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상학입문 - 철학사상총서
마르틴 하이데거 지음 / 문예출판사 / 1994년 9월
평점 :
절판


이번에 아주 지옥같이 느끼던 도서 한권이 있었다. 나에게 많은 도서가 지옥 같은 맛을 보여주나 이번 책 역시 정말 무한의 고뇌에 빠져들게 하는 책 한권이 있었다. 그것은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의 “형이상학 입문(形而上學 入聞)”이다. 형이상학이란 단어는 지금 나에게도 몇 권의 관련 도서를 보아도 쉽게 이해가기가 어렵다.

meta-physics 즉 physics이란 물리학(物理學)에서 meta라는 이른바 그 너머의 세계라는 의미인데, 물리학 너머의 세계라는 것에 대해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의미는 물리적인 존재에 그 이상의 존재이다. 그런데 문제는 형이상학에서 주요 연구대상은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존재적인 탐구이다. 즉 형이상학은 철학(哲學)과 긴밀한 관계 아니 거의 그 자체라 하여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단지 눈에 보이지 않은 세계를 사유함으로 탐구하는 즉 인간과 자연 세상의 이치를 탐구하는 학문으로서 본다면 형이상학은 아주 쉬우면서도 어려운 학문이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언제나 살아가면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말려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지 형이상학에 대해 깊이 통찰하기 보다는 그저 옆에 있어도 모르는 것뿐이다.

책을 읽다가 약간 떠오른 부분은 옆에 있음에도 있는 것을 알지 못하거나 옆에 있는데도 있다는 것을 알아도 그것을 감지할 수 없음이라는 인간의 사고가 조금 인상 깊다. 형이상학에 대해 논하는 것은 결국 인간 그 자신의 존재자체와 그 주변을 마주한 모든 세계적인 부분이어도 말이다.

그런 인간이 현실 속에 살아감의 알리는 존재(存在, sein)에 대해 논하는 것은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문제다. 그런 인간 자체의 삶의 근본 존재라는 것을 다루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일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물리적인 존재가 있어야 하고, 그 존재가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하는 생각이 필요하다. 그래서인지 여기서 다루는 형이상학 분야는 물리학(物理學)과 논리학(論理學)에 대해서이다.

또 하나의 형이상학의 근본인 윤리학(倫理學)에 대해서는 그렇게 깊이 다루지 않았다. 그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회적인 정치적인 존재를 다루기보다는 인간 그 자신의 존재를 다루는 실존주의(實存主義)적인 면을 강조하기 위함이 아닌가 싶다. 사실 나는 이 책을 보며 늘 궁금한 것은 과연 이 서적은 형이상학이란 그 거대한 학문에 입문용으로 괜찮은가? 라는 것이다.

차라리 입문용이라기보다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한번 보고 오는 것이 더 이 책을 유용하게 읽지 않을까? 생각만 앞섰다. 읽는 도중 하나하나 지켜보면 계속 “존재와 시간”이 빠지는 법이 없었다. 형이상학 입문은 결국 하이데거가 대학교 강의시간에 학생을 상대로 가르치기 위해 생긴 책이라고 하나, 이 책을 보면서 과연 그런가 싶다.

참 아이러니 하게도 나는 하이데거라는 인물을 형이상학, 철학, 사상 등에서 찾아서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애니메이션을 보다가 막상 떠올랐다. 어떤 애니메이션에서 주인공끼리 대화하다가 시공간을 초월하여 계속 반복적인 역사적 흐름에 고뇌하는데, 이때 주인공끼리 이런 대사가 나에게 인상 깊었다. “인간은 시간적인 존재다” 그 말을 한 사람은 하이데거라는 사실 아래서이다. 물론 이런 대사에 대해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하이데거에 대한 관심이나 대사의 의미를 마음 속 깊이 염두를 두지 않은 듯했다.

사실 이 작품은 주요점은 인간은 자신의 존재에서 그 자신 그 자체만으로 모든 것이 아니라는 것과 그 자신이 어떤 세계나 다른 접점과 연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인간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인과관계를 발생하나 선택지가 정해진 것처럼 흘러가기 보다는 작은 선택이 큰 목적을 변화하게 하는 것이다. 게다가 나비효과까지 나타나 그것을 시간의 흐름을 제어함으로 작품 내의 과업을 달성하는 점에서 이 작품의 모티브가 되는 시간, 그리고 그 시간에서 존재하는 인간, 반대로 시간을 존재하게 하는 인간이라는 상호보완적인 관계에서 하이데거의 철학은 조금 알아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는 만족하기 보다는 오히려 만족감을 얻지 못하게 해버렸다. 단지 인상 깊은 문구는 “왜 있는 것은 도대체 있고 차라리 아무 것도 아니지 않은가?”라는 것이다. 왜 있는 것은 있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고, 왜 아무 것도 아니야 할 이유가 없는가이다. 따라서 존재의 그 자체가 왜 있으며, 그것이 왜 그렇게 아니면 안되는가이다. 따라서 현실의 있음에 따른 물리적인 세계와 그 인간이 있다는 증거가 있는 언어가 불러지는 순간 논리학으로 이어진다.

어차피 우리 인간의 눈에 앞에 나무가 보인다고 하자. 하지만 그것은 나무이라도 그것이 설사 나무라는 실체를 가지고 있더라도 우리가 나무라고 불러주지 않으면 그것은 나무가 아니다. 결국 나무라 나무로서 존재적인 가치를 지닐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인간의 사고에서 태어난 결국 언어의 존재이다. 그런데 물리적으로 나무는 존재하나 우리가 나무라고 말하거나 생각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의문가는 점은 언어가 있기 전에 나무가 있었다. 하지만 언어로서 나무를 말해주지 않아 나무라는 것이 관념적으로 탄생하지 않았다. 분명 탄생의 시점은 나무를 나무라고 말하기 전에 있었지만, 그것이 도대체 왜 있는 것이고 차라리 왜 아무 것도 되지 않아야 할 그것은 무엇인가? 사소한 문제일 수 있으나 그것이 하나의 구심점으로 하여 넓게 펼쳐가게 된다면 존재의 근원이 무엇인가로 돌아가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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