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숙 - 부드러운 열정, 세상을 품다
한명숙 지음 / 행복한책읽기 / 2010년 2월
평점 :
품절


19C 독일에 위대하고 아름다운 영혼을 지닌 시인(詩人) 하인리히 하이네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시는 많이 읽어보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가 남긴 단 하나의 시는 너무나도 인상 깊고 잊을 수 없는 강한 메시지를 주었다. 그것은 “직조공(織造工)의 노래(歌)”였다. 그 시는 아래와 같다.

 

침침한 눈에는 눈물이 말랐다. 그들은 베틀에 앉아서 이를 간다. 독일이여, 우리는 너의 수의를 짠다. 우리는 그 속에 세 겹의 저주를 짜 넣는다. 우리는 철커덕거리며 베를 짠다.

 

첫 번째 저주는 하느님에게, 추운 겨울에도 굶주리며 그에게 기도하였건만, 우리의 바람과 기다림은 헛되었다. 그는 우리를 원숭이처럼 놀리고, 조롱하고, 바보로 만들었다. 우리는 철커덕거리며 베를 짠다. 우리는 철커덕거리며 베를 짠다.

 

두 번째 저주는 국왕에게, 부자들을 위한 국왕에게, 우리의 비참한 삶을 본 체도 않고 우리를 협박하여 마지막 한 푼까지 앗아가고, 우리를 개처럼 쏴 죽이게 한다. 우리는 철커덕거리며 베를 짠다. 우리는 철커덕거리며 베를 짠다.

 

세 번째 저주는 잘못된 조국에게, 이 나라에는 오욕과 수치만이 판을 치고, 꽃이란 꽃은 피기도 전에 꺾이며, 모든 것이 썩어 문드러져 구더기가 득실거린다.

 

북은 나는 듯이 움직이고 베틀은 삐걱거리며, 우리는 밤낮으로 베를 짠다. 썩어빠진 독일이여, 우리는 너의 수의를 짠다. 우리는 그 속에 세 겹의 저주를 짜 넣는다. 우리는 철커덕거리며 베를 짠다. 우리는 철커덕거리며 베를 짠다.

 

읽어보면 그들의 원망과 분노, 한탄이 하늘 위를 찌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시를 오늘 다시금 읽어보게 되었다. 그것은 한명숙씨가 노동가요 배포와 관련된 일로 구속을 당한 직후 심한 고문과 독방에 갇혔을 때의 이야기다. 그때 공안경찰들이 와서 그녀를 잡아가게 만든 노래는 다음과 같다. 시와 노래는 비슷하니 그 음율적으로 흐르는 언어들은 인간의 마음에 와닿는다.

 

노동자가 얼마나 노동을 더 해야 살수 있나?

우리 모두 지금까지 피땀 흘려 일했는데 아~ 슬픈 현실,

지금까지 빼앗겼는데 계속해서 착취당하면,

노동자는 기계인가요? 느낀 것이 너무 많아요.

설움에 지쳐서 눈빛에 보여요. 내일의 찬란한 빛이.

 

당시의 노동자의 대우는 매우 혹독했다. 사실 한국 민주공화국이라면 당연히 인간은 인간답게 누리고 살 수 있는 자격과 권한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박탈당하고 억압당하고 위협당할 경우 이미 민주공화국이 아니다. 한명숙씨가 총리가 되기 전의 인사청문회의 질문이 정말 코미디와 같았다. 누가 그녀에게 질문을 했다.

 

대한민국은 무슨 국가냐고? 그녀의 대답은 민주공화국입니다. 질문자가 다른 코멘트를 추가한다. 자본주의국가입니다. 사실 자본주의국가 점에서 한국은 경제자유가 보장되어있는 자본주의국가는 맞다. 그리고 개인의 역량과 능력을 키우는 점에서 자본주의구조사회가 장점도 있다. 문제는 그런 구조사회에서 정말 자유롭게 하는가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일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돈을 지급받지 못했다면, 어느 사람이 정해진 근로시간이상으로 일을 하고 대가를 지불받지 못한다면, 만일 어느 사람이 안전적인 장치와 보건환경적인 요소에서 소외를 당하면 지금이야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것이 맞는 처사이냐고 말이다. 이 책을 볼 때마다 지금에 와서 당연한 것들이 당시 그녀가 살아온 길에서는 당연하지 않았다.

 

여성에게 사회적 정치적 참여권을, 학생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국민들에게 맑은 물과 공기를, 너무 당연하고 맞는 말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실현은커녕 오히려 단어조차 내뱉지 못한 시절이 있었다. 한명숙씨의 이야기는 그런 삶 인듯 하다. 지독한 가난 속에서 생과부가 되어 13년 넘게 남편을 보지 못한 여인, 법적인 절차도 없이 납치되듯이 경찰에 끌려가서 갖은 고문과 협박에 시달리고, 거기에 모자라 가족들까지 끌려가고 말이다.

 

가족 중에 남동생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신체적인 불구를 얻었다. 그러나 그 시대에는 당연했던 모양이다. 세상은 언제나 고민하고 사유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항상 일정한 지선에 생각을 치우쳐져 편하게 생각하는 것을 좋아한다. 또한 편하게 생각하기 좋기에 남들의 입장에 대해서는 침묵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이익에서는 눈빛이 변한다.

 

기회주의적인 인간형에 길들어진 사회구조에서 세상은 각박해져 가고,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자는 더욱 절망으로 몰아간다. 그렇게 밟히고 밟힌 사람과 그 사람들과 같이 하면서 본인마저 밟힌 한명숙씨의 이야기는 한국사회 이면에 가려워진 어둠이 보인다. 자기를 고문하던 사람들을 원망했냐는 말에 하지 않는다고 하나, 연약한 여자의 몸을 발로 차고 몽둥이로 후려친 존재들에 대한 용서한다는 말조차도 쉽지 않을 텐데 말이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을 보면서 조금 공감 가는 부분과 더불어 아쉬운 점이 있었다. 여성부 장관 시절, 아직까지 한국사회의 분위기를 생각하면서 전통적인 부분의 혼동이 남은 것이 안타까웠다. 한국 전통 문화는 조선사회를 많이 따라가는데, 특히 성리학 부분에서 조선 후기부터 시작된 폐단적인 부분을 아직까지 수용하는 점이다. 확실히 전통문화의 존재와 현실화는 필요하다. 한국인들의 정체성에서 과거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진정한 한국전통이 아닌 것이 당연지사로 넘어오는 점에서 말이다. 여성 인권문제에서 현실적으로 우리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그나마 지금은 많이 개선되었으나, 학대받아온 여성의 권리문제와 더불어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그저 기계적으로 살아가는 남성도 안타까운 현실이다. 대학교 시절 여성학 강의를 들으면서 여성 인권문제도 문제이나 남성의 억압된 사회도 같이 생각할 부분이었다. 문성근씨와 황신혜씨가 출연한 “생과부 위자료 소송사건”처럼 인간은 항상 억압되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취지의 여성부가 지금은 안타까운 현상이 되어 있다. 한명숙씨의 이화여대란 가난하고 소외된 노동자, 농촌, 어린이, 노약자, 여성이 주된 초점이라면 지금의 여성부는 엘리트주의적인 이화여대 엘리트를 위한 정치권리 노선이 아닌가도 싶었다. 한명숙씨가 추구한 페미니즘이란 소외된 계층에 대한 인간애적인 마음이었다. 그렇게 살아온 그녀가 무참히도 가슴을 짓밟힌 일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그런 짓밟힌 채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보다 더욱 짓밟힌 이들과 같이 가는 것이 그녀의 의지 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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