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 주요 본문에 대한 해설.번역.주석
조대호 역해 / 문예출판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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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形而上學)의 시작점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로 알고 있다. 그의 형이상학은 현대사회에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여전히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의 형이상학이란 철학, 미학, 신학, 자연과학 등 많고 많은 분야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런 형이상학을 알아간다는 것은 우리 인간들이 사유하고 인식하는 모든 것들의 출발을 찾아 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읽어보며 생각한 것은 형이상학이란 정말 어려운 학문이나, 그 학문적 영역이 내가 기존에 알고 있는 내용이나 또는 일상적으로 접하는 분야에서나 흔히 겪을 수 있는 부분도 있었다. 일단 meta-physics라는 것은 physics의 물리학적인 범주에서 그 너머에 있는 것을 탐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당장 인가의 눈에 보이는 것이든 혹은 보이지 않은 것에도 연구하고 탐구하는 것이 형이상학이었다. 지금은 자연과학이란 분야는 형이상학적보다는 형이하학적에 가깝다. 과학기술의 발달과 갖가지 풀리지 않은 분야나 또는 새롭게 정립되는 분야 때문에 자연과학이 고대그리스에선 철학자의 영역인 반면 지금은 과학자 또는 그 과학을 실용적으로 이용하는 공학자의 영역가지 올라갔기 때문에 자연과학은 철학에서 가장 멀어지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현미경의 발달이 아주 크지 않았나 싶다. 현미경의 발달은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존재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시절에는 형이상학 영역에서 인간 그 존재에 대해 연구했다. 그런데 인간에 대해 연구하면서 인간 신체와 관련된 의학이나 또는 자연현상을 연구하는 기상학, 천체학, 생물학에서 당시 인간들에게 볼 수 있는 대상에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보이지 않은 인간의 세포가 보이고, 인간 주변에 있는 미생물들이 보이며, 지구 멀리 존재하는 태양계 행성까지 보게 되었다. 게다가 인간 신체구조와 작동원리, 해부학적인 학문발달은 인간 그 자체가 당시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진 사고와 다른 것을 증명했다. 물론 과학기술 발달은 인간의 인식을 변화할 수 있으며, 그 인식의 변화에서 인간 사고영역까지 변모시킨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서 다루는 그런 인간의 존재론, 인식론, 마지막으로 신학 영역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이란 학문으로 심리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지구과학, 철학 등의 영역으로 다룬 것이다. 단지 조금 내가 생각을 달리하게 된 부분은 형이상학에서는 물리, 논리, 윤리 3가지로 알고 있는데, 이 책에서는 윤리학을 다루지 않았다. 아마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란 윤리학 교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간간히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대한 자료언급과 주석이 달리기도 하였다. 일단 이 책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그 서적 원본은 번역하기 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형이상학을 연구한 철학교수가 연구한 내용으로 적었기 때문에 그런 내용이 들어간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을 보면서 형이상학이란 학문영역은 인간의 그 자체에 대해 다루는 존재론적 인식론적, 영혼적인 부분이 많기에 쉬운 도서는 아니다.

단지 그 다루는 내용들이 너무 우리 인간들이 살아가는 일상생활에서 너무 많이 접한다는 사실에 놀랄 뿐이다. 아무렇지 않은 듯이 지나가는 생활 속을 다루는 형이상학에서 인간의 사유라는 것에 대해 단지 사유할 것인가? 아니라면 그 사유에 대하여 다시 더 사유를 하여 그 사유의 존재 근본존재에 대해 탐구하는 점에서 어떻게 본다면 우리 인간들은 어떤 존재에 대한 인식에서 단순히 일정한 틀에서 생각하고 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다고 하여 이 도서를 읽으며 아리스토텔레스가 100% 옳다고 할 수 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와 현대사회는 당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신학 부분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명 아테네의 민주사회라는 것을 자신의 스승의 스승 소크라테스와 비슷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노예와 동물에게 사고할 능력도 없거니와 그들은 어떻게 해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당시 그리스 시대엔 노예사회가 존재했고, 지금은 존재하지 - 일부는 존재하겠지만 - 않는 것이 당연하다. 노예라는 존재도 결국 인간이고, 노예 역시 인간으로서 가지는 감정과 이성을 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부정했다. 그러면 노예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인간이 아닌 동물이라면 그가 세운 형이상학에서 아무리 논외로 설정해도 그가 세운 학문적 뿌리에서 명백한 오류를 저지른 점은 분명하다.

그래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비교하면 재미는 장면으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같이 있는 그림을 본다. 플라톤을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를 보며 손가락을 위로 가리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을 보면 손바닥을 아래로 향한다. 진리는 플라톤에게 이데아 세계에 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에 있다. 어떻게 보면 형이상학이 눈에 보이지 않은 것들일 수 있겠지만, 결국 눈에 보이는 존재에 대한 존재에 다가가니 눈에 보이지 않을 수 있다.

현실에서의 존재들에 대한 사유적인 사고에 대해 분명 사유의 대상은 눈에 보이나 사유 그 자체는 눈에 보일 리가 없다. 그런다고 하여 그것을 그저 있다고 하여 거기서 끝나기만 한다면 존재의 의미를 알 수 없다. 왜 존재하는 것이 존재하는 것인지, 아니라면 존재하지 않은 것이 존재하지 않으면 안되는가? 라는 질문처럼 있음에 대해 탐구하고 사유하는 형이상학은 여전히 인간의 인식론과 존재론 그리고 영혼에 대해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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