그런 행동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신문, 일제의 억압받았다고 하는데, 1940년 대동아전쟁에서 당시 돈 100만원이나 집어먹고 폐간된 것이 일제의 억압이라고 한다면 돈만 먹고 적당히 말을 돌리면 민족의 광복과 독립을 위한 선발주자로 사기 치는 것을 간단히 속일 수 있다.

 

물론 이 책이 100% 객관적인 관점이라고 할 수 없으나, 적어도 그렇게 한 사실에 대해서는 100% 사실이다. 누가 그렇게 보던지 사실에 대해서는 부정할 수 없다. 사회진화론적으로 당시 그렇게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쳤다. 하지만 지금 시대적 상황에서 사회진화론적으로 본다면 당장 사라져도 의심할 수 없을 정도다. 그때는 그때? 지금은 지금? 그러면서 뻔뻔한 거짓의 과거 신간회를 찾는 그들에게 가난한독자들은 언제까지 그들을 부자신문으로 만들어주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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