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1
5.18 기념재단 엮음 / 한얼미디어 / 2006년 2월
평점 :
절판


20187월 대한민국은 충격의 문건을 발견한다. 과거 기무사령부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이 기각될 경우, 박근혜 전 대통령과 그 동조자들의 정치적 권력에 도전하는 시민들을 제압하기 위해 계엄령을 준비했다는 점이다. 수천 명의 군사병력과 탱크 그리고 장갑차를 이끌고 수도권에 밀집하고, 계엄을 선포할 때 국회마저 계엄군 수중에 넣어 통제하려 했다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때 많은 일이 있었다. 그 당시 어느 국회의원이 군부대가 쿠데타를 기획하고 있다는 충격적 발언을 했다. 발언이 일어나자 군부대는 아무 일이 없다는 것처럼 조용히 있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뒤에서 계속 은밀하게 공작정치를 실행하고 있었다. 국민을 감시하고, 체증카메라로 촛불시위하는 시민들을 몰래 촬영하여 군 지휘부 쪽으로 계속 정보를 제공했다. 편의대, 사복을 입고 정보를 수집하고 첩보를 실행하는 군사조직이 있다. 예비군 훈련을 하면서 그런 편의대가 있는 것을 알았지만, 그게 일반 국민들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은 용서가 되지 않는다. 계엄발령을 실행하면서 우린 끔찍한 일들을 역사에서 배웠다. 제주도 43사건은 제주주민들의 한으로 남았다. 아직도 살인에 동조세력에 옹호하는 정치인들이 득세하는 것을 보면 살해당해야 하는 그 통한과 여전히 피해자를 불순분자로 모는 사회적 죽음이 작용한 것이다.

 

민간인을 학살하는 경우 대부분 민간인의 신원은 회복되기 어렵다. 그들을 살해한 이들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권력으로 밟았기 때문이다. 권력의 주체가 이양되기란 어렵다. 정치적 권력은 이데올로기적 지배논리 헤게모니를 더더욱 확고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권력에 의한 학살과 은폐, 조작, 왜곡은 죽음 이후에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영원한 사슬인 것이다. 박근혜의 몰락은 최순실 게이트가 있었지만, 그 전초는 세월호 사건이다. 세월호에서 보여준 참사가 얼마나 끔찍하고 슬프고 화가 나고 분노로 일색 할 수밖에 없는 비극 중에 비극이다.

 

그 비극적 역사에서 사고 그 자체는 우연일 수 있지만, 사고 후의 일들은 우연이 아닌 하나의 인위적인 통제였다. 피해자 식구를 마치 반국가세력 내지 이권단체로 매도했기 때문이다. 애를 죽었는데, 어떤 부모들이 그 돈을 노리려 할 것인가? 물론 그런 사람은 있었다. 이혼 내지 별거하여 평소 몇 년 동안 얼굴 한 번 안 비춘 자가 이제 보상금 문제가 슬슬 나오자 하이에나처럼 튀어나오는 경우를 말이다. 인간에게 돈은 있으면 좋지만, 자신의 인간성을 모조리 팔아먹는 존재들도 있다는 게 슬플 뿐이다.

 

세월호 사건이 있을 때 가장 괴로운 이들은 바로 단원고 학생들의 부모님이다. 물론 다른 희생자들도 있지만, 단원고의 피해가 가장 심했고, 죽은 자식은 1명이나, 그 자식의 부모와 형제, 친구와 친구 가까운 이웃마저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과거 자식을 많이 낳던 시대에 자녀 1명이 불의의 사고로 죽으면 부모 역시 병들어간다. 요새 같이 아이를 1명 내지 2명을 낳는 시대에 오직 하나뿐인 핏줄이 그렇게 사라진다면 부모의 가슴은 더 이상 희망을 품을 수 없을 것이다.

 

부모에게 짓는 가장 큰 죄는 부모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 단원고 학생들은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지만, 자신들의 부모에게 가장 큰 죄인이 되어야 했다. 그것도 모자라 자식의 죽음을 규명하고, 더구나 자식들의 유해와 유품마저 찾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들은 삶 그 자체를 포기하란 말과 같았다. 이런 고통을 받은 사람에게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손을 내밀기 시작했다. 어느 뉴스기사에 518 엄마가 416 엄마라는 제목을 보았다. 1980년 무더운 5월의 광주, 518의 비극은 그렇게 탄생했다.

 

국가에 의해 버림받고 농락당한 416 엄마는 국가에 의해 자식을 빼앗기고 통한의 시절을 보낸 518 엄마를 만난 것이다. 이번 계엄문건을 보면서 518의 그 끔찍한 일이 다시 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면 소름이 끼친다. 영화 <택시운전사>가 흥행하였다. 계엄군이 시민들에게 발포할 때 모습은 정말 순화된 모습이다. 나는 아직도 광주의 주남마을에서 일어난 일을 잊을 수 없다. 책을 보면서 어린 아이들이 더운 날에 주남마을에 있는 저수지에서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이래저래 놀 때 군인들이 동네 아이들에게 총을 발사했다.

 

머리에 총을 맞은 아이는 얼굴 반이 날라 갔다. 뇌수가 터지고 피가 범벅된 아이는 그렇게 세상을 떠나갔다. 그냥 길거리에 다니다가 총을 받고 가슴 뒤에 사라진 학생도 있었다. 어느 여학생은 가슴마저 칼에 의해 베어졌다. 어떻게 사람에게 그것도 같은 나라 사람, 같은 민족에게 포악하게 대할 수 있다는 말인가? 울고 싶은 심정이 들 정도로 슬프고 화가 나고 분노가 끓어올랐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슬픈 것은 죽은 이의 마지막 모습만이 아니다. 그들의 죽음을 세상에 알리고, 사연을 담으려면 누군가의 기억과 기록이 필요하다.

 

남은 가족들의 구술기록은 그야말로 통한이다. 부모의 반수에 가까운 사람들은 자신의 아이들이 총을 맞고 칼에 찔리고 몽둥이를 맞아 죽었다는 사실에, 또한 시체조차 참혹하게 훼손되었다는 사실에 그리고 아무 죄도 없는 빨갱이로 낙인찍혔다는 사실에 몸과 마음에 병들기 시작한다. 건강한 시골농부인 아버지들은 술만 의지하다 몇 년 안에 간암으로 뒤따라가고, 순박한 시골아낙들은 사나운 맹수가 되어 투쟁을 한다. 1명의 죽음 온 가족이 풍비박산이 나고, 그것도 모자라 군경은 지속적으로 감시하여 일상생활조차 제대로 지내지 못하게 한다.

 

늘 감시하고 따라 다니고, 직장까지 찾아오며, 518유족들이 모이면 방해하고 심지어 어디 멀리 데려가 낯선 곳에 버리고 가는 경우가 허다했다. 유치장에 갇혀 형사에게 발길질을 당하고, 시위하다 최루탄에 눈물을 흘리고, 온 몸에 멍으로 가득했다. 그래도 518 엄마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이 낳고 기른 아이는 착하고 평범하며, 남에게 해도 끼치지 않는데 어떻게 빨갱이고 폭도란 말인가? 단지 집에 있는데 총알이 날아 들어와 죽음을 맞이한 할머니, 자기들끼리 오인사격으로 열 받은 군인들이 화풀이하기 위해 마을청년을 총으로 살해한다.

 

사랑하는 가족이 죽은 것도 억울한데, 그 죽음마저 농락한다. 심지어 시체조차 제대로 보존되지 않아 얼굴과 전신에서 악취와 액이 흘러나온다. 부패한 살집 속으로 구더기를 나오며, 심지어 신체조차 절단되어 찾을 수 없을 때도 있다. 소문을 듣고 자신의 시신을 찾아 광주일대를 미친 듯이 돌아다니는 그들, 암매장에서 찾아낸 자식의 옷과 흉터나 점, 죽은 자식을 부여잡고 통곡하던 그들의 시계는 이미 멈추었다. 그들이 받은 굴욕과 모욕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작년 518 행사 때, 어느 여성이 나왔다. 그녀는 자신에 태어날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한다.

 

자신이 태어난 이유로 부모님이 그렇게 죽은 것이 아닐까 하는 평생의 상처를 안고 살아야 했다. 하지만 분노와 슬픔으로 가득한 이 책에서 그렇게 태어나지 못한 아이도 있었다. 산모의 머리에 총격을 가했고, 뱃속의 8개월 아이는 생존을 위해 몸부림을 쳤지만, 결국 2사람의 생명은 1발의 총알로 사라졌다. 맹수조차 새끼를 배에 품은 암컷을 노리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사람이 그것도 눈앞에 있던 임산부의 머리를 정확히 노렸다. 이런 죽음 앞에서 어떻게 자식의 죽음을 가슴 속에 품고 조용히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인가?

 

배상비는 그 죽음에 대한 정당한 가치로서 나오는 게 옳으나, 부모들은 돈이 원해서 배상비를 바란 것이 아니다. 그 죽음에 대한 정당한 반성과 의미를 두기를 원한 것이다. 가족의 죽음에서 보상비 많아 좋겠다고 말하는 인간들을 보면 이해가 가지 않을 때도 많았다. 세월호 사망자 보상금이 억이든 몇 백억이든 그게 있다 해서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518희생자의 가족이 남긴 이야기를 토대로 만들어진 이야기다. 그해 5월 탱크와 군인들이 광주를 짓밟지 않았다면 그들은 모두 각자 나름대로의 행복한 삶을 이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건 518망월동 묘역이 민주화의 성역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명소가 되었다. 어느 희생자의 가족이 거기서 일을 하는데, 군인과 경찰이 과거에 자신들을 그렇게 괴롭히던 존재인데, 이제 군인과 경찰이 518망월묘역을 찾아와 추모한다는 게 가끔 믿어지지 않은 모양이다. 아직도 광주에 있었던 일을 가지고 과거 독재정부의 마수가 남아있다는 점이 무서운 일이다. 광주에 사는 사람이 부산에 오면 생수통도 안 판다는 말이 있었다. 피해자의 그들이 오히려 반국가적 세력이 되어야 한 슬픈 일들, 416 세월호 역시 비슷했다. 518이나 416을 보면 518 당시 공안정치검사, 폭력경찰, 살인군대 업무를 맡은 사람들이 416 때 높은 자리에 있었다.

 

그러니 이런 비극이 일어나도 그들은 국민을 속이고, 피해자의 가족을 억압했다. 심지어 쿠데타 음모까지 꾸며 전 국민을 자신들의 노예로 만들려 했다. 지금 내 고모 1분이 광주에 사신다. 연세가 칠순 정도 되셨다. 광주에 일어난 비극을 생각하자니 그 당시 군부세력을 용서하기가 어렵겠다고 생각 든다. 시골에 내려가면 집안대대로 우리가족과 친분이 있던 먼 친척집안 1사람이 518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그분은 518 당시 살해당하지 않았지만, 518의 업보를 평생 지고 살아간 사람이다. 그가 수배될 때 가족식구를 데려가 고문하였다. 지금은 그 분의 고향에 가면 마을주민들이 추모제를 열어준다.

 

유흥준 교수님이 그 분의 집을 해마다 방문하신다. 유홍준 교수님은 윤한봉, 그의 이름을 기억 하지 못하는 사람은 나이가 너무 어리거나 너무 세상을 쉽게 산 사람들입니다.”라고 말하셨다. 광주에서 군부에 저항하다 사라진 그들, 군부에 의해 살해당한 그들, 모두 살기를 원했지만 죽음을 삶의 의지를 비켜가지 않았다. 죽은 자는 살기를 바랐고, 죽은 자의 가족은 같이 살아가길 바랐다. 그들의 억울함이 모두 풀리고, 그들을 살해한 그들의 죄악이 세상에 모두 드러날 때 그들의 죽음은 다시 삶으로 이어져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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