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 박물관 1 민음사 모던 클래식 27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노벨상 수상작가 오르한 파묵, 그의 작품을 읽은 적도 없는터라 우리와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일상사는 어떨까?란 호기심으로 선택한 작품이다.

고전이 과거의 책이라는 편견은 불식되어야 한다며 젊은 고전들을 소개하기 위해 민음사에서 야심작으로 펴낸 현재진행형의 고전을 모던 클래식 시리즈로 펴낸 것중 스물일곱번째 소설이 오르한 파묵의 순수박물관이다.

 

한 여자와 만나 44일 동안 사랑하고,
339일 동안 그녀를 찾아 헤맸으며,
2864일 동안 그녀를 바라본 한 남자의
30년에 걸친 처절하고 지독한 사랑과 집착


30년간 계속된 한 남자의 처절한 사랑과 집착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는 것을 몰랐다.”


 

얼핏 보아서는  짧았던 불꽃같은 사랑과 그 사랑을 못잊어 고통받았던 한 사내의 순애보를 그린 소설이란 생각을 하며 첫장을 넘겼다.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의 대립, 서구화로 인해 신흥부자들의 대거 등장하는 1975년의 터키의 젊은이들의 모습과 상류층의 생활상이 담긴 한편의 풍속화가 펼쳐진다.

 

서른 살이 된 신흥부자 가문의 둘째 케말은 약혼을 앞둔 연 시벨에게 줄 선물을 사러 들렀던 명품(?)를 파는 가게에서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촌 퓌순을 만나면서부터 그의 사랑은 크게 요동을 친다.

 

44일간 아파트에서 12살연하의 미녀대회 참가한 이력의 아리따운 처녀 퓌순과 밀애를 나누면서 자신도 통제할 수 없는 사랑에 빠져버린다. 대책도 없이~ 이것이 순수한 사랑이라 이름할 수 있을까?는 소설에서도 다양한 입장을 들어 터키 젊은이들의 연애관을 평하고 있지만 읽는 이의 가치관에 따라 평은 천차만별이 아닐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가장 소중한 것을 바치는 것이라 한다면 퓌순은 그의 동정을 바쳤지만 케말은 한순간 바람같은 밀애를 결혼이후에도 지속가능할 것으로 착각하였지만 그의 전부를 바쳤다고 할 수 있을것인가?

바람, 외도에 사랑이 개입되면 그 사람을 소유하고 싶어지고 집착하게 되어 정상적인 사랑이 얼크러지는 것은 터키나 우리나라나 매한가지 아닐까?

 

학교 동창이자 유학파 출신의 시벨에 비하면 부족하기 짝이 없는 퓌순, 애초엔 그녀와 공식적인 사랑을 하려던 생각이 없었겠지만 사랑은 기기묘묘한 것~ 44일간 하루도 빠짐없이 만나 끝까지 가버린 사랑을 나눈 그, 그녀도, 그도 통제할 수 없는 선을 넘어버렸다. 금단의 열매를 따먹어 버렸기에 그 사랑은 해피엔딩을 기대할 수 없는 것!

 

초대장 명부에도 없었던 퓌순의 가족을 약혼식에 초대한 케말의 의식구조에 놀랐다. 꿈에라도 첫사랑이 나오면 안절부절하지 못하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그곳이 어디라고~ 그날 이후 퓌순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약혼식 다음날 대입시험을 치루고 만나기로 한 약속을 믿고 아파트에서 하루, 이틀, 사흘, 나흘 기다리지만 그녀는 오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 수록 케말은 그녀를 정말로 사랑했음을 절감하고 병적인 집착에 빠져든다.

 

 아버지의 연인에 대한 고백처럼 소중한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케말은 어쩌면 아버지와 같은 전철을 밟고 있는 것인지도.

퓌순과 시벨을 가운데 두고 저울질 하는 순간 두 사랑은 파국을 부른다는 것을. 퓌순의 흔적이 남아 있던 침대, 그녀가 피웠던 담배꽁초, 그녀의 손길이 닿았던 물건에 병적으로 집착하고 그것을 마치 복부를 콕콕 찌르는 아픔의 치료약인양 어루만지고 보관하고 음미하는 몽환적 사랑을 사랑이라고 불러도 되는것인가. 내가 너무 계산적인가 싶기도 하지만 선을 넘은 사랑과 정상적인 사랑을 병립시키려 한다면 나만 상처받고 인생에 소용돌이치는 것이 아니라 시벨과 퓌순도 휘말려든다는 것을 그는 배려하지 않는단 말인가?

그의 병적인 집착을 함께 치유해고자 했던 시벨의 정성이 눈물겹다. 시벨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래도 되는 것인가? 이 소설은 케말 자신중심, 남자중심의 사고가 도드라진다. 시벨과 퓌순의 아픔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다시 나타난 퓌순, 그는 내심 버리고 왔기에 사랑의 회복을 기대한다. 언감생심..
이미 결혼한 몸, 영화를 매개로 그는 퓌순과 얼크러지는 1권의 마지막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해피엔딩인가, 아픔이 그득한 사랑을 하고 있을까? 그 다음이 궁금해진다.

 

30년이나 경과된 후의 회고담으로 진행되는 나레이션, 몰락한 집안의 작가로 실명이 언급되는 소설의 작가로 오르한 파묵이 언급되고, 퓌순과의 순수한 사랑에 대한 기록을 위해 그가 병적으로 모았던 물건들을 전시하는 박물관을 열었다는 이야기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퓌순이 어떻게 되었을지 지금으로선 모르지만 그녀의 비밀이 담긴 물건이 순수한 사랑의 기록이란 이름으로 진열되는 것을 그녀도 행복하게 받아들일지~

 

작가 오르한 파묵이 순수박물관을 개관하고 초대장을 동봉하였다니 가보고 싶은 호기심이 동한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케말과 비슷한 상황에 처했던 적은 없었던가? 아마도 아마도 나는 케말과 같은 선택을 하지 못했을 것 같다. 그래도 불현듯 생각이 나면 가슴이 아리지 않을까?
그렇게 추억의 갈피에 묻어두고 가슴으로만 그리고 있을 사람들이 더 많지 않을까?

 

우연히 찾아온 이방인과 사랑에 빠져버린 엄마의 사랑을 그린 메디슨카운티의 다리가 생각이 났다. 아무리 사랑이 좋다지만 책임져야할 사람이 있다면 포기하는 것이 더 아름다운 사랑이 아닐까? 내 생각은 그렇지만 순수한 사랑이란 이름으로 받아들일 사람도 적지 않을 것 같다.

 

사랑 사랑 사랑 사랑이 뭔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예수 왜곡의 역사 - 성서비평학자 바트 어만이 추적한
바트 D. 에르만 지음, 강주헌 옮김 / 청림출판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신의 존재 증명, 종교문제는 한도 끝도 없는 논쟁을 불러 일으키는 소재이다. 완전한 신이 창조한 피조물이 불완전할 수 있는가의 문제, 선과 악, 악마, 높은 곳에서 바라다 본 야경의 한자락을 차지하는 붉은 십자의 무덤들, 이렇게 하나님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많은, 교회가 많은 나라, 세계에서 인간의 고통과 종교로 인한 분란은 끝이 없는가?

 

저자인 성서비평학자 바트 어만은 수평적 성경읽기를 통해 복음서의 오류와 저자의 진위문제 등을 역사비평학적인 관점에서 성경의 오류와 왜곡된 예수, 기독교의 주요 교리의 역사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는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고통의 문제로 인해 지금은 불가지론자로 돌아섰다고 한다.(신의 존재나 기독교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성경은 오류가 전혀 없는가(성서무오류설)? 성경은 하나의 말씀대로 씌여졌는가(축자영감설)
이란 주제를 바탕으로 그렇지 않다는 것이 저자의 입론이다. 이러한 이론은 미국 유수의 신학대학에서 목회자를 대상으로 교육을 하고 있으나 목회자들은 신자들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거의 가르쳐주지 않는다고 한다. 그럼 우리나라 신학대학에서는 이러한 내용을 가르칠까? 목회자들은 신자들에게 이런 내용을 말해주고 있을까?

 

맹목적이고 구세기복적인 종교관이 유독히 강한 우리나라에서는 모르긴 몰라도 이러한 내용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불경스럽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소리라고 일축해 버릴 사람들이 더 많을 것 같다.

 

마가, 누가, 마태, 요한복음을  수평적 읽기를 통해 동일한 사건이나 예수의 말씀을 비교해 보면 각 복음서마다 조금씩 다르고 모순된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의 탄생, 부활, 메시아, 유다의 죽음, 종말의 도래 시점, 유다의 문제, 삼위일체, 구원의 문제, 유대인과 기독교의 관계 등에서..

 

더구나 현존하는 복음서의 원전은 아직 발견된 것이 없고 대부분 필사본만 전해지고 있고, 예수의 사후 50년 이상 경과된 시점에서 구전되어 전해오는 이야기와 이전에 씌여진 복음서를 근간으로 씌여질 당시의 상황이 반영되어 그 내용들이 같은 사건을 언급하더라도 조금씩 다르고 어떤 경우는  오류가 발견되고 있다. 복음서의 저자 역시 우리가 알고 있는 저자가 아닌 경우가 많고 저자가 명명백백히 밝혀진 경우는 바울의 서한 집 포한 8권에 불과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와 역사적 실체로서의 예수는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현존하는 역사서에 예수와 관련된 언급이 거의 없고 위서든 성경이든 기독교와 관련된 복음서나 기록을 통해 접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예수는 종말론자였고 당대의 사도들의 생전에 종말이 올것이라고 믿었다는 것인데  그 실현 가능성이 멀어지자 이를 보완하기 위한 인간의 목소리가 반영될 수 밖에 없었던 현실.

성경 완독을 꿈꾸었던 시절 품었던 의문점들이 이 책을 통해 다소간 해소되었다.


예수 왜곡의 역사는 성경 자체, 하나님의 말씀 자체의 오류가 불러일으킨 왜곡이 아니라 훗날 기록한 복음서의 저자들에 의해서 발생한 문제점이라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존재, 기독교를 인정하는 입장에 서 있지만 널리 이 책을 읽고 오류를 받아들인다면 좀더 인간적인 종교, 인간적인 기독교에 이해의 지평이 넓어져 작금의 분란이 조금은 줄어들지 않을까라는 희망의 목소리를 듣는다.

 

하나의 의문은 남는다, 왜 유대인들은 예수와 기독교를 강하게 부정하고, 기독교는 유대인을 그렇게 부정했을까? 홀로코스트의 직접적인 원인제공자, 가해자가 아니라고는 하지만 수백년이상 지속되어온 반감이 홀로코스트를 낳게 한 원인이 아니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던 팥쥐전
조선희 지음, 아이완 그림 / 노블마인 / 2010년 6월
평점 :
품절


콩쥐의 아버지 최만춘을 고추박이처럼 차버리고 다른 서방을 얻어 간 팥쥐 어미에게 관가에서 선물이 당도했다.
팥쥐 어미는 좋아라 하며 항아리의 아가리를 동여맨 노끈을 풀어보았다.
큰 항아리에 가득 든 것은 모두 젖갈이었다.
항아리와 함께 종이도 한 장 들어 있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흉한 꾀로 사람을 죽인 자는 누구든 이와 같이 젖으로 담그고,
딸을 가르쳐 흉하고 독한 일을 실행케 한 자에게 그 고기를 씹어보게 하노라'
팥쥐 어미는 그만 기절하여 자빠졌다. -콩쥐팥쥐중에서



동화 제대로 읽었나. 어른들은 너무해
콩쥐팓쥐는 너무나 유명한 전래동화라 드라마로 책으로 수차례 읽었다는 오래된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데 작가가 인용한 대목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팥쥐를 젖갈로 만들었다? 엄청나게 잔혹한 이야기 아닌가. 철이 들어서야 우리가 읽었던 이솝우화, 안데르센, 그림형제의 동화도 어린시절 읽었던 내용과 많은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았다. 세상 자체는 우리 읽었던 동화와는 다른 세상이란 것을 어른들이 아이들이 미리 알면 안된다고 해서 내용을 편집하여 부분적으로만 알려주었다는 것을.. 콩쥐팥쥐전도 완본을 읽지 않았다는 것을 정말로 실감나게 하는 작가다.


'세상의 모든 이야기와 모든 사람들에게는
모든 사건과 상황 속에는 못다한 이야기가 있게 마련이고,
사람들은 못다 한 이야기의 자초지종을 알고 싶어한다.
그러나 죽은 자에게는 더 끄집어 낼 것이 없었다. 죽은 자가 귀신이 되어 나타나 이러저러하니 조사해 주오, 나의 원한을 풀어주오, 하고 청하기 전까지는. 143쪽


 

잘 먹고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그럼 그 뒤에는 어떻게 되었을까
동서양의 동화는 대부분 권선징악, 나쁜 짓을 하면 벌을 받고 좋은 행동을 하면 복을 받아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로 마무리된다. 그럼 그 뒤에는 주인공들이 어떻게 되었을까 그 다음 이야기가 궁금했다는 작가의 호기심이 모던 팥쥐전을 쓰게 된 동기란다.

 

동화의 배경이 되는 시대와 오늘 날의 시대상황은 크게 달라졌고 가치관 역시 크게 달라졌으므로 동화속 인물들이 오늘날에도 살아 있다면 어떤 모습, 어떤 생각일까, 이야기의 내용을 요즘 시대상황에 맞게 꾸민다면 어떻게 이야기가 전개되고 결말이 날까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재밌는 그림이 그려지는 소설 모던 팥쥐전은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소재다.

 

콩쥐팥쥐, 여우누이, 우렁각시, 개나리꽃, 선녀와 나뭇꾼, 10년간 지팡이를 휘두른 사람이란 전래동화가 이 소설의 소재다. 이중 개나리꽃과 지팡이 이야기는 정말 생소하다.


거의 대부분의 꽃에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할미꽃, 히야신스, 수선화, 며느리밥풀꽃.. 동서양을 막론하고 한을 품고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 서려 있는 꽃, 모든 생화는 차갑다는 것이 바로 그것 이유구나.


옛날 사람들은 모든 생명체나 사물들에게도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으니 어느 하나 사연이 없는 것들은 없는 모양이다.

모던 팥쥐전은 정말 충격적이다. 소름이 오싹 돋아 시골에 살았더라면 밤에 뒷간에 가지도 못하게 할 정도로 무서운 이야기 그 자체다. 그리고 상상, 예측을 불허하는 반전은 작가의 기발한 착상에 놀라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 이야기의 전개구조가 빠져들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래서 조선희 작가의 매니아층이 많다는 출판사의 이야기가 허언이 아니라는 것을..

 

이 작품은 기존의 동화를 조금 비틀고 뒤집고, 예측을 불허케 하는 이야기 전개로 단숨에 모든 내용을 읽고 싶게 만든다.

 

모두가 놀라운 이야기지만 자신을 원하는 자리, 자신을 필요로 하는 자리를 잡지 못한 평범한 사내의 이야기가 담긴 지팡이는 안스럽고 요즘 우리 젊은이들의 세태를 반영하는 것 같아 가슴이 먹먹해져 온다. 그러나 그렇게 원했던 자리가 옴쭉달싹할 수 없는 자리,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아 그 자리에 밀어넣어야 탈출할 수 있는 자리라니, 생존경쟁의 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자화상 같아서 슬프다.

 

믿었던 사람에 대한 배신감으로 열이 올랐던 순간의 기억처럼 전혀 다른 이야기 구조가 나를 놀라게 만들고, 동화와는 180도 뒤집어진 이야기가 던져주는 쾌감이나 두려움, 복수가 때로는 통쾌하기도 하다.

 

어떤 이야기든 상상하는 그 이상의 결말로 나를 화들짝 놀라게 만드는 모던 팥쥐전~ 온가족이 함께 무더위를 잊어버리고 독서삼매경에 빠져들 수 있는 작품이라 추천하지 아니할 수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치우와 파수꾼의 탑 치우 판타지 시리즈 2
이준일 지음 / 문학수첩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외국의 판타지 소설에 익숙해 있던 나와 가족들에게 신선한 느낌을 주었던 치우와 별들의 책 후속편으로 나온 치우와 파수꾼의 탑은
1편과 마찬가지로 누가 먼저 읽을것인가를 다툴 정도로 이른 더위를 식혀 준 작품이다.



마법을 소재로 하는 책은 100% 픽션이지만 몰입도가 강해 현실과 픽션의 경계를 때로는 잊게 만들고 청소년이 주인공으로 하고 이들의  성장통과 사랑, 선과 악의 대결, 환상적인 마법, 최종적인 승리는 언제 선의 몫이기에 작가가 만들어 낸 세상이기도 하지만 우리 모두가 꿈꾸는 능력이기에 더 흥미진진한 소재가 아닐까?



치우가 가이아랜드의 문제를 해결하고 지구로 귀환하던 날, 장막이 틈으로 마법사와 악의 화신 메데스티가 지구로 잠입한다.
가이아랜드의 생명수 역활을 했던 다람쥐를 훔쳐 파수꾼이 감추두었던 불사불멸의 존재가 되는 비법을 찾아 인간과 마법사의 전면전을 감행하기 위한 메데스티의 음모~ 치우와 올리비아는 어떻게 인간과 마법사의 전쟁을 중단시키고 위기에 빠진 가이아랜드와 인간 세계를 구원할 것인가?



인간의 양면적인 특성을 보여주는 치우의 또 다른 자아인 로딘이 태양검의 보석에 봉인된 치우의 영혼을 대신하고
메데스티가 치우를 통해 파수꾼이 남긴 비밀의 주문을 얻기 위해 파견한 가짜와 위기에 빠진 가이아랜드를 구하기 위해 치우를 찾아나선 진짜 올리비아를 로딘 혹은 치우는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가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파수꾼들의 비밀, 악의 힘을 이용하여 가이아랜드를 유지하는 비밀, 힘이란 반드시 선하지 않다는 역설, 최강의 힘을 지닌자는 세계를 지배할 야욕에 불타고, 신이 되고픈 욕심에 선의 표상으로 1권에 보였던 파수꾼들의 비밀은 참으로 충격적이다.
치우라는 이름은 치우천황에서 따오지 않았을까 하는 나만의 상상에 덧되어 보면 강한 것은 부러진다. 극과 극은 통한다는 동양철학이 작품에 반영된 것이란 섣부른 판단을 하게 만든다.



치우가 인간 세상과 가이아랜드를 구원했다는 영웅심리에 도취되기 시작하는 순간, 그는 지배자가 되려는 욕망을 가지지 않을까? 후퍼와 힘과 지혜를 맞교환하여 파국을 중단시킨 치우와 올리비아의 사랑은 어떻게 될까? 3편이 기다려진다.


악을 악으로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악은 선으로 치유하는 하는 것이다는 것.. 힘이 악을 물리치는 원동력이 아니라는 것. 악의 힘을 가이아랜드란 이상향을 살아움직이게 만드는 힘으로 활용한다는 발상이 이채롭다.
우리 판타지 소설도 더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언젠가 영화로 만들질 날도 멀지 않은 기대감을 준다.



치우와 같은 마법사가 있다면 지금 대한민국이 안고 있는 극한 대립의 남북문제도 평화롭게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허무맹랑한 상상이 현실이 되었음 좋겠다. 전쟁보다 평화! 폭력은 폭력을 부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리산 스님들의 못 말리는 행복 이야기
천진 지음, 현현 엮음 / 불광출판사 / 2010년 5월
평점 :
품절


홍서원에 가고 싶다. 정봉무무스님의 법어를 듣고 수행중인 스님들과 단 일주일만이라도 수행하고 싶어진다. 땅끝마을 아름다운 절을 읽고 미황사에 가고 싶어졌던 몸앓이와 비슷한 느낌으로 내 맘을 쏠리게 만든다.

이미 지리산스님들의 못말리는 수행이야기란 책을 읽고 홍서원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행복이야기 편에 책을 읽고 찾아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줄을 잇고 있지만 나는 언제 그곳을 찾을 지 기약없이 방황하며 살아가는 어리석은 중생이다.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일까. 이 책을 읽기전 홍서원을 전혀 몰랐는데 부처님 오신날 SBS의 특집방송 영화배우 조재현의 하루출가란 타이틀이 눈과 마음을 사로잡았는데.. 웬걸 이것이 무슨 조화란 말인가?
지리산의 홍서원에서 생활하는 이 책의 지은이  천진스님과 엮은 이인 현현스님과  고승 정봉무무 스님이 주인공이라 감짝 놀랐다. 어떻게 풀어야 할까?

 

지리산의 작은 수행처 홍서원에서 수행중인 스님들의 수행이야기에 이은 행복이야기란 책은 멀게만 느껴지던 수행승들의 내면과 일반인들의 고뇌를 해결할 수 있는 정정무무스님의 법어와 사연을 사성제와 팔정도란 카테고리로 묶음지어 정리한 책이다.

쉽지 않은 길을 가고 쉽지 않은 말을 쉽게 말하는 정봉무무스님의 법어는 나를 다시보게 만든다.

 

육신에 메이고 욕심에 메이고 가정과 직장이란 핑게를 대면서 음주가무를 즐기고 육식을 즐기고 백팔번뇌에 쉬이 휩쓸리고 무상한 일상의 가치에 더 큰 무게중심을 둔 나에게 정신차려라 말한다. 모든 것이 덧없고 부질없는 것인데 그것이 영원한 것인양 불을 찾아 날아드는 부나방처럼 빠져들어가고 있다. 하~ 허망한 것이여. 버려야 하는 것을 버리지 못하고 이런 저런 이유를 들며 살아가니 윤회의 사슬을 벗을 길 없도다.

 

법기 강정진 거사의 영원한 대자유인이란 책을 보며  몽중일여, 숙면일여, 오매일여의 경지가 가능할까란 생각을 했는데 정봉무무스님도 이를 말한다. 버스기사를 하면서도 수행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보니 참 인간의 의지가 참으로 강하구나. 이런 핑게 저런 핑게로 육식을 끊지 못하는 환경운동가들이 진정한 환경운동인가 라고 지적하는 대목은 간담이 서늘하다.

 

4대강 살리기에 반대하며 분신공양을 한 문수스님의 뉴스와는 상반된 정치 비참여론과 사후 3~4일동안 육신에 손을 대면 안된다고(이럴 경우 악영향을 미친다고) 장기기증운동엔 부정적인 스님의 말씀은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이것 역시 사바세계의 가치에 대한 사람들의 집착인가?

 

불살생계를 지키기 위해 모기에 물려도 죽이지 않고 참는다, 배추를 심어도 벌레들이 먹을 배추밭을 따로 만들고 들고양이와 새들을 위해 먹이를 내놓은 이야기, 동굴수행중 쥐를 위한 보시, 하루 한끼 공양~ 스님들이니까 가능한 거야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불교가 아니더라도 육식문화가 빚어낸 것들-비만, 생태계파괴, 소 한마리가 품어내는 이산화타소가 자동차 1대보다 많아 벌어지는 환경오염, 소는 배불리고 사람은 굶주리는 이상한 세계의 법칙 등등..이 지금의 우리를 병들게 하고 지구에 생채기를 내고 있는 것은 피할 수 있는 현실이지만 피할 수 없는 현실로 우리가 만들어 가고 있다.

 

불자가 아니라도 새겨 들으면 좋은 말씀, 세속의 가치로 보면 가치 없어 보이는 것들에서 행복을 찾을 수도 있다는 것을 '지리산 스님들의 못말리는 행복이야기'는 말하고 있다.

 

 


사성제와 팔정도란?
불교(佛敎)에서 말하는 영원(永遠)히 변(變)하지 않는 네 가지 진리(眞理)를 말하는 사성제
고성제(苦聖諦),집성제(集聖諦),멸성제(滅聖諦), 도성제(道聖諦)

고뇌를 극복하고 이상의 경지인 열반에 이르기 위한 열반의 방법을 팔정도
정견(正見),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 (正定)

 


"허공은 구름이 있든 없든 그 자체로 허공이야. 허공을 증명하려고 구름을 없앨 필요는 없거든.
'무심하라', 무념하라'는 말은 무식한 말이야. 우리는 본래 허공과 같아서 비울 필요조차 없는 존재거든. 허공에는 먹구름이 끼고, 비바람이 불고, 폭풍이 치더라도 허공은 허공일 뿐이지. 구름이 있어 오히려 허공다운 거야. 모든 형상 있음은 형상 없음의 드러남이야...

땅에 동그라미를 그려놓으면 그 안에 있는 아이가 못 나오게 되는 것과 같이, 우리는 뒤바뀐 생각으로 자유를 얻지 못해. '어째서 내가 지금 자유롭지 못하는가? 어디에 구속되어 있는가? 가만히 살펴보면 나를 둘러싼 철조망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아. 이 몸이라는 것이 본래부터 걸림없는 것인데, 착각으로 있다고 생각헤서 스스로 쳐놓은 철조망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어요. 똑바로 보면 나의 자유를 구속하는 것은 그 어디에도 없어.. 허공을 증명하려고 구름을 없앨 필요는 없다 중에서 302~303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