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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사이를 산책하기 - 여성동아 문우회 앤솔러지 ㅣ 숨, 소리 2
여성동아 문우회 지음 / 숨쉬는책공장 / 2022년 7월
평점 :
좋은 글을 안만나본 것은 아니지만 이번엔 좀 특별한 타이밍인 것도 같네요. 여성의 글이 가진 위대한 힘을 알아채고 싶었던 지금 딱 만나야했던 글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 작은 책에서 만난 소설들이 가진 내면적인 고급진 글맛에 기분 좋은 쇼크를 느낍니다. 어디가 고급지냐고 물으신다면, 직접적인 표현이 아니라 그것을 표현 하기 위해 천천히 고지로 이끄는 정성스러움과 섬세함에 있다고 해야할까요. 결정적으로 독자에게 좋은 여운을 남깁니다.
여성동아 문우회는
1968년 부터 시작한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전에 당선된 작가들의 모임입니다. 50여 년 간 박완서 선생을 비롯해 수많은 작가들이 참여해 꾸준히 활동을 해왔고, 1984년부터 꾸준히 1~3년에 한 번씩 회원들의 작품을 모은 작품집을 내고 있다고 하네요. 이번 기회로 알게된 이름들을 비롯해서 확장되는 독서를 경험합니다.
유덕희 - 별 사이를 산책하기
박재희 - 홀연
유춘강 - 레몬
한수경 - 나비머리핀
이남희 - 잠들지 못하는 행성에서
권혜수 - 그 여름 뙤약별
♡ 독자의 배경으로 좀 더 큰 여운이 남는 글이 분명 있겠지만 여섯 작가의 여섯 개의 소설은 각자 고유한 맛을 지닌 만큼 최상의 비빔밥을 완봉한 듯한 건강한 만남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저는 [홀연] 하나만 얘기해보려 합니다.
충북 제천에서 태어났다. 어쩌다 가야금에 혼이팔려 무형문화재 가야금 산조 이수자가 되었고, 가야금 타는 스승님께 넋을 놓아 <춤추는 가얏고>를 썼다. 《양구》 《어쩌, 트로트》 《짐을 두드리는 동안》 《대나무와 오동나무》 등의 책을 냈다.
( 저자의 이력은 참으로 독특하고도 특별한 소설의 주제가 되는 것 같았습니다. )
♡ 소설의 주인공 박동자는 가야금 학원 원장으로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먹고 살만은 했지만 막연히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늘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이 어디로부터 떠나고자 하는지 끝없이 물어왔지만 답을 내기는 어려웠고 막연히 현실과 가족, 특히 엄마를 떠나고 싶어합니다. 원가족으로부터의 드러나지 않는 박동자의 내면적 상처와 회피하고자 하는 모습에서 사랑에 서툰 나를 보는 것 같아서 마음이 쓰이더군요.
p 41
무엇으로부터 떠나서 어디로 간다는 말인가.
나에게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자기로부터의 혁명, 소유에서 무소유로, 어쩌고 저쩌고 고상하게 정의할 자신은 없더군요. 내가 대답할 수 있는건 오직 하나, 당장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야 한다는 사실 뿐이었습니다.
이것들이 박동자를 감싼 보자기의
씨줄과 날줄이긴 하지만
이것이 박동자일리는 없습니다.
박동자가 떠나고 싶어 하는 목록을 보자니 어쩐지 버릴만큼 끔찍해 보이지는 않는 것들인데 굳이 버리고자 하는 마음의 소용돌이가 궁금해집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다 훌륭하고 멋져보이는데 본인 스스로는 본인의 삶이 갑자기 허탈해지는 경우가 있어요. 누구나, 어느 자리에서 어떤 삶을 살던지 우리가 자신을 의심해보는 순간은 이렇게 늘 있는 것 같습니다.
또 글 속에는 박동자와 어머니의 미묘한 심리들이 숨어있어서 마음이 푹푹 빠지는 문장들이 많았는데 모녀관계가 가진 미묘함과 박동자를 찿고 싶어하는 박동자의 마음에 많은 공감이 일었습니다.
그런데 떠난다는 것이 속세를 떠난 출가라면 좀 극단적인 선택이긴 합니다만, 그것을 실천으로 옮겨내며 겪는 박동자의 심리변화가 참 공감되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익히 머리로 알고, 가슴으로 알고, 잘 살아 왔다고 자부함에도 나에게는 답이 없습니다...
p 70
사람 손이 닿지 않는 숲속은 크고 작은 나무들로 빽빽합니다. 출근길 1호선지하철 같습니다. 1호선 지하철이 끔찍해서 국악단을 떠났지요. 3호선 지하철이 징그러워서 엄마를 떠났지요. 다시 만원 지하철을 탄 듯한 이 느낌. 살아서는 못 벗어날 것만 같은 이 숨 막힘은 무엇일까요. 숨을 안 쉬어야 숨이 막히지 않는 것인가요.
아프고 말을 안듣는 몸을 이끌고 또 뻔한 반찬이나마 손수 밥을 해서 딸을 먹이려하는 엄마를 대하는 박동자의 마음이 어떤지 저는 너무 알겠더라구요. 엄마를 향해 감사하다고, 늘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는 박동자의 마음은 설명할 길이 없는 아픔을 느낍니다. 차라리 엄마를 외면하는 수 밖에 없을 겁니다.
왼손에 힘이 없어서 오른손으로 돌솥을 옮기는 엄마를 나는 외면합니다... 엄마의 여생에서 돌솥을 옮길 사람은 내가 아닌 엄마니까요...
이 한 페이지 안에서만도 저는 얼마나 멈추어 있었는지요. 여러 절을 헤메고 스님들을 찾으며 답을 구해보는 사이에 외면해오던 엄마의 진밥과, 오이무침을 떠올리며 사뭇 그리움을 느끼는 박동자는 이제 더이상 엄마가 계시지 않는 속세로 내려 와야했습니다. 엄마가 계시지 않는 속세는 산을 오를때보다 결코 가볍지 않을 곳이기에 가슴이 무거웠어요. 그리고 저도 엄마 생각에 한참을 산속을 헤메는 심정이 되었습니다.
무엇으로부터 떠나서 어디로 간다는 말인가.
나에게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자기로부터의 혁명, 소유에서 무소유로, 어쩌고 저쩌고 고상하게 정의할 자신은 없더군요. 내가 대답할 수 있는건 오직 하나, 당장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야 한다는 사실 뿐이었습니다. - P41
사람 손이 닿지 않는 숲속은 크고 작은 나무들로 빽빽합니다. 출근길 1호선지하철 같습니다. 1호선 지하철이 끔찍해서 국악단을 떠났지요. 3호선 지하철이 징그러워서 엄마를 떠났지요. 다시 만원 지하철을 탄 듯한 이 느낌. 살아서는 못 벗어날 것만 같은 이 숨 막힘은 무엇일까요. 숨을 안 쉬어야 숨이 막히지 않는 것인가요.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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