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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한 세상 - 위기의 시대를 좌우할 열쇳말
박성민 외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0년 4월
평점 :
불확실성의 시대, 불확실성이 팽배한 세계, 불확실함의 원인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덫에 빠져 가산탕진하거나 단번에 극빈자로 추락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현실을 직시하고 자기 주체성을 가지고 대처하는 현명한 지혜가 요구된다.
천안함 침몰사건, 황장엽암살 목적 간첩 체포, 검사 스폰서 사건, 정쟁의 소용돌이,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4대강 문제, 방송장악, 재개발, 환경오염, 석유고갈, 지구온난화, GMO, 신종플루 등의 각종 전염병 창궐, 흉악범 증가, 국제금융위기~
어느 것 하나 우리를 행복감에 젖어들게 하거나 안심하고 살만한 대한민국이란 생각이 들게 만들지 않는다.
선진국 기준, 후진국 기준 잣대로 평가를 해도 국민 행복지수에서 항상 뒷전을 맴도는 대한민국, 불확실성이 증폭되는 세상, 그중에서도 불확실성이 더 높은 대한민국에서 안심하고 살아가기 위한 방법은 없는 것인가?
어떤 사람은 버리고 비우고 느리게 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종교에 귀의하라고 하고 도에 관심이 있습니까란 사이비종교도 판을 치는 세상이고 일확천금을 약속하는 감언이설로 혹세무민하는 사기꾼들이 판칠 수 있는 틈새가 있는 현실이다.
불확실한 세상은 불안에 떠는 사람들을 위해 정치, 경제, 사회문화, 과학, 지구촌이란 다섯가지 테마를 주제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진단한 불확실성의 원인과 해법을 통해 지속가능한 사회, 생존해법을 제시하기 위해 기획한 책이다.
어떤 대목에선 그래 맞아 그렇군 그렇지란 말이 나오지만 어떤 대목에선 너무 어려워 전문가가 지적한 문제점이나 해결책이 언능 와 닿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나의 무지의 소치라 믿는다.
불확실성은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때 사건 발표 당사자에게 유리한 부분만 발표하고 불리한 부분은 감추거나 늦장 대처에다 각종 언론의 추측성 보도가 난무할때 더욱 증폭된다는 것이 이번 천안함 침몰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불확실성의 대부분이 일개인이 통제할 수 있는 영역 밖의 문제가 대부분이고 일국의 문제가 아니라 전지구적인 문제가 대부분이란 점에서 우리가 감내해야 할 파장은 더 증폭되고 있다.
GMO나 광우병 문제의 경우 이를 허용하려는 측은 유해성 입증을 주장하여 정책을 추진하나 실제론 무해성을 입증해야 하는 것이 개발사나 제조사의 책임이 아닌가 싶다. 지금의 기술수준으로 유해성이 입증하지 못하니 무해하다는 결론은 그 피해를 후손들이 고스란히 따안고 살아란 말과 동일하다.
이런 문제는 석유고갈로 인한 지구온난화의 해법에서도 고스란히 들어나는데 환경오염원이 많지 않은 후진국도 그 주범국가들인 북반구의 나라들과 동일하게 공유해야 한다는 셈법이 우선될때 피해 당사자인 후진국의 반발은 불을 보듯 뻔하지 않는가?
불확실성을 줄여주는 것이 정치의 근본이란 지적은 정말 타당한 말이다. 남북이 대치하는 상황이 가져오는 불확실성, 정치다운 정치를 한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정치꾼들이 우리가 통제하지 못하는 불확실성도 버거운데 그들은 한술 더 떠 불확실성을 증폭시키고 있다고 지적한다.
불확실성의 세상, 옛날처럼 종교에 귀의하여 구원책을 모색하고 안심이라도 했으면 좋겠지만 지금의 종교는 예전의 종교가 누렸던 지위를 잃은지 오래요, 종교가 주는 해결책도 백약이 무효가 된 세상이다.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하는 말이니 믿고 따라야 한다는 말처럼 허무맹랑하고 위험천만한 일도 없는 세상이다. 국제금융위기, 황우석사태 등 일련의 불확실성을 증폭했던 사람들이 바로 전문가들이 아니었던가? 수학, 과학 이론도 100% 완전한 것이 아니라니 더더욱 전문가들이 주장하는 것이라고 덮석 물고 의사결정을 하는 것도 위험하다는 것이다.
석유고갈 에너지 문제에 대한 해법문제에서 원자력 수출을 대대적인 축제분위기로 몰아가는 우리나라의 해법이 나중에 몰고올 파장에 비하면 미봉책이란 지적도 나온다.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은 2만년이나 별도 차폐 보관해야 하는데 지금의 기술력으론 완벽한 처리방법이 없다니 심각하게 다가온다.
불확실성의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지속가능한 세상을 위한 해법은 무엇일까. 이 책의 마지막장 덮었지만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사람들은 불확실하거나 위험한 것은 회피하고 안전하고 확실한 것을 선택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성향이 강하다. 어느 한쪽의 주장을 완벽하다고 받아들이고 나면 다른 편의 해법이 더 합리적이라고 해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한다.
'지금처럼 불확실한 세상에서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50년 뒤 지구는 지금과 같은 생태계가 아니라는 것이다'란 에드워드 윌슨의 말처럼 지금 확실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조차도 세월이 흐르면 불확실한 것으로 판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의 임기응변의 대처보다는 먼 미래를 내다보는 자세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요구되고 불확실성을 빌미로 이리저리 휩쓸리기 보다는 자기 주체적인 삶의 자세, 더불어 함께 살아가려는 연대의 자세,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대안을 모색하는 주체자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 불확실한 세상이 던지는 화두는 아닐까?
불확실성~
그 정체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할 요인이 줄어든다. 그 놈의 불확실성을 확실히 잠재울 대책을 수립하는데 진력을 다하면 된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다가오는 불확실한 세상은 아직도 정체불명, 알 수 없는 긴장감을 우리에게 심어준다. 그리고 전문가들이 해법이라고 제기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 미봉책이며, 그 뒤에 감추어진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하고 또 명심하며 살아야 한다.
확실성이란 새로운 대안을 상상할 수 없게 만드는 닫힌 공간이란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뒤집어 보면 불확실하기 때문에 문명의 발전을 이루었고 불확실성을 해소하는 해결책을 모색하는데 힘을 모은다면 인류에게 닥친 문제는 인류가 해결할 수 있다는 낙관을 믿고 살아도 되는 이유가 아닐지~
책에서 밑줄긋기
근대의 인식론은 불확실성을 위험한 상품이라고 포장하지만, 불확실성은 질서나 안정이 결핍/결여되어 있는 '악'의 상태가 아니라 결정 내려지지 않은 열려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렇기에 존재론적 불확실성은 인문의 힘으로 지고 가야 할 인간의 그림자이며, 불안의 근원이 아니라 창조의 진원지이다.
창조는 불확실성의 세계에서 만들어진다. 이것이 아닌 다른 것, 현존하는 세계와는 다른 세계는 불확실성의 세계를 통과할 때만 비로소 만들어진다. 그래서 상상력은 불확실성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상상력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그리워하는 동력이며, 상상력은 부재하는 것에 대한 희망이다.
상상력의 원천은 체계가 아니라 불확실성이다. 인류는 호모 사피엔스의 터전을 떠나 먼 방랑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올 때 불확실성과 관계 맺는 새로운 삶의 테크놀러지를 익힌 채 돌아와야 한다.
망각되었던 존재론적 불확실성에 대한 자기의 테크놀로지 복원만이 불확실성 통제라는 인식론적 헛된 꿈의 미친 질주를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구원은 때로는 망각되었던 것을 기억해 낼 때 이루어진다. 14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