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트맨>이란 영화는 내가 아주 어린 시절에 나온 영화로 기억난다. 나이가 어려 보지는 못했으나 배트맨이라는 이슈는 개그프로그램 맹구 역할을 맡은 분이 흉내 내던 장면도 기억이 난다. 그런데 배트맨이란 영웅이 있으면, 그 영웅성을 만들게 하는 요인이나 존재가 필요하다. 그 인물이 바로 조커이다. 배트맨 시리즈를 잘 모르던 나에게 이번 <조커>라는 영화를 보면서 생각한 점은 마블과 DC출판사의 특성이 다른 점을 알아도 이렇게 다를 줄은 몰랐다. 딱히 마블이나 DC영화 또는 만화에 관심이 없지만, 마블계통인 <스파이더 맨>을 보면 이분법적인 관계성이 명확하나, DC는 뭔가 미묘한 점이다.
가령 <X-man>의 악당 보스라고 해도 그는 나름 철학을 가지고 있고, X-man을 총괄하는 박사와도 친분이 있던 자이다. 단순히 이분법을 나누기보단 더 기묘하고 복잡한 세상만사의 이야기를 담은 것이 DC만화의 특성이라 종종 들었다. 과연 <조커>를 보면서 확연히 느꼈다. 영화의 특성이나 혹은 배트맨 시리즈에 대한 정보를 제외한 영화 그 자체를 보면 영화 속의 배경은 20세기 중반 전후인 듯하다. 자동차 디자인과 건축물 구조, 그리고 지하철이 있다는 점에서 20세기 초반은 아니다. 영화를 보면 고담시는 전형적인 공황경제 상황에 놓인 시기인 것 같았다.
우선 일자리가 많이 없다는 점, 돈이 잘 벌리지 않은 점, 처음 아서가 일하는 장면이 폐업하던 점포 앞에서 홍보하는 모습이다. 가게가 접는다는 것은 경기의 불황이고, 물건을 다 정리하는 것은 시장의 여건이 개선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장의 불경기는 뒤로 가면 지방정부의 예산도 연계된다. 영화 초반에 고담시는 미화원의 파업 18일째로 거리가 온통 쓰레기로 차 있고, 쥐와 같은 비위생적 동물이 거리를 활보한다. 쥐가 시궁창을 돌아다니면 흔히 페스트라는 질병을 옮기는 감염원이 된다.
병든 도시에 잘 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의 세계는 엄격하다. 영화 <조커>에서 바로 고담시란 존재는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이란 사회의 암울한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처음 의아한 점을 느꼈다. 아서가 동네 깡패 청소년집단에게 구타당할 때 가해자들은 흑인이고, 자신이 일하던 곳의 오너는 흑인이었다. 영화에서 아서는 전형적 백인이나, 그는 백인의 세계가 아닌 흑인의 세계와 가까이 있었다. 영화에서 백인을 억압하는 흑인? 그건 영화의 전개상의 목적이 아니었다. 그가 살던 집에 가니 엘리베이터 앞에 어느 젊은 기혼흑인여성과 아이가 있었다.
아파트는 오래 되어 낡았으며, 방음처리가 제대로 되지 않을 정도로 형편없었다. 엘리베이터를 오르는 중에도 전원공급이 불안해서 잠시 멈추기도 한다. 본래 백인이 사는 구역이 아니라 흑인이 사는 구역이다. 아서는 흑인에게 당하는 자가 아니라 흑인들이 살아가는 공간 속에 살아가는 백인이다. 겉은 하야도 사회적 지위는 검은 색이다. 그가 검은 색으로 살아야 한 이유는 가난도 있었지만, 사회적 권력이 만들어낸 도덕의 모순이다. 어머니 페니는 몸이 불편한 노인이다. 그녀도 정신적 질환으로 입원기록이 있고, 병원에서 어머니의 기록을 보면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 세상의 말과 그녀의 말, 누가 진실인가? 어머니는 자신이 30년 전 근무했던 토마스 웨인의 가정부로 일했다.
그녀의 편지를 읽지 않은 아서였으나, 그녀의 편지를 읽을 아서는 진실과 거짓, 윤리와 도덕의 의문을 가진다. 약을 끊어 환각에 시달리나, 적어도 그는 인간이란 윤리적 감정을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영화 뒤에 가면 어머니의 젊은 사진이 보인다. 아름다운 금발의 미소 지은 그 사진 뒤에 어떤 메시지와 2글자의 알파넷이 있다. 알파펫은 이름의 이니셜이고, 그것은 토마스 웨인을 뜻하는 것이다. 가정부란 사회적 약자 또는 노동자, 토마스 웨인이란 은행지점장이란 거부는 엄청난 계급차이가 존재했다.
가정부와 사랑보단 가정부에게 향한 불장난이 조커가 만든 계기였다. 영화에서 조커는 살인을 저지르고, 무질서를 만들며, 군중을 선동하지 않았지만 선동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그러나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다른 사람의 글과 그림을 보며, 아서의 입장을 관찰한 게 있었다. 아서는 프롤레타리아, 그녀의 어머니도 프롤레타리아였다. 가난에 의한 문제도 있지만, 가난보다 더 심각한 것은 사회적 시스템이었다. 아서가 다닌 상담소의 상담원은 그를 진지하게 대하지 않고, 그저 귀찮은 존재로 여기며, 아서는 자신 안의 분노와 슬픔 그리고 우울을 견디기 위해 우울증 처방만을 요구한다.
정부예산이 삭감되며, 상담프로그램과 의약지원까지 없어지고, 아서에게 남은 것은 점점 사라진다. 그가 정신병을 가진 이유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일까? 직장 내에서 그의 입지는 무척 어려우며, 진실을 말해도 말해주지 않는다. 그는 결국 해고된다. 그가 분노를 느낀 것은 흑인 갱에게 폭행당하는 것보다 그 사실을 믿어주지 않은 사회였다. 자신이 하는 이야기를 아무도 들어주지 않은 것이다. 진실은 분명해도 사실을 다른 식으로 전달된다. 사실을 판단하는 것은 그 사건의 진실성보단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에서 편한 방식만 취했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본다면 국가의 안전망에서 축출되고, 직장이란 공간에서 경제적으로 축출되었으며, 자기가 도전한 발언묘기조차도 조롱거리 수준으로 떨어진다. 머레이쇼에서 머레이는 아서의 노력을 그저 조롱거리로 만들었을 뿐이다. 결정적으로 그가 조커로 변한 이유에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어머니가 가진 아버지에 대한 환상이다. 아서는 고급영화관에 찾아가 토마스 웨인에게 아버지라고 말하며, 아무 것도 필요 없으니 한 번 아들로 인정하여 안아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토마스 웨인은 주먹을 그에게 날린다.
아서가 어머니를 죽인 이유는 국가와 직장 그리고 미디어란 공간에서 버림받았는데, 이제 가족까지 버림을 받았다. 자신의 존재성 자체가 모조리 부정당한 것이다. 조커의 탄생은 그렇게 시작했다. 아서는 정신병은 있으나 그 누구에게나 나쁜 짓을 하거나 악의를 가질만한 사람이 아니다. 원래 흑인여성 소피에게 성적인 관심은 있었으나, 그보단 사랑이 원했다. 단지 사람으로 봐주길 바란 것이다. 영화에서 그렇고 누군가 글을 쓴 것도 그러하나, 계단을 힘들게 올라가는 아서는 현실의 세계를 버티며 자신을 억누르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조커 분장으로 내려올 때 아주 신난 얼굴로 춤을 추며 내려온다.
갈비뼈가 심하게 보일 정도로 말라 기력이 없어보였지만, 약물의 과다복용으로 인해 조커가 된 아서의 모습을 활력이 넘쳐 폭발한다. 그의 폭발은 단순히 아서가 조커가 되기로 했기 때문일까?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대규모 시위현장이 나온다. 그 시위는 아서가 은행직원 3명을 죽인 이후의 현실을 보여준다. 아서가 그들을 살해했지만, 은행원은 부르주아 세계에서 경제적 지배계급에 속했다. 임금의 불평등, 경제적 불평등, 게다가 시장에 나온다는 토마스 웨인의 정책발언은 현실성을 고려한 게 아니라 단지 자신들의 권력자들의 헤게모니에 알맞은 이데올로기만 고집한다. 조커는 단지 그런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인생패배자들 중 전환을 일으킬 발화점에 불과했다. 조커는 개인적으로 인간을 살해했지만, 조커의 행위에 열광하던 사람은 그 사회를 살해했기 때문이다.
조커가 바라보는 아버지란 공간, 즉 지배세계란 질서를 말하고 있으나 질서란 명분 아래 하부계층은 무질서한 혼돈만 빠진다. 하부의 혼돈의 과밀화는 상부로 이어진다. 방화와 약탈, 폭력과 살인이 난무하는 도시를 보며, 조커는 신이 난다. 체포과정 중 다른 폭도에 의해 탈출한 조커가 자신의 피로 피에로의 입술을 그린다. 붉은 피에로의 입술은 물감으로 그리나, 그의 입술은 피로 그려진다. 피에로는 누군가 웃기기 위해 붉게 칠하나, 아서는 자신이 웃기 위해 붉게 칠한다.
흔히 Drama와 Comedy는 비극과 희극이라 한다. 드라마 천국의 한국에서 드라마는 전혀 드라마가 같지 않은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넘친다. 망상 속의 이야기는 드라마가 아니라 코메디에 가까울 때가 많다. 본래 드라마란 비극은 보는 이로 하여금 슬픔과 분노를 자아내게 한다. 코미디는 보는 이로 하여금 웃음과 기쁨을 만들어낸다. 이와 다르게 실제드라마의 주인공들은 관객들이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스스로 희열감에 빠져든다. 희극인 코메디는 관객이 웃으며 자신도 웃을 수 있겠지만, 관객이 웃지 않으면 그는 울어야 한다.
웃기지도 않을 코메디를 비웃음거리가 되었기에 아서는 우울증의 웃음과 분노를 둘 다 자아낸다. 영화 <조커>에서 아서는 분명 악당이 되었고, 그가 한 일들은 용서받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아서에서 조커까지 되는 과정은 그 사회가 만들었다. 범죄를 잡는 것보다 범죄를 예방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게 현재 우리 상식이다. 하지만 그 상식의 범주까지 자리를 잡기가 쉬운 게 아니다. 범죄는 당장 눈에 띄나, 예방은 바로 성과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범죄자가 자라온 환경을 보면 대부분 불우한 생활이 있었고, 그의 입장을 동정 받을 일들이 있다. 그가 저지른 범죄를 보는 게 아니라 그가 지금의 그로써 존재케 한 그 본질을 봐야 한다.
세상의 모순은 본질을 찾는 게 아니다. 본질을 찾게 되면 그 규명자체 어렵고, 비용소모가 많이 들며, 때로는 책임을 져야 할 부분이 많기에 대부분 외면한다. 낙오자를 외면하는 일만큼 쉬운 게 없다. 그들은 어떻게든 항변할 수 있는 위치나 입장도 되지 않으며, 설사 한다고 해도 묵살하면 그 순간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들이나 소재는 이미 충분히 세상에 널려 있다고 한다. 단지 <조커>는 그렇게 되어가는 인간의 모습을 상당히 긴장감 넘치게 보여준다는 게 묘미이다.
처음에 아서가 상담하는 과정에서 병원 안과 병원 밖에서 어디가 좋은지를 듣는다. 아서는 감시와 창살이 없는 밖의 세상보다, 병원 내부에 갇혀있는 게 더 좋다고 한다. 정신병자 환자들이 답답한 안의 공간보다 밖이 좋을 것인데 왜 안을 택하는가? 광인에게 세상은 친절하지 못하다. 병원은 광인을 위한 공간이나, 밖은 그렇지 못하다. 아서는 질문을 받는다. 은행원 3인을 살해할 때 죄책감이 없냐고? 머레이는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그가 살인이 범죄라는 점을 몰라서가 아니다. 애초부터 은행원 3인이 한 행동이 잘못되었고, 거기에 억압당하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지하철 장면이 가장 핵심이다.
강한 자들의 행동과 발언이 하나의 법칙이고, 정당성을 부여 받는다면, 거기에 억눌리는 자가 할 수 있는 것은 거기에 밟히거나(어머니 페니), 아니면 저항보단 반항(조커)을 하는 것이다. 영화는 현실의 부조리에 저항하는 게 아니다. 반항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위가 무질서한 것이다. 저항을 한다면 무질서가 아니라 절도가 있어야 한다. 반항적 행위와 시위는 가치관의 문제가 아니다. 존재감과 정책성의 문제이다. 삶 그 자체의 자신이 살아가는 현실과 그 안에 처해진 입장에서 비롯한 문제이다.
페니가 죽은 후 전 직장동료가 아서의 집으로 찾아온다. 이때 아서는 랜들을 살해해도 옆에 있던 난쟁이 게리는 그냥 보내준다. 살인자들은 증인들의 입막음을 위해 같이 살해하나 아서는 그렇지 않았다. 게리가 아서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었기 때문이다. 랜들은 법적으로 아서에게 큰 죄를 짓지 않았다. 물론 머레이도 그러하다. 하지만 아서는 예의가 없는 놈들을 용서할 수 없다면 칼과 총을 겨눈다. 물론 은행원 3인도 그렇다. 영화는 도덕적 가치 즉 법적인 사회질서보단 인간의 윤리적 가치를 중시한다. 도덕이 존재하는 세계에 윤리는 존재하나, 윤리가 붕괴된 세계의 도덕은 이미 파멸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