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사 4 - 386세대에서 한미FTA까지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4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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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史 4번째 책을 읽으면서 생각하는 것은 아직도 한국은 아무도 책임을 지려 하지 않으려고 하는 나라는 점이다. 이것을 두고 무엇이라고 하면 될까나? 처음부터 누군가에 대한 강제적인 방법과 조치가 동원되어도 그것의 시작과 동시에 끝을 결말내지 않은 부분이 그렇다.

 

1980년 광주시에서 일어난 학살사건에서 어느 사람들은 혁명과 운동, 혹은 반란 내지 폭동이란 말이 오고간다. 누구의 시선과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역사라는 잔혹한 이야기들의 기록들은 언제나 승자들의 얼굴에 미소를 보내준다. 즉 패자의 역사는 기록되지도 혹은 되더라도 그들의 원래 이야기보다는 다른 이야기로 기록된다.

 

그 최고의 긴장감에서 광주민주화운동이란 큰 상처 속에서 최초 발포자의 이름이 거론되지 않았다. 아니 현장 지휘관이 총을 들고 있는 군인들에게 전면에 향하여 발포하라는 명령 이전에 그것을 지시한 그 이상의 존재 역시 드러나지 않은 채 여전히 미궁이다. 결국 죽은 자와 죽은 자의 가족과 친구, 또는 죽였던 자와 죽였던 자의 옆에 있던 사람 모두 피해자로 남게 되는 오명을 안고 간다.

 

총을 맞거나 혹은 심한 폭력에 죽거나 다친 사람들은 당시 그 운동을 참여 여부를 따라서 결정된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자리에 있었기라는 광기의 살육 속에 사라져갔다. 죽은 자의 무덤에서 말은 없다. 하지만 남은 자의 기억 속에서는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상처와 영광이 될 것이다. 흔히 상처는 영광 내지 훈장 또는 상징으로 통하기도 하다. 희생양이란 존재는 최고의 악인과 동시에 최고의 행동가라는 2가지 딱지를 달고 다니는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시대적인 흐름과 상황, 정치적 사회적 관계에서 계속 빙글빙글 돌아간다. 우리는 이런 세계에서 급격한 민주주의 사회를 맞이했다고 하나, 사실 유럽의 민주주의 역사에 비해 그 짧고 짧은 역사에서 민주주의가 얼마나 발전했냐고 물어보는 것보다 차라리 민주주의가 얼마나 발전될 수 있을까라고 물어보는 것이 현명하듯 하다.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란 사실이다. 사실 공화국이란 존재에 따라 국민이 주권이 아니라 군왕이 정치지배자이여도 공화국은 존재할 수 있다. 왜냐하면 공화국은 전쟁으로 인해 국민이 신체적, 재산적, 심리적 피해를 입거나 혹은 그런 전쟁에 따른 부담을 느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본다면 직접적인 무력충돌을 피하기 위해 이른바 전투무장은 필수불가결적인 정치적인 행위다.

 

전쟁은 결국 정치적 형태의 가장 물리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전쟁과 더불어 변화되는 사회적 정세는 매우 어렵고도 난감하다. 왜냐하면 전쟁의 결정권을 내리는 사람은 극소수의 인원에 비해 전쟁으로 인해 휘말리는 사람들은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전쟁은 곧 국민의 의지와 달리 눈앞에서 펼쳐지는 하나의 쇼이다. 왜냐하면 전쟁터에서 총과 칼을 들고 싸우는 병사들은 주체적인 존재가 아니라 객체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직접 전투에 임할수록 전쟁의 주인공이 아니라 전쟁의 방관자로 변모되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리스 폴리스국가에서 그리스 사람들이 직접 칼을 들고 전쟁터에 가서 국가를 지키고, 그 권리로서 정치체에 대한 참여가 오히려 더 민주주의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 정치적인 입장과 차이, 거기서 벌어지는 현상에 따라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는 많은 고개를 넘고 넘어야 했다. 4번째 책에서는 한국전쟁에 대한 비극이 인상적이다.

 

미국하면 뭐라고 할까나? 미국이라는 나라는 우리가 전쟁에 의해 위기에 빠질 때 목숨을 걸고 방어해주었다. 많은 젊은 미국인들이 자유와 평화라는 가치관에 의해 뼈를 여기에 묻었다. 하지만 그들의 고고한 가치관과 달리 그들을 이곳에 오게 한 정치적인 영역은 달랐다. 한반도란 위치는 미국과 소련의 이데올로기 대립에서 힘겨루기하기가 제일 좋은 곳이었다. 정치적으로 불안하고 안정이 안되어 있으며, 미국과 소련이란 국가가 어떤 나라인지 파악이 제대로 안되었기 때문이다.

 

뭐든지 좋은 일은 있다면 나쁜 일도 있다. 전쟁터에서 분명 북한 괴뢰군들을 저지하고 올려 보내지 않았으면, 대한민국은 최소한의 민주주의 국가로 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는 좋은 일이 있듯이 나쁜 일도 있다는 점이다. 미군과 한국군, 그리고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민간인 살인은 잊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이 책에서 우리가 감추고 싶은 기억을 다룬다. 한국에서 조선역사는 무척이나 많이 다루어도 근현대사를 다루고 싶지 않아 한다.

 

왜냐하면 지금 현재까지도 한국 정치사회적으로 상당히 영향을 미치는 부류가 여기에 많이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근현대사를 알아가는 것은 보이고 싶은 부분도 있겠지만,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기억이 있는 것이다. 그 기억이란 남을 짓밟고 무시하고 자신의 이기심과 출세를 위한 발판으로 많은 일들을 자행한 것이다. 대한민국 국가에서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그 지배권은 대한민국 정부고 대한민국 국방부다. 하지만 아직까지 전시 작전통제권은 미군이다.

 

물론 많은 전투물자와 장비가 주한미군의 영향이 있는 것은 알고 있으나, 주한미국이 전시 작전권을 지배하는 것은 국권을 가진 국민으로서 납득하기가 조금 힘들다. 이것은 마치 조선시대에 명이나 청에 충성을 다하고 털리고 있는 조선과 비슷하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장갑차 소녀의 죽음에 대한 문제, 무참하게 맞거나 겁탈당하거나 심지어 폭행으로 죽은 사람, 그 밖에 많고 많은 범죄문제와 그 외의 문제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과거 우리나라가 일본에 의해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필두로 을사조약과 경술국치일까지 당하게 되면서 우리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일본인들에게 농락을 당했는가? 가다가 맞아도 고발할 수 없고, 조금만 대들어도 퇴학에 감금에 폭력에 시달렸다. 그것이 아직까지 반일감정으로 남아있다. 그런데 지금은 미국이란 나라에서 미묘하게 그 감정이 밀고 당긴다. 물론 미국 내에도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문제는 그 자유와 평화가 자신들만의 것인지 아니면 자신 이외에도 있는지가 관건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은 이른바 기득권 세력에서의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 정치적인 이해로 외교를 하거나 혹은 이런 문제를 의문시하는 경우 강제적인 제압이 들어가기도 한다. 이른바 귀에 걸면 귀걸이와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것이다. 나는 종종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 한국 교육에서는 역사와 철학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다고 말이다. 역사를 알면 수치스런 부분을 들켜 곤란한 사람이 있고, 철학을 알면 정치적으로 곤란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역사적인 사실근거와 거기에 따른 사건들을 제대로 알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역죄로 몰려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더구나 더 재미있는 사실은 사실을 알려고 하지 않아도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도 당하고 살았던 점이다. 어느 날 과거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이 길거리에서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그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이 어떤 사람에게 붙잡히게 되었다. 바로 그 사람은 일제강점기 시절에 일본 앞잡이로 독립군을 잡고 고문하던 친일파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경찰에 들어가 권력으로 횡포하다가 과거 자신의 잘못을 아는 사람을 빨갱이로 몰아 정치적으로 숙청한 것이다.

 

아직도 우리나라는 과거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시대와 더불어 625전쟁 그리고 전쟁 이후의 공안정국까지 말이다. 당시 시대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하나 과연 그럴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아니라면 최근에 오히려 한국이 일본 치하에 들어가서 계속 그 시대적으로 살아야 했다고 하는 사람도 보았다. 군사독재 정부를 찬양하는 존재에 대해 어느 정도 약간의 이해는 해볼 수 있겠으나, 일제강점기에 창씨개명과 더불어 한국문화와 정신을 없애려 했던 일제의 횡포를 찬양하는 것은 이해가지 않는다.

 

그래도 분명 이들은 당시 그때가 그리울지도 모른다. 을사오적의 후예가 역사학자가 되어 역사박물관장을 하는 이 시대에 매국노가 애국자 내지 근대사의 선구자란 말을 듣는 세상이니 그때의 찬란한 권력이 그리울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국민들의 눈을 속이고, 국가를 좀먹은 부류이다. 우리 사회에서 많이 통용되는 이야기 중에서 “국가를 위해, 국민을 위해, 사회를 위해”라는 슬로건에 왜 아직까지도 이런 사람들을 쓸어버리지 않은가 라는 의문을 품는다.

 

아니 그런 의문을 품은 후에 친일파의 꼬리표가 무척이나 확실해서 그것을 밝히려 하면 왜 이상한 인간으로 몰릴까 싶다. 외국에서는 민족주의자는 분명히 보수우파에 파시즘에 가까운데, 우리는 오히려 우파적이지 못한 나라가 아닌가? 그런 가운데 민주주의는 과연 민주주의로 가는지 아니라면 만주주의로 가는지 한번은 의심가기도 한다. 한국 권력이 집중되고, 개방되지 않은 곳에서는 일본이 세운 만주국이란 괴뢰국과 더불어 만주국에서 나온 만주군이란 유령이 계속 오고가고 있다.

 

만주주의는 해방을 맞이해도 떠나지 않고, 625 이후 더욱 강해진 것도 모자라 더욱 더 치밀하게 되어가고 있다. 어느 시인의 감옥소에는 종이와 볼펜이 없었다. 그곳의 감시자는 한국인이었다. 그런데 그 이전의 일본 순사가 감시할 때는 볼펜과 종이가 있었다. 이른바 동족이란 것이 더욱 강렬히 분노로서 다가오는 것일까? 보통 가까운 친구와 가족들이 싸우면 더 골이 깊은 원수가 된다고 한다. 아니라면 자신의 형이 사회주의자로 몰려 그것을 회피하려고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킨 어느 대통령의 몸부림처럼 내가 당하지 않으려면 남을 당하게 해야 한다는 생존의식인가?

 

이런 폭력과 광기가 난무하던 시절에 한국사회는 아직도 골이 깊숙이 들어 가있다. 이 책의 한 장의 주인공인 신영복 교수의 어린 시절에 나온 이야기처럼 어느 마을의 청년들을 모조리 죽이고, 그 목을 잘라 귀에 철사를 꽂고 수많은 머리를 연결하여 다리나 마을 어귀에 장식하던 광기의 축제가 당연한 것처럼 말이다. 세상은 뭐든지 깊게 생각하기를 좋아하지 않은 것 같다. 자신들만의 한 가지의 색으로서 구분지어 그 선을 넘어가는 존재에 대해서는 정의의 철퇴라는 광기가 이성이란 합법으로 변모된다.

 

문제는 그 광기는 아직도 계속 이어져 간다. 사회구조적으로 일어나는 억압과 은폐들은 이제 당연시 되는 일들이 많아졌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폭력사건, 군대에서 일어나는 총기사고, 회사생활하며 받아야 하는 각종 스트레스, 가정에서 일어나는 불화 이 모든 것들은 그저 단순히 우연에서 발생한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역사라는 것은 과거를 배운다. 과거를 배우는 것은 잘한 것과 못한 것 모두 배운다. 그 이유는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앎으로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거에 일어난 사건들이 계속 반복하여 일어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역사는 단지 “있었다.” 에서 그것이 왜 있었는가라는 의문을 제시해야 한다. 그 의문이 현재의 문제를 당장 해결해줄 수 있는 것은 아니겠으나, 그 문제 자체에 대한 답을 알게 되는 것이다. 지나간 일은 다시 되돌아 갈 수 없어도 앞으로 일어나는 미래를 변화할 수 있다. 인간이 정말 시간적인 존재라면 그 과거의 존재에 대한 부분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생각해보는 철학적인 자세도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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