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거리를 잠시 나열하거나 소설의 주제의식을 짧게 던져놓기에는 너무 큰 소설이었다고 말해야 할까? 얽히고설키는 인연 따라 긴 시간을 함께 추적해 보는 이 소설은 글로는 잘 만나보지 못한 낯선 경험이었기에 버겁기도 했지만 완주하고 보니 워낙 짜임새 있고 촘촘히 잘 엮인 글이라 무척이나 뿌듯한 여행이 되었다.
이 소설은 19금 소설 냄새가 물씬 풍기면서도 가감 없이 인생사의 단순함을 세밀하게 들여다보고 있어서 '새로운 경험' 이었다는 말을 거듭 강조하게 된다. 꼭 완주하실 분에게는 적극 추천드리고, 읽다가 말 것 같으면 시작하지 마시라고 말하고 싶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본 육체의 가벼움과 무거움 그리고 키치, 그리스인 조르바의 자유, 싯다르타의 윤회와 고통, 니체의 영원회귀, 어쩐지 어린 왕자가 기억하라고 말하는 순간들도 스친다. 이런 소설들이 떠오르게 하는 문장의 가장자리마다 이정표를 세우며 지나가는 것도 이 소설 <고래>의 매력이었다.
저자가 등장시키는 세상의 법칙, 인생사에 대한 통찰을 압축하며 얼추 50여 번을 등장하는 새로운 이름의 법칙들이 독자에게 주는 것은 이미 많이 정의된 부조리에 대한 반감인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의 시점에만 해도 이것들이 부조리인지 모르고 당하고 겪어내야 했던 이야기. 어떤 인물과 사건의 이야기 말미마다 때론 명확하게 때론 적당히 정리되는 다양한 법칙을 통해 이해를 넓혀가기도 한다.
처음 몇 번의 법칙을 지나 이렇게 많은 법칙들이 등장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재미 삼아 이런 법칙들을 나열했다기엔 이미 소설과 한 몸이 되어 핏줄처럼 이야기를 돌리고 있었기에 재미로 흘려볼 수가 없었다. 어떤 법칙은 동맥처럼 굵었고 어떤 법칙들은 미세혈관처럼 뻗어 있다.
오기로 그 법칩들을 한 번 써보자면 이러하다.
자연의 법칙, 세상의 법칙, 유전의 법칙, 생식의 법칙, 고용의 법칙, 화류계의 법칙, 가속도의 법칙, 무지의 법칙, 거리의 법칙, 금복의 법칙, 칼자국의 법칙, 사랑의 법칙, 구애의 법칙, 비만의 법칙, 운명의 법칙, 무의식의 법칙,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 작살의 법칙, 이념의 법칙, 거지의 법칙, 흥행업의 법칙, 구라의 법칙, 진화의 법칙, 그들의 법칙, 관청의 법칙, 유언비어의 법칙, 구호의 법칙, 만용의 법칙, 자본주의의 법칙, 헌금의 법칙, 경영의 법칙, 알코올의 법칙, 감방의 법칙, 신념의 법칙, 자본의 법칙, 토론의 법칙, 권태의 법칙, 지식인의 법칙, 독재의 법칙, 중력의 법칙
❤️ 춘희의 법칙도 있을만 한데 춘희가 가진 특성상 오직 그것만큼은 춘희의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어서 그 섬세함에 조금 놀라기도 했다. 춘희는 법칙 따위를 논할 지성이 없기도 하지만 법칙이 필요치 않은 인물이기도 하다.
단순해 보이는 육체의 삶에도 이렇게 수많은 법칙들이 작용하고 있다니 놀라울뿐더러 그것들을 소설에 녹여내고 가지를 치게 만든 소설 <고래>의 위용이 거대하다. 나는 뒤늦게 읽었지만 이 소설에 대한 평가가 빈말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어서 기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