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학 - 악에 대한 의식에 관한 에세이 동문선 현대신서 40
알랭 바디우 지음, 이종영 옮김 / 동문선 / 2001년 11월
평점 :
절판


알랭 바디우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예전에 경희대학교 영미문화전공 이택광 교수님 덕분이었다. 이택광 교수님의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이다. 이른바 좌파라고 단순히 진보와 보수의 2원화적인 대립구도이기 보다는 인문좌파로 통해 보수나 진보나 모두 비판해야 할 하나의 과제를 알려준 도서였다.

따라서 우리나라처럼 좌우이데올로기가 명확하게 구분되어 상대방의 가치와 논리를 따지기 보다는 무조건 매도하는 것을 생각한다면 엄청난 착각이라는 점이다. 그런 도서에서 나는 알랭 바디우라는 이름을 본 것이다. 알랭 바디우를 소개한 그 책에서는 좌파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마르크스부터 시작하여 장 폴 사르트르, 루이 알튀세르, 발터 벤야민, 자크 라캉, 슬라보예 지젝, 자크 데리다 등 수많은 학자가 소개되나 그들이 순수하게 마르크스에게 모든 것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새롭게 해석하거나 혹은 반박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인문좌파라는 것은 다양한 학자를 소개하고 그들의 주요 사상을 소개하여 기존의 체계를 비판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체계를 비판하고 있는 것도 비판하는 것이다. 흔히 우리는 이런 표현을 하지 않은가? 비판을 위한 비판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온 근대현사를 거치어 우리가 오늘날 살아가고 있는 그 역사적인 흐름에서 많은 담론이 오고 가고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많고 많은 담론 중에서 윤리학을 우리는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인문학적인 요소에서 윤리학은 제1의 철학이라고 레비나스는 주장한다. 왜냐하면 윤리학이라는 것은 혼자만의 학문적 소양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에서 비로소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남의 입장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그리고 생각해 봄으로써 자신만을 위한 에고이스트가 아닌 진정 사람을 사람으로 대할 수 있는 인격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윤리는 다른 철학 내지 혹은 형이상학에서 다루는 부분과 다르게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의 사회, 문화, 정치, 경제 등에 크게 관여하고 있다. 그런 부분인 만큼 윤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파악한다는 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그 세계 자체를 새롭게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다보면 윤리라는 것은 어느 시대이나 중요하고 어느 사회나 문화에서도 중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다루던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나 각종 잔혹한 테러들은 왜 멈추지 않은 것인가? 분명히 그런 잔혹한 행동을 하는 무리나 단체 그 존재들도 자신에게 윤리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오히려 자신들의 윤리가치가 옳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문제는 그 옳다고 여기는 윤리가 과연 어느 정도까지 옳고 그른가를 판단하지 못할 뿐이다.

가끔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인간은 언어로서 모든 커뮤니케이션을 통제할 수 있을 만큼 지능화한 동물이다. 그런 인간이 언어로 통해 논리로서 상대방과 접하면서 그런 이성에서 나오는 논리가 과연 정당한가라는 의구심이다. 오히려 자신들만의 논리가 옳다는 이성 관념이 오히려 논리적이지 못할 경우가 많다. 그런 일들은 분명 유대인을 학살한 독일 나치즘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이전에 마녀사냥, 지금도 일어나는 중동 분쟁 역시 그러하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에 의해서 기인하는 것일까? 이 책에서 내가 가장 강렬하게 인상 깊은 문장은 다음과 같다.

<나는 나와 차이나는 자가 정확하게 나처럼 차이들을 존중하는 한에서만 차이를 존중한다. “자유의 적에게 자유란 없다”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차이가 바로 차이를 존중하지 않는 것에 있는 그러한 자들은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처럼 차이나는 자들은, “근본주의적” 이슬람교도와 유사한 모든 자들에 대해 윤리 신봉자들이 지니고 있는 강박한 불쾌감의 대상이 될 뿐이다>

세상에 분명 이런 모순이 있다. 전에 미국 9/11 테러에서 수많은 희생자가 탄생하고 이것으로 미국은 자신들의 국가의 자유와 평화라는 이름으로 오사마 빈라덴 조직과 거기에 관련된 적들을 공격한다. 하지만 이 사건에서 미국에게 비극적인 플롯을 선사하여 마치 영화나 소설에서 보이는 narrative처럼 집단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다른 집단을 공격한다.

문제는 이런 사건으로 통해 정말 그 테러조직과 범죄 집단만을 응징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아닌 자들도 응징한다. 미국 내에서 살아가는 중동지역 계열 민족이나 혹은 이슬람 문화권에 접한 사람들까지 차별하고 때에 따라서는 극단적인 행동으로 보복했다는 점이다. 진실의 적은 지구 저편 너머에 있다. 분명히 그들이 응징의 대상들은 거기 내지 혹은 거기가 아닌 곳에서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정말로 응징해야할 정의적 가치가 어느 순간 잘못된 가치로 나가고 있다. 자유를 지킨다는 그들이 어느 순간 자신들이 내세운 슬로건인 자유를 뭉개고 있다. 진짜 적을 대신하여 가상의 세계 즉 자기 관념 속에서 보이는 적들을 만들어 버린다. 이 서적에서는 그런 현상에 대해 simulacre라 한다. 그것은 인종, 피, 흙, 관습, 공동체로 인해 분리하게 하여 있지도 않은 혹은 본래 없는 것들이 현실화하여 비극을 만들어낸다.

윤리라는 것이 과연 이런 사항으로 인해 하나의 정의를 성립할 수 있는가? 이런 부분은 니체가 제기한 “자신의 이웃을 사랑하지 마라”라는 것과 같다. 자신들의 울타리 안에서 윤리라는 것이 있다는 자체가 하나의 편을 나누어 상대방을 집어 삼키는 거대한 무기가 되어버린다. 게다가 이런 문제는 기존의 역사에서 볼 수 있다. 1792년 프랑스 혁명과 1917년 러시아혁명 분명 기존 봉건사회에 대한 체계를 전도시켰다.

그리고 이것은 “노예 없는 주인” 즉 인권을 위해 일어난 사건이다. 그러나 1933년 나치의 탄생에서 그들은 자신들만의 세계만 인정했다. 그리고 자신들만이 우수하고 탁월하며 이성적이라고 생각했다. 웃기게도 결과는 가장 비열하고 치사하고 가장 비이성적인 형국으로 변질되었다. 나치즘도 그렇고 파시즘이란 극단적인 자기우월화가 왜 틀렸는가? 하지만 그런 극단적인 가치를 지닌 존재도 자신들에게 윤리나 정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차라리 자신에게 윤리나 정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있을까라고 생각했으면 어떠한가? 그러나 모든 인간은 자신의 모든 의견과 사고가 옳다고 판단한다. 쇼펜하우어가 “인간은 그것을 알기 전에 이미 알고”라고 했듯이 그런 인간이 다수가 되어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되어버리면 하나의 거대한 dogmatism이 된다는 점이다. 이런 거대한 dogmatism에 대해 칸트가 인간의 이성 그 자체를 비판하였는데, 사실 그런 문제점이 발생한다면 분명히 그런 오류를 저지르는 인간(혹은 다수) 본인에게 인격 성숙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고, 또한 그것으로 인해 남에게 물리적, 정신적, 심리적인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점이다.

윤리학이라는 것을 보면 솔직히 말하여 윤리라는 자체에 대해서는 인간이 살아가는 그 작은  순간에도 혹은 거대한 사건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윤리라는 것을 인간이 바라보는 것은 정말 이것이 옳은가? 혹은 옳지 않은가? 하기 보다는 사회적 통념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것이 정의로운 윤리가치라는 내세운다. 그렇지만 사실 그런 슬로건을 내밀고 하나의 교조로 보는 경우가 가장 윤리에서 멀어지는 지름길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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