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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평점 :
소설 따위 읽어서 뭐해? 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어휴 하루 하루 사는것 자체가 드라마고, 소설인데 남이 써놓은 쓸데없는 구라 따위 읽을 시간에 하나라도 더 내 삶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책을 읽어야지.. 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정말 용감무쌍하게도 그런 생각을 했던 때가 내게도 있었다. 물론 지금은 소설이 좋아 죽겠지만.. 문득, 내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뭘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거창한 질문에 단순하게 답 하자면 "이야기가 고파서!" 랄까?.. 거의 매일 밤 책을 읽으며 잠들고, 이미 수 많은 책과 수 많은 이야기들을 만났지만 밑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늘 이야기가 고프다. 여전히 이야기가 고픈 상태에서 만나게 된 천명관님의 <고래>는 이야기의 배고픔을 (잠시나마) 잠재우기에 충분했다. 와우! 어쩜 이런 소설이 다 있을까?
소설은 800백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화재 이후, 방화범으로 체포되어 교도소에 수감되었던 춘희가 다시 벽돌공장으로 돌아오는 장면부터 시작된다. 교도소에서 갓 출소했다니 목사가 내밀던 두부를 가볍게 손으로 내팽개치며 "너 나 잘하세요" 하던 친절한 금자씨가 떠오르지만. 춘희는 미인은 커녕 백킬로그램이 넘는 거구에 벙어리다. 스물일곱살 방화범 춘희가 훗날 '붉은 벽돌의 여왕'이라 불리게 된다니.. (아니 "붉은 드레스의 여왕"도 아니고 "붉은 벽돌의 여왕"이라니!) 그녀 앞에 어떤 파란만장한 삶이 펼쳐지게 되는 걸까? 너무 궁금한 마음에 허겁지겁 책장을 넘길수록 뚝딱 뚝딱 도깨비 방망이처럼 온갖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와 정신을 차릴수 없었다.
얼굴이 워낙 박색인 탓에 시집간 지 만 하루만에 신랑 품에 한 번 안겨보지도 못하고 소박을 맞고 쫓겨나게 되었다는 국밥집 노파 부터, 반편이, 벌떼를 몰고다니는 애꾸 이야기로 온통 넋을 빼놓더니.. 춘희 엄마 금복의 삶은 어찌나 더 스팩터클하신지 난 정말이지 정신이 쏙 빠져서 "국밥집 노파가, 그녀가 누군지 벌써 잊은 건 아니시겠지?" -151p 했을땐, 국밥집 노파가 누구였더라? 했었다. 생선장수, 부둣가, 칼잡이, 걱정, 쌍둥이 자매, 文, 코끼리 점보까지. 온갖 흥미로운 캐릭터들이 총 출동하는 <고래>는 제 10회 문학동네 소설상 수상작이기도 하고 대단한 소설이란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450page의 두꺼운 이 책을 (특히 두꺼운 책에 약한 내가;;) 몇 일 만에 뚝딱 다 읽은걸 보면 게다가 퇴근해서 집에 오면 제일 먼저 금복은.. 그래서 어떻게 됐을까? 궁금함에 밥 먹으면서까지 책장을 넘겼을 정도니! 천명관은 타고난 이야기꾼임이 틀림없는것 같다. 그러고보니 예전에 <가아프가 본 세상>을 읽고 존 어빙 당신은 타고난 이야기꾼 이로군요~ 라는 리뷰를 썼던 적이 있었는데 감히 존 어빙에 견주어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한국적이고, 독특하고, 신선하고, 특별하고, 참신한 소설이었다.
이 책은 소설 그 자체도 무척 재미있었지만 "소설이란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 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 소설에 대한 내 생각이기 때문이다" 라는 은희경님의 심사평도 무척 인상적이었고 심지어 수상작가 인터뷰까지 이야기가 한 보따리인데, 잠깐 옮겨보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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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과 관련해서 떠오르는 이미지가 하나 있어요. 지지난해 겨울인가 아주 추울 때인데 한 여고생이 저에게 다가와서 길을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의 덩치가 아주 컸어요. 백칠십오 센티미터 정도 되는 키에 몸무게도 칠, 팔십 킬로그램이 나갈 정도로...... 그리고 오래 전에 가출을 했는지 옷이 매우 더러웠고요. 제가 길을 건너서 버스를 타고 가라고 가르쳐줬는데 그 친구는 길을 건너지 않고 그냥 걸어가더라고요. 걸어서 가기엔 너무 먼 거리라 제 생각에 '이 친구가 돈이 없나보구나' 싶어서 주머니에 있던 천원짜리 몇 장을 건네줬어요. 차를 타고 가라고. 그런데 한사코 안 받더라고요. 추운 겨울밤에 어둠 속으로 걸어가는 그 친구의 뒷모습이 저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어요. 그 큰 육체 안에 있는 여성, 그 모순된 비극성 이랄까, 아무튼, 그런 느낌이 있었어요. 딱히 그것 때문에 이 소설을 쓴 건 아니지만 춘희라는 인물을 그릴 때 많은 참고가 됐죠.
-수상작가 인터뷰 44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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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코 지나칠, 거리에서 만난 학생의 모습에서도 글감을 찾아내는.. 그런 학생을 외면하지 않고 천원짜리 몇 장을 건네줄 줄 아는 마음 따뜻한 작가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져 나는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고 이름 석자 만으로도 믿을수 있는 좋은작가를 한 명 더 알게 된거 같아서 기뻤다. 오랫동안 위시리스트에 들어있던 <고령화 가족> 도 곧 읽어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