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 (문학동네 30주년 기념 특별판) 문학동네 30주년 기념 특별판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5월
평점 :
절판



입소문을 이기지 못해, 부커상의 위상이 궁금해서 잡아든 천명관의 소설<고래>는 나의 독서 이력 중에서 가장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그간 유럽의 고전을 하나라도 더 읽어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나에게 한국문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핵폭탄을 날려주었고, 앞으로의 독서 방향에 있어서는 커다란 물줄기가 새로 생겨났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앞으로는 무엇을 읽으면 좋을지에 대하여 깊은 고민이 생기는 시점이기도 했다. 어쩐지 다른 책들이 시시해져 버릴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한국문학이 많이 읽고 싶어졌다.










줄거리를 잠시 나열하거나 소설의 주제의식을 짧게 던져놓기에는 너무 큰 소설이었다고 말해야 할까? 얽히고설키는 인연 따라 긴 시간을 함께 추적해 보는 이 소설은 글로는 잘 만나보지 못한 낯선 경험이었기에 버겁기도 했지만 완주하고 보니 워낙 짜임새 있고 촘촘히 잘 엮인 글이라 무척이나 뿌듯한 여행이 되었다.

이 소설은 19금 소설 냄새가 물씬 풍기면서도 가감 없이 인생사의 단순함을 세밀하게 들여다보고 있어서 '새로운 경험' 이었다는 말을 거듭 강조하게 된다. 꼭 완주하실 분에게는 적극 추천드리고, 읽다가 말 것 같으면 시작하지 마시라고 말하고 싶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본 육체의 가벼움과 무거움 그리고 키치, 그리스인 조르바의 자유, 싯다르타의 윤회와 고통, 니체의 영원회귀, 어쩐지 어린 왕자가 기억하라고 말하는 순간들도 스친다. 이런 소설들이 떠오르게 하는 문장의 가장자리마다 이정표를 세우며 지나가는 것도 이 소설 <고래>의 매력이었다.


저자가 등장시키는 세상의 법칙, 인생사에 대한 통찰을 압축하며 얼추 50여 번을 등장하는 새로운 이름의 법칙들이 독자에게 주는 것은 이미 많이 정의된 부조리에 대한 반감인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의 시점에만 해도 이것들이 부조리인지 모르고 당하고 겪어내야 했던 이야기. 어떤 인물과 사건의 이야기 말미마다 때론 명확하게 때론 적당히 정리되는 다양한 법칙을 통해 이해를 넓혀가기도 한다.


처음 몇 번의 법칙을 지나 이렇게 많은 법칙들이 등장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재미 삼아 이런 법칙들을 나열했다기엔 이미 소설과 한 몸이 되어 핏줄처럼 이야기를 돌리고 있었기에 재미로 흘려볼 수가 없었다. 어떤 법칙은 동맥처럼 굵었고 어떤 법칙들은 미세혈관처럼 뻗어 있다.




오기로 그 법칩들을 한 번 써보자면 이러하다.

자연의 법칙, 세상의 법칙, 유전의 법칙, 생식의 법칙, 고용의 법칙, 화류계의 법칙, 가속도의 법칙, 무지의 법칙, 거리의 법칙, 금복의 법칙, 칼자국의 법칙, 사랑의 법칙, 구애의 법칙, 비만의 법칙, 운명의 법칙, 무의식의 법칙,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 작살의 법칙, 이념의 법칙, 거지의 법칙, 흥행업의 법칙, 구라의 법칙, 진화의 법칙, 그들의 법칙, 관청의 법칙, 유언비어의 법칙, 구호의 법칙, 만용의 법칙, 자본주의의 법칙, 헌금의 법칙, 경영의 법칙, 알코올의 법칙, 감방의 법칙, 신념의 법칙, 자본의 법칙, 토론의 법칙, 권태의 법칙, 지식인의 법칙, 독재의 법칙, 중력의 법칙

❤️ 춘희의 법칙도 있을만 한데 춘희가 가진 특성상 오직 그것만큼은 춘희의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어서 그 섬세함에 조금 놀라기도 했다. 춘희는 법칙 따위를 논할 지성이 없기도 하지만 법칙이 필요치 않은 인물이기도 하다.

단순해 보이는 육체의 삶에도 이렇게 수많은 법칙들이 작용하고 있다니 놀라울뿐더러 그것들을 소설에 녹여내고 가지를 치게 만든 소설 <고래>의 위용이 거대하다. 나는 뒤늦게 읽었지만 이 소설에 대한 평가가 빈말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어서 기뻤다.

이런 소설은 없었다.

에너지에 휩쓸린다.

부커상 심사위원




이야기를 전진 시키고, 때론 멈추어 두고 과거로 돌아가 장면을 펼쳐내는 솜씨가 독자를 매료시킨다. '흡입력'이라는 단어로 이 소설을 설명한다면 아무것도 못하고 3일을 내리 고래만 읽었다. 한 페이지도 건너뛰거나 눈을 굴려 지나칠 수 없었다. 소설이 어찌나 촘촘하고 탄탄한지 몰입감 역시 최고였다. 1,2부 욕정이란 무엇인지 아주 제대로 맛보았다. 3부 인간의 흥망성쇠가 무엇인지 그 아찔한 추락을 경험하며 심하게 몰입한 탓에 이야기의 잔인성에 힘들기도 했다.


국밥집 노파, 노파의 딸 애꾸, 금복, 금복의 딸 춘희, 생선장수, 걱정이, 칼잡이, 약장수, 문, 수련, 트럭 운전수, 쌍둥이 자매, 코끼리 점보, 도둑들, 감방수, 벽돌 공장, 교도소, 대형극장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모두 선명하게 보인다. 그들이 가진 이야기들이 어떻게 이야기되고 흩어지고 회자되는지 빨려 든다.

거꾸로 보면 벽돌 한 장을 역추적하다가 '빨간 벽돌의 여왕'의 이야기를 찾아내는 소설이기도 하다. 고립되어 있던 평대 마을에 기차가 들어오면서 문명사가 시작되는 진화 과정에서 전기도 들어오고 전화가 들어오고, 다방, 자동차, 유곽, 영화관까지 생겨나며 부흥을 맞은 도시가 다시금 쇠락하고 인간의 이야기와 함께 추락하는 거대한 이야기는 국밥집 노파, 금복, 춘희를 비추며 섬세해진다.

폐쇄적인 마을 하나가 금복이라는 여자 하나를 통해 얼마나 달라져가는지 그 과정도 재밌었다. 마찬가지로 문명의 붕괴와 인간의 추락을 보며 자본주의 법칙이 가장 커 보였고, 결국 돈이 인간을 들어 올렸다가 추락시키는 것만 같았다.

여장부인 금옥의 매력과 능력의 끝이 어디인지 그 이야기는 한없이 펼쳐진다. 금옥에게 모성애가 없다는 것이 결국 남성성을 선택하며 그녀가 쇠락해가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금옥의 사랑은 육체의 허망한 사랑이었다.

매력적이지 않았지만 가장 애잔한 춘희, 그녀의 거대한 몸은 여자로서 겪어낸 말하지 못할 고통과 수모를 모두 감당해냈다. 대형화재의 방화범 누명을 쓰고 들어간 교도소의 참혹한 생활은 상상하기 싫었다. 감옥에서는 나올 수 있었으나 그 육체의 굴레는 죽을 때까지 벗어나지 못하는 비극과 불행을 나진 이야기에서 무서운 몰입으로 무상함을 함께 느끼며 힘들게 따라왔다.

춘희가 바랬던 것은 엄마에게 따뜻이 안기고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지만 끝까지 고립되어 있는 외로움 속에 산다. 춘희는 모성을 느끼지 못하며 컸고 일반인의 지성이 없어 언어소통이 힘들다. 그럼에도 남달리 탁월한 오감을 통해 삶을 끌어간다. 자기가 낳은 생명을 지키기 위해 본능으로 사랑을 깨우치는 모습은 원초적으로 감동적이면서 슬펐다. 덧없는 죽음들이 침묵하는 동안 커지는 슬픈 여운이 내 안을 뱅뱅 돈다.

❤️ 아름다운 육체가 시들고 남는 것은 허상이지만 아름답다는 기준에서 모두 멀었었던 춘희의 모성이 가장 아름다웠다고 기억하고 싶다.

마지막에 지구 밖으로 줌아웃되며 마무리되는 소설. 춘희가 꼭 알았으면 싶은 트럭 운전사에 대한 이야기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춘희가 사랑받았음을 꼭 알려주고 싶어진다. 이 거대한 이야기들이 결국 모든 게 먼지 한 톨보다 작아지는 것으로 심하게 몰입했던 독자를 소설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도와주는 그 마무리가 개인적으로 가장 완벽했다.

아직 여운을 우리는 중이다.

평가할 입장이 아니지만

최고~~

고래의 문장들 얘기까지 하자면 끝이 없다. 그러니 밑줄에서 뭔가가 느껴지신다면 직접 고래를 만나시기를 바란다.








인생을 살아간다는 건 끊임없이 쌓이는 먼지를 닦아내는 일이야. - P10

여자로서 춘희가 겪은 고초는 차마 입에 담기 힘들 만큼 끔찍한 것들이었으나 그것은 모두 과거의 일이 되었다. 고통은 희미해지고 그녀는 이제 교도소를 나와 쇠락한 벽돌 공장으로 돌아와 있는 것이다. - P13

살들,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했던 비극적 운명의 주인공이자 영원히 벗어던질 수 없는 천형의 유니폼처럼 그녀를 안에 가둬 놓고 평생이 끌고 다니며 멀고 먼 길을 돌아 마침내 다시 벽돌 공장까지 데리고 온 그 살들을 춘희는 문지르고 또 문질렀다. - P19

거기에 대해 대답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녀의 저주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며 그녀의 이야기는 까마득한 옛날 평대의 전기차가 들어왔던 시절의 이야기다.
- P2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