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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의 배신 - 생각을 멈추면 깨어나는
앤드류 스마트 지음, 윤태경 옮김 / 미디어윌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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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젠 운동도 해야 하고, 읽던 책도 마저 다 읽어야 해서 아예 책을 들고 학교 운동장으로 나갔다. 날씨가 너무 무덥다 보니 나 말고 운동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그래서 커다란 운동장을 통째로 전세라도 낸 듯 나 혼자 마음껏 걷다가, 뛰다가, 책 보다가 왔는데.. 아무래도 환경이 낯설어서 그런지 가져간 책을 읽기는 다 읽었는데 뭘 읽었는지? 마치 꿈속에서 본 듯? 실감이 안 나서 결국 집에 와서 다시 보긴 했지만. 크크크 그래도 어쨌든. 나무 그늘 사이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다 읽은 이 책 <뇌의 배신>은 그렇게 해서 내겐 더 특별한 책이 되었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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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의 배신>은 언뜻 제목만 봐서는 (우리 뇌의 신비를 파헤쳐주는) 뇌과학 책일 것만 같은데 예상을 빗나간다. 책 뒤표지를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늦잠을 자다가 침대에서 x축과 y축을 발견한 데카르트, 정원에서 넋 놓고 사과나무를 지켜보다 만유인력을 발견한 뉴턴, 거센 바람소리가 들리는 성곽을 걷다가 후세에 길이 남을 아름다운 시를 쓴 릴케 이런 문구도 보이고, 멍하게 빈둥거리는, 아무 일도 하지 않을 때, 한가한 상태 와 같은 말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해 이 책은 “게으름 찬양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생뚱맞게 게으름과 뇌라니? 둘 사이에 무슨 연관관계가 있길래? 하는 게 이 책의 키워드인 듯.
솔직히 말해서 나는 <뇌의 배신>이 당연히 뇌과학 책인 줄 알고 선택했는데, 우째된게 게으름 피우는 이야기만 자꾸자꾸 나와서 짜증이 났는데, 이제 생각해보니 나 역시도 게으름을 - 나태함 - 한심함 - 무능함 - 뚱뚱함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 사람이라 계속 이어지는 '게으름 예찬이 더 못마땅했던듯싶다. 그런데 책 42쪽의 사례를 읽으니 으아니! 정말 그렇네! 하며 눈이 커지고 귀가 쫑긋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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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인류학을 가르쳐준 스티브 샘슨 교수는 1990년대 초에 덴마크 컴퓨터 회사의 컨설턴트로 채용됐다. 이 회사는 한 루마니아 기업의 사무현대화 사업을 맡았다. 덴마크 직원들은 루마니아 기업에 컴퓨터를 설치하고, IT 부서를 만들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추진된 듯 보였지만 문제가 생겼다. 루마니아 기업의 컴퓨터 시스템이 활성화되고 직원들이 훈련받은 뒤, 직원들은 점심시간에 퇴근하기 시작했다. 덴마크 관리자들은 이를 의아하게 생각하고, 루마니아 직원들에게 왜 업무시간 도중에 퇴근하는지 물었다. 그러자 루마니아 직원들은 컴퓨터 시스템 도입 덕분에 한나절 걸릴 일을 반나절 만에 끝냈으니 퇴근한다고 대답했다.
스티브 샘슨 교수는 이 작은 위기를 해결하고자 루마니아 기업을 방문했다. 덴마크 관리자들은 컴퓨터 도입 후 일을 두 배로 처리할 수 있게 됐는데도 작업량을 늘리지 않으려는 루마니아 직원들을 이해할 수 없었고, 루마니아 직원들은 컴퓨터 도입으로 일을 두 배나 빨리 처리하게 됐으니 작업량을 두 배로 늘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덴마크 관리자들을 제정신이 아니라고 여겼다.
♣ 뇌의 배신 - 앤드류 스마트 :p 4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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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 같지 않나? 하루 종일 걸릴 일을 반나절만에 끝마치고 일찍 퇴근하겠다는데, 누구는 절대 그런 꼴을 못 봐주고.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제정신이 아니라 여기고 있는 이런 장면?
바로 다음 문장에서 저자는 “이는 어떻게 보면 나라 간의 문화적 차이를 보여주는 일화지만, PC처럼 노동자들의 근로시간을 줄여줄 듯 보이는 기술이, 사실은 오히려 노동자들의 여가를 줄인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일화이기도 하다.”라고 했는데, 하하 그러게 아무리 업무 효율도 좋지만 2배로 빨라지고, 두 배가 4배가 되고, 네 배가 8배가 되고, 계속 이런 식으로 나가다가는 어느 순간 인간도 기계부품처럼 소모되다가 닳고 닳아 결국 파멸하지 않겠느냔 말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서야 나는‘현대인들에겐 그 무엇보다 휴식과 게으름과 나태가 필요하다’는 저자의 주장이 어느 정도 이해되기 시작했는데 더불어 책 첫머리에 인용된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도 이제야 감동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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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가하게 지낼 수밖에 없게 된 요새야말로 가장 심오한 활동을 펼친 나날들이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의 행동들이란 한가한 시간 동안 내면에서 일어난 방대한 움직임의 마지막 잔향에 불과하지 않나 생각한다. 어쨌든 확신을 품고, 헌신적으로, 가능하다면 환희를 느끼며, 한가로이 지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손을 움직이지 않을 정도로 한가한 나날은 너무도 조용하기에, 옷깃이 스치는 소리조차 크게 들린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계속해서 저자는 현대인들은 특별히 원하지도 않는 것들을 사기 위해 딱히 즐겁지도 않은 직장에서 극도로 열심히 일해 장기적으로 건강을 해쳐야 할 의무라도 있는 것처럼 느낀다. 면서 도대체 노동이라는 개념은 도대체 언제부터 인류의 문화에 들어왔는지? 또 한가롭게 지내는 것이 두뇌에 좋다는 개념은 어디서 왔는지? 하는 것들을 차근차근 밝혀 나가는데.
저자의 전문분야가 ADHD (주의력 결핍 과잉 장애) 아동들의 집중력과 기억을 향상시키는 연구다 보니 나는 그 방면의 연구 사례와 실험 결과들을 흥미진진하게 읽었는데. 특히 멀티태스킹에 관한 실험을 잊을 수가 없다.
클리포드 나스 스탠퍼드대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이메일 답장을 보내고 인터넷을 검색하면서 세 사람과 동시에 대화하는 식의) 멀티태스킹에 능한 동료와 친구들에게 경탄한 나머지 일부 사람들이 ‘멀티태스킹에 능한 비결’을 밝히고자 일련의 실험을 실시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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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사각형 둘이나 넷, 여섯 개로 둘러싸인 빨간 삼각형들을 고효율 멀티태스커(다중작업자)와 저효율 멀티태스커(보통, 한 번에 한 가지 일 이상을 시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잠깐씩 보여줬다. 클리포드 나스 교수는 일부 빨간 삼각형의 위치를 바꿔가며 같은 그림을 다시 보여줬다. 피험자들은 파란 사각형들은 무시하고, 빨간 삼각형 위치가 바뀌었는지 판단하라고 지시 받았다. 그랬더니 저효율 멀티태스커들은 이 과제를 아무 문제없이 수행한 반면, 고효율 멀티태스커들은 저조한 실적을 보였다. 그들은 파란 사각형을 무시하지 못하고 계속 신경 쓴 탓에 빨간 삼각형이 이동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 실험은 멀티태스커들이 불필요한 정보를 걸러내는 능력이 떨어지고, 본인이 신경 써야 하는 과제와 무관한 과제에 지나치게 집중력이 분산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멀티 태스커는 특정 시점에 본인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상관있는 정보와 무관한 정보를 제대로 구별하지 못한다. 이러한 사실을 입증하는 명백한 예로, 해마다 휴대전화로 통화하며 운전하다가 사망하는 사람이 2천 600명, 부상당하는 사람은 33만 명으로 추산된다. 멀티 태스킹은 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와 유사한 상태로 이어지는 강박행동이라 볼 수 있다.
♣ 뇌의 배신 - 앤드류 스마트 :p 4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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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나도 지금 음악 들으면서, 책 리뷰 쓰면서, 읽은 책도 다시 한 번 넘겨보면서, 커피도 마시고, 잠깐 이메일도 확인하고, 세탁기 돌아가는 것도 신경 쓰며 도대체 몇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하고 있는지 모를 지경인데, 이런 멀티태스킹이 주의력 결핍 과잉장애와 유사한 상태로 이어지는 강박행동이라니! 당장 요가 자세로 앉아 명상이라도 해야 하나? 걱정이 되기도 하고..
끝으로 인류학자 사라 켄지어의 섬뜩한 경고문을 옮기며 난 진짜 작정하고 게으름을 피우러 가야겠다!
“경제위기는 기득권층의 기대수준을 관리하는 기제다. 미국인들은 자신이 착취당하는 것을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도록 조건화당하고 있다. 대학을 졸업하는 순간부터 빚에 짓눌리는 미국인들은 돈을 받지 않고도 일하려고 경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