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오늘 출근합니다! - 사회로 나간 장애 아이들의 기적 같은 이야기
황윤의 지음 / 학지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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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는 다양한 존재적인 형태로서 살아간다. 그런 인간의 존재에서 인간은 완벽함을 가지고 나올 수는 없다. 누구는 태어나면서 좋은 집안과 환경, 그리고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태어나며 어느 누구는 좋지 못한 집안과 환경 그리고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지 못할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이런 가진 것과 가지지 못한 것으로 인해 서로 간의 벽이 태어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인간이 태어나면서 모두 다르고 차이가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인간의 탄생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부모의 선택에 의한 피선택권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만큼은 알아야 한다. 자신의 의지로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 그를 존재하게 한 그 존재형성자 역시 자신의 의지로 세상에 나온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우연의 존재로서 세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거기서 태어나면서 우연이 아닌 귀납적인 법칙은 오로지 부모가 누구이고, 자신이 살아가는 곳이 어디이며, 자신이 어디서 무엇을 할 수 있도록 주변이 형성되어 있는가이다. 인간이란 결국 환경적인 요인에 벗어날 수 없는 사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라고 하여 그런 사회적인 존재에서 모두 피선택한 존재라고 하여 자기 인생을 피선택적으로만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인간에겐 이성이란 것에 의하여 판단을 내리기 하며, 또한 감정이란 것이 있어 자신을 표현하기도 한다. 따라서 인간에게 이성과 감정, 그것을 나타낼 수 있는 육체적인 존재는 결국 인간을 사회적으로 살아가는 것에 있어서 필수적인 사항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부터이다. 모든 인간이 자신의 이성과 감성이 완벽하지 못하더라도 그것을 제대로 소유할 수 없는 존재도 있으며, 게다가 자신의 신체마저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장애우라는 몸과 마음이 약간 불편한 존재이다. 그들은 몸과 마음이 불편할 뿐 우리를 불편하게 하지는 않는다. 정작 그들을 불편하면 할수록 우리들의 양심과 가치관이 더 불편하게 될 것이다. 제1의 철학은 윤리학이라고 주장한 서구철학자 레비나스는 사회의 건강도를 알아보기 위해서 사회적인 약자의 얼굴로 통해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들은 장애인, 고아, 이방인과 같은 사회적으로 매우 열악한 위치에 놓인 존재이다.

 

이들은 모두 자신이 사람답게 살아가고 싶어하나, 자신의 처한 사회적 환경과 경제적인 상황에 의해 많은 인권적인 소외에서 힘든 삶을 영위한다. 따라서 이들에 대해 처우와 개선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 중에서 장애우의 경우는 매우 심각하다. 이들은 대부분 태어나면서부터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경우가 다반하다. 선천적인 장애는 결국 자신의 인생과 더불어 자신의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친다.

 

이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런 장애를 안고 태어난 것보다는 그런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점이다. 살아가는 것에서 장애우라는 이유 하나로 모든 것으로부터 배척을 받으면 이들에게 내일이란 아름다운 말을 사용할 수 있을까?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장애인이란 딱지를 붙이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이지만 할 수 있다는 사회참여권을 줘야 하는 것이다. 인간의 가치를 매기는 점에서 마르크스는 노동이라고 하였다.

 

마르크스가 주장하듯이 인간은 자신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의 노력으로 통한 가치의 생산이다. 인간이 가치를 생산하면 그것이 하나의 사회적으로 관여할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노동할 수 있다는 기회가 있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존재를 보여주기도 하면서 또한 경제적으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기회도 준다. 장애인들의 문제에서 가장 심각한 점은 이들의 삶의 질이다.

 

이들 대부분은 경제활동을 제한하는 사회상으로 인해 평생 그냥 그 자리에서 있어야할 문제점을 남긴다. 만약 이들이 일을 한다면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고 자신의 삶에 큰 도움이 될 것이며, 또한 경제활동으로 통해 가난함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 장애아동이 태어난 곳에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계층보다는 가난한 계층이 더욱 많다. 게다가 소외계층 내지 편부모 또는 부모에게 버려진 고아들처럼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 무엇보다 이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이들에게 사회적인 참여권 내지 노동으로 통한 자신의 가치를 현실화하지 못한다면 이들은 평생 자기비하에 빠질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누가 옆에서 돌봐주지 않으면 삶을 포기해야 하거나 혹은 옆에 있는 것이라도 가족이나 주변 사람에게 피하지 못할 짐이 될 것이다. 또한 국가 예산적으로 이들을 그냥 그대로 지원하는 것은 큰 부담이 아닐 수가 없을 것이다.

 

만일 그런 부분을 조금이라도 개선한다는 것은 국가적으로 예산절감과 동시에 이들에게 직업을 주어서 사회실직률을 감소하고, 특히 장애인들의 구조적인 결함을 오히려 이점으로 삼아 그것을 활용한다면 사업장에서는 부족한 인재의 충원이 될 것이고, 장애인들에게 삶의 당위성을 찾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장애인이라고 일을 하지 마란 법도 없고, 사회생활을 하지 마란 법도 없고, 심지어 사랑을 하여 결혼하지 마란 법도 없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들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 독인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그는 난쟁이에게는 보통사람처럼 대하기보다는 보통사람이 난쟁이처럼 되어야 한다고 했다. 우리가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하고 일반적인 획일화된 관념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을 사회상과 일반사회적인 부분을 이해하기 보다는 역으로 그들을 이해하여 그들 스스로가 우리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필요한 방법이다.

 

그것은 결국 그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부여하여 그들 스스로 인간 스스로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에게 가장 큰 기쁨은 많은 금전과 권력보다는 자신에게 합목적성이 일치하는 일을 하여 그것이 사회에서 인정을 받는 것이다. 장애인들이라도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할 법은 없다. 그들에게 하나의 기회공간을 열어줌으로 그들 스스로 사회적으로 기쁨을 얻어가는 것이다.

 

장애인이라는 최악의 조건이라도 우리가 최소수혜자로서 그들을 생계와 교육기회를 보장하여 그들에게 사회적인 참여를 위한 직업의 기회를 줄 수 있을 때, 그들은 세상이 자기를 외면하기보다는 자신 스스로 사회로 들어가서 구성원이 될 수 있다는 하나의 희망을 안겨주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오늘도 나는 출근합니다에서 출근하는 것은 곧 노동을 하는 것이고, 노동으로 통해 이들은 자신이 살아있다는 자기존재적인 가치를 발견할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 전반적으로 통하고 있는 고정관념 내지 차별의식을 조금씩 정리하고 그들을 따뜻한 눈빛으로 대하여 마치 그들이 우리의 이웃이라는 생각하는 것이 바른 사회상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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