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이불에서 태어난걸요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622
봉주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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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안 읽히는 시집이 오랜만인데...

시 들이 전하려고 한 말이 많아서인지
날이 무더워서 인지 모르겠다.

- 거기에 돌부리가 있다는 말을 다섯 번쯤 듣고도
같은 곳에 걸려 넘어졌다.
그러자 당신은 내가 넘어질 곳에 습기 머금은 흙을 덮어주기 시작했다. - 시인의 말

- 나선계단을 오르면 어느 날에는 레코드 가게가 되었다가 어느 날엔 거실이 되고, 어느 날엔 헌책방이 됩니다. 사고 싶은 책을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꽂아 넣고 다음 날 다시 찾으러 오는 마음. 그러고도 사지 못하고 다시 더 깊은 구석에 꽂아 넣는 것. 그림자는 내 옆으로도, 앞으로도 생겨날 수 있는데 항상 뒤로 생겨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곡해하며 자라났습니다. - 계단참 중

- 벌써 벚꽃이 피었다니, 감탄하는 3월의 사람들. 얼굴을 모른 채 목소리만 들을 수 있다면 사람을 깊이 사랑할 수 있겠다. - 식물 식별 능력 중

- 전등이 떨린다. 식탁에 모여 앉은 어제와 내일과 당신. 대화를 나누는 너희 사이에서 잠자코 있는 것만으로 나는 거짓을 쌓아가는 거예요. 둥그런 식사는 너의 배려와 무심함의 형상이었다. 우리가 그저 서로의 평범한 저녁이었더라면, 시간이 흐르더라도, 이렇게 변했구나, 손등을 쓸어내리는 손끝을 피하지 않으면서, 도리어 손을 잡아끌어 거머쥐었더라면. - 내밀의 빛 중

- 우리는 모두 이불에서 태어난걸요. 천에서, 유연함 속에서.
(...)
타향이 고향이 되는 거야. 어지럽게 짐이 펼쳐진 거실 마루에 앉았다. 반나절 만에 다른 곳으로 왔구나. 달라지기보다 달라지기를 결심하는 시간이 길고. 본가가 어디냐고 물으면 태어난 곳을 말해야 할지, 자라온 곳을 말해야 할지, 부모님이 계신 곳을 말해야 할 지 고민했다. - 주소력 중

- 결말을 걱정하진 않습니다. 잘 되든 못되든 모두 별일이 아닙니다. - 해로운 장난 중

- 그 한낮, 창고에서 불탄 사람은 서른여덟 명이다. 그 숫자를 확인하기까지 물류 창고 현장에 나간 기자와 취재부 사이에 수많은 통화가 오갔고, 취재부와 편집부 사이에 수많은 뜀박질이 있었다. 사망자의 숫자가 표시되는 전광판 앞에서 그는 차오르는 숫자를 실시간으로 보고했다. 서른입니다, 서른하납니다, 서른셋입니다, 넷입니다, 다섯, 여섯, 일곱입니다. 사회부장과 했을 가장 마지막 통화에서 그는 "서른여덟인 것 같습니다"라고 얘기했다. '서른여덟입니다'가 아니라 '여덟인 것 같습니다'라는 불확실한 단정. 수회기 너머로 보고를 들은 사회부장은 불길이 화를 냈다. 그런 말끝 처리가 촌각을 다투는 마감 시간에는 아무 쓸모 없는 예의차림이어서였을까. 1면 톱기사 제목에 실릴 사망자 숫자가 틀려선 안 되기 때문이었을까. 확실한 건, 서른여덟 명이나 죽었단 사실에, 그 밤 사무실에 앉아 있던 우리는 어떤 감정도 느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한낮, 불탄 창고에 죽은 사람이 몇 명인지 속보를 날랐던 그는 "너무 공감하면 안 돼"라는 말을 했다. 서른여덟 번의 죽음에 한결같이 슬퍼한다면 속보를 쓸 수 없을 테니. 그렇지만 가끔 생각한다. 서른여섯번 째 사람과 서른여덟번째 사람의 죽음, 그 사이에 숫자가 무슨 상관일까. 오탈자가 무슨 잘못일까. 오히려 서른여덟이란 결말로 가는 한 단계로써 그 근처의 숫자들엔 개연성이 생겨난다. 서른여덟이란 결말에 다다르기 직전까지 한 번이라도 그 비극에 망설여본 사람이라면 '사망자가 모두 서른여덟인 것 같습니다'라고 말끝을 흐릴 것이다. 서른여섯이든 여덟이든 모두 비극이지만 그래도 조금 덜 슬픈 결말에 발이 묶일 것이다. - [1보] [9보] [12보] 중

- 아름다움의 곁을 지나면 모든 것과 멀어졌다. 정강이 높이만큼 솟은 등불들이 지키는 길은 그래서 어떤 계절에도 슬프지 않은 때가 없었다. - 여우의 귓바퀴 중

- 생활의 70퍼센트는 대기하고 참는 일이야.
정박으로 떨어지는 노래를 느리게 허밍하다가
왼발에 맞춰 구령을 넣는 거야. - 인터로킹 중

- 나는 당신의 어린 모습이 닳는 게 아까워서
아무것도 짐작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 모과 중

- 수평선에서 파도가 생기는 순간을 지켜보기.
사람도 이렇게 사랑한 적이 없었다.
(...)
우리는 끊임없이 각자의 마음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 해발 중

- 우연은 경이로움으로 오역되곤 한다. - 대체 가능한 사람 중

- 눈을 감고 걸어 다닌 길은
눈을 감아야지만 찾아갈 수 있다. - 윤곽 중

- 어느 날 당신이 나를 다급하게 불렀다.
안방으로 들어가니 당신은 내 손목을 잡아 바닥에 눕혀
이불을 목까지 덮어주고 꾹꾹 빈틈없이 눌렀다.
"달라진 거 없어요?"
"잘 모르겠어요."
"새 이불이에요, 햇볕에 종일 말렸어요."
그러고 보니 정말 이불을 들썩일 때마다 얼굴 위로 햇볕을 머금은 냄새가 났다. 맨다리에 닿는 감촉도 습기 없이 빳빳했다.
그해 당신은 나에게 새봄의 첫 이불을, 그 고실고실한 햇볕을 선사한 것이다. - 뒷 표지 문구

2026. jul.

#우리는모두이불에서태어난걸요 #봉주연 #문학과지성시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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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뒤락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9
애니타 브루크너 지음, 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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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속 소설..

이런 소재가 '문제적'이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니 그렇게 이해하는 걸로
이 이야기를 이해했다.

결혼에 대한 집착이 여성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이던 시절.
호텔 뒤락에 유배당하듯, 도망치듯 도착한 후
직면해야 하는 자신의 상황은 외면하고
투숙객들을 관찰하는 일에 집중하는 주인공 이디스를 보면 흠...
회피형 주인공 그 자체 아닌지.

사랑으로 불거진 개인의 불행을 피해 자의와 타의로 유배 온 장소에서도 끊임없이 사랑의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은,
당시의 시대에서 여성의 운신의 범위가 무엇보다도 사랑의 영향을 크게 받기 때문이지만,
그 모든 사유의 과정이 여성의 독립, 불합리한 세상 속에서 어렵게 자신을 합리화해야 하는 내면이 잘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마지막에 결국 신의 없는 남성에 환멸을 느끼고 집으로 되돌아오는 엔딩이 되는 점은 좀 시답잖게 마무리 짓는 느낌이 들긴 한다.

진보적 관점으로 풀어내기보다는 그저 당시의 사회상이 거울처럼 반영된 이야기.

그리고 재미는 좀... 없는 편.

- 그 속에서 그녀는 자신이 운 나쁘게 저지른 잘못은 잊고 신중하고 착실한 원래의 성품을 되찾을 것이었다. 그 잘못이 한 해가 저물어가는 이 시기에 집에 있어야 할 자신을 사람도 별로 없는 이곳으로, 잠시 동안의 유배생활로 내몰았다. - 10

- 호숫가를 따라 산책하며 이디스는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불합리와 불가피성이 늘 같이하기 마련인 꿈속에서 말없이 걷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속에서 그러듯 목적지가 뚜렷해질 때까지 이 글을 계속 걸어가야 할 것 같은 절망감과 어떤 파국으로 치달을 호기심이 동시에 느껴졌다. - 25

- 토끼들은 책 읽을 시간이 없어요. 그들은 경주에서 이기느라 너무 바빠요. 선전은 모두 다른 방향으로 하고 있지만 거북이야말로 위로가 필요한 존재들이에요.- 33

- 이디스는 깨달았다. 책을 쓰는 일을 입으로 하고 있어도 그것은 거북의 삶이었다. 바로 그것이 자신과 같은 거북들을 위해 소설을 쓰는 이유였다. - 35

- 환자처럼 무거운 몸으로 목욕을 하면서 이디스는 자신에게서 분별력을 뽑아내려고 애썼다. 우울증이 덮치기 전에 기선을 제압해야 했다. 글쓰기를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모든 걸 침착하게 받아들이자, 그녀는 스스로를 타일렀다. 생각하지 말자. 문을 모두 닫자. - 75

-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몸이 떨려왔다. 자신이 저지른 부정한 행위에 생각이 미치자, 자신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으면서 친구가 되어준 훌륭한 여자들을 하찮게 생각하는 자신이 수치스러웠다. 나는 늘 여자에게는 너무 가혹했어, 그녀는 생각했다. 내가 남자보다는 여자를 더 잘 이해하기 때문일지도 몰라. 여자들의 경계심과 참을성과 스스로를 성공한 사람으로 광고해야만 하는 그 필요성까지도 알고 있기 때문에. 실패를 인정해서는 안 되는 여자들의 필요 말이야. 그 모든 걸 너무도 잘 알지. 나도 그들 중 한 사람이니까. - 103

- "당신은 자신이 믿고 싶은 것에 잘못 끌려가고 있으니까요 사랑한다고 수없이 고백하는 사람들 사이에도 완전한 조화란 없다는 걸 아직도 모르나요? 단순히 감정의 단계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 탓에 많은 시간과 추측을 낭비하며, 끊임없이 고뇌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단 말인가요? 가볍게 알고 지내는 것이 깊은 열정보다 언제나. 실제로 더 유효하다는 사실을 모른단 말입니까?"
"네, 알고 있어요." 이디스가 우울하게 말했다.
"그러니 그걸 활용하는 법을 배우는 겁니다. 일단 이 세상을 자기 것이라고 마음을 정하고 바라보면, 세상이 얼마나 희망적인 곳으로 바뀌는지 모를 거예요. 일단 자기중심적이 되고 나면 모든 게 다 건강해질 겁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아니면 차라리 하고 싶지 않은 게 무엇인지 결정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지요." - 111

- "사랑 없이 살 수 없다는 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디스."
"아니요, 난 틀리지 않았어요."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나는 사랑 없이는 살 수가 없어요. 내 말은 사랑 때문에 망가지고 괴상한 징후가 생기고 우스꽝스러워진다는 뜻은 아니에요. 내가 말하는 건 그것보다 훨씬 진지해요. 내 말은 난 사랑 없이는 잘 살아낼 수가 없다는 뜻이에요. 다른 어떤 힘이 있어도 사랑 없이는 생각할 수도, 움직일 수도, 말을 할 수도, 글을 쓸 수도 없고 심지어 꿈도 꿀 수도 없어요. 살아있는 세상에서 배제되었다는 느낌이 들어요. 차가운 피가 흐르는 물고기 같은, 움직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버려요. 안에서부터 파멸해버리는 거죠. 내가 생각하는 완전한 행복이란 저녁이면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있는 집으로 돌아올 걸 알기에 편안한 마음으로 온종일 햇볕 따가운 정원에 앉아 책도 읽고 글도 쓰는 거예요. 매일 저녁 그 사람이 올 거라고요."
"정말 로맨틱한 사람이군요, 이디스." - 114

- 이디스가 지친 듯 말했다.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에요. 나는 네빌 씨나 그의 돈을 좇지 않아요. 돈은 내 손으로 직접 벌어요. 돈은 어른이 되면 누구나 버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후보자를 탐색하는 여자들의 시각이 나는 싫어요"
"그게 왜 나쁜지 모르겠네요." 모니카가 열의 없이 대꾸하더니 조금 쉬었다 덧붙여 말했다. "남자들도 그러는데요." - 171

- "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그게 신경 쓰이진 않나요?"
"아니요. 도리어 안심이죠. 난 당신의 감정이 짐이 되는 건 원치 않아요. 낭만적인 기대 없이도 이 모든 일은 가능해요."
이디스는 그를 향해 돌아섰다. 머리카락이 마구 휘날렸고 눈빛은 어두웠고 입매는 씁쓸해 보였다.
"그리고 당신도 나를 사랑하지 않고요?"
네빌 씨가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는 모호함이 전혀 없는 슬픈 미소였다. - 196


2026. jul.

#호텔뒤락 #애니타브루크너 #문학동네세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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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에 울다
마루야마 겐지 지음, 한성례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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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사둔 책이고, 손이 가지 않아 너무 묵힌 책인데.

갑자기 눈에 띄어 후루룩 읽었다.

큰 감흥이라기보단 
흠... 일본 문학... 이라는 감상이다.

꽤 익숙한 감성이랄까.
고풍스럽고, 모호한 환상성이 가미되어 있는 약간 미친 이야기들.

- 이 마을에는 불지 않는 바람이다.
그것은 강의 수원지 부근에서 사과꽃 향기를 실어 온다. 언젠가 어른이 되었을 때, 나는 야에코와 함께 그 사과밭에 갈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곳에서 살 것이다. 그런 느낌이 든다. 백구도 데려갈 것이다. 그때까지 살아 있다면 말이다. 다른 사람은 절대 안 된다. 그곳에서는 나와 야에코 그리고 백구만 살 것이다. - 달에 울다, 26

- 조금씩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텔레비전 따위는 보지 않고도, 사과와 더불어 20년을 살아 온 것만으로 인간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어, 아버지 같은 남자들이 대륙에서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짐작이 간다. 명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변명은 거짓말이다. 사람들은 온갖 짓을 다 저지르고도 나중에 입을 싹 닦고 잘 살아간다. 인간이란 그런 동물이다. 말하자면, 야에코 아버지 일로 괴로워하는 마을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그런 것이다. - 달에 울다, 38

- 솔직히 말해 나는 그녀가 부러웠다. 그런 식으로 마을을 떠날 수 있는 그녀가 전혀 비참하다고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태어난 지 30년 만에 그녀는 겨우 해방된 것이다. 그 시기가 너무 이른 것인지 너무 늦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할 수 없다. - 달에 울다, 74

- 내친 김에 나는 이런 질문을 했다.
"개도 정신병에 걸리나요?"
"그럼." 수의사는 나를 외면하며 말했다. "살아 있는 것은 모두 미치게 마련이지.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모두들 조금씩은 이상하니까." 그는 구부러진 주삿바늘을 펴면서 덧붙였다. "이상하지 않으면 이런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지." - 조롱을 높이 매달고, 111

- 어쩌면 나는 세상에 장단 맞추는 것을 그만둘 기회를 오랫동안 노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드디어 그 일에 성공한 것일지도 모른다. - 조롱을 높이 매달고, 117

2026. jul.

#달에울다 #마루야마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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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마시는 새 세트 - 전4권 (양장)
이영도 지음 / 황금가지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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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무엇으로 존재해야 하는가" 질문을 던지는 유쾌하고 장대한 판타지 서사.

오랫만에 도파민 최대치의 독서.
재밌고 흥미진진해서 감정의 고양이 일어난다.

이런 옛날 옛날에 스타일의 이야기에 두근대다니 ㅋㅋㅋ

케이건 드라카, 티나한, 비형, 사모 페이, 륜 페이....
정말 잘 만든 캐릭터 아닌지 감탄에 감탄을 했다.

비형.... 너무 취향의 도깨비. 소리 내서 5번쯤 웃었음.

유료 도로당의 뭔가 멋짐에 대해서도. :)

전반부가 지나고 4년이 흐른 시점의 이야기에선 또 다른 무드의 비감이 느껴지는 게 좋았다.

지난하고, 잔혹하다 할 수 있는 광경들을 지나 부서진 이들이 다시 일어서려 하는 노력.
그리고 그들은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게 아니고
결국 또 반목하고 대결하고 견제하는 변하지 않는 세상을 살아가게 된다는 점도.

그냥 그저 판타지 소설이 아닌 현실의 반영 같아서 더 와닿는 서사시.

그리고 얼른 50년 후의 피를 마시는 새를 읽어야겠다고 생각하며 ....

오래전부터 이영도 작가의 작품을 한 번쯤은 읽어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이종범의 스토리캠프에서 설명회를 한 영상을 보고
정말이지 대단한 이야기꾼.....
바로 영업당해 결제 클릭클릭하고 순식간에 읽어 내려갔다.

덕분에 7월에 독서량도 평균치를 웃돌았고, 읽는 뇌 세팅에도 무진한 도움이 되었다.

피마새도 바로 읽으려고 했지만.... 조금 아끼는 마음으로 살짝 미뤄본다. 책은 이미 책장에 있음... 든든함... ㅋㅋㅋ

<1권>

- 하늘을 불사르던 용의 노여움도 잊혀지고
왕자들의 석비도 사토 속에 묻혀버린
그리고 그런것들에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생존이 천박한 농담이 된 시대에
한 남자가 사막을 걷고 있었다. - 1권 서문

- 셋이 하나를 상대한다. - 해묵은 금언

- "그런 걱정은 하지 말게. 케이건의 분노는 모조리 나가들에게 돌려져있어. 그리고 그에게 다른 분노를 살 수도 없어."
"분노를 살 수 없다고요?"
"그래. 서신에서 본 것처럼 그에겐 더 뺏을 수 있는 것도 없어. 나가들이 모조리 다 빼앗아갔으니까. 역설적으로 들릴 테지만 나가를 제외한 자들에게 있어서 케이건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분노하게 할 수 없으니까."
"슬픈 말씀이군요." - 51

- <인간들도 꿈을 믿어.>
<그런가? 그럴 수도 있겠지. 어리석기로는 거기서 거길 테니.>
<그리고 나도 믿고 싶은데.>
화리트는 정신을 닫은 채 친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60

- 그제야 케이건은 한계선 이북과 이남이 얼마나 오랫동안 단절되어 있었는지를 절감했다. 수백 년 전 나가들의 폭풍 같은 북진이 기온이라는 절대적 한계에 부딪혀 중단되고 마침내 대확장 전쟁이 끝났을 때 세계는 두 동강이 나버린 셈이다. 나가들의 땅 키보렌과 그 북쪽의 땅. 뒤 쪽의 세계는 산이나 황야, 사막, 초원, 숲, 빙하 등이 있는 정상적인 세계다. 그러나 앞쪽의 세계에는 밀림뿐이다. 키보렌이라는 단 하나의, 세계의 반을 뒤덮은 숲.
케이건은 거기서 희극의 요소를 발견했다. 오직 단 한 사람, 한계선에 가장 근접한 도시 카라보라의 최남단에 나가를 도축, 가공, 요리할 수 있는 시설과 장비를 완비해 두고 매일같이 나가를 잡아먹으며 사는 인간 한 명을 제외한다면, 이제 모든 이들에게 나가들과 그들의 땅 키보렌은 전설 속의 존재나 마찬가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만약 나가들이 그들 이외에 그들을 증거해 줄 자를 찾아내야 한다면 그들은 그들을 가장 증오하는 자를 찾아와야 할 것이다. 대사원의 영리한 승려들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증오란 원래 그렇다. - 99

- <나가 살육자?>
나가들 사이에서는 오래전부터 한계선 근처에 출몰하며 나가를 잡아먹는 괴물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그 괴물은 바라기라 불리는 쌍신검을 휘두르며 추위와 함께 나타난다. 그리고 추위 때문에 꽁꽁 얼어붙은 나가를 얼음 깨어먹듯이 씹어 먹는다고 한다. 지금껏 사모는 그 나가 살육자가 한계선의 추위를 상징하는 상상의 괴물일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눈앞에서는 그 이야기 속에서 묘사하는 것과 똑같은 인간이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은 채 달려오고 있었고 그것은 현실이 아니라고 니르기엔 지나치게 현실적이었다. - 232

- 사모는 대답하지 않은 채 앞쪽의 어둠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카루는 결국 조바심을 참지 못하고 닐렀다.
<페이. 돌이 식기 전에......>
<이자들이 왜 신을 잃었을까?>
사모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카루는 약간 당황했다.
<에? 자신들의 오만 때문이지 않습니까?>
<그건 나도 알아. 구체적으로 어떤 오만이라는 거지?>
<글쎄요. 신이 필요 없다고 생각한 것 아닐까요? 혹은 자신들이 신보다 낫다고 생각했다거나.>
사모는 통로의 벽과 천장, 바닥을 죽 둘러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자들이 이런 것을 만들 수 있을까?> - 305

- "네 마리의 형제 새가 있소. 네 형제의 식성은 모두 달랐소. 물을 마시는 새와 피를 마시는 새, 독약을 마시는 새, 그리고 눈물을 마시는 새가 있었소. 그 중 가장 오래 사는 것은 피를 마시는 새요. 가장 빨리 죽는 새는 뭐겠소?"
"독약을 마시는 새!"
고함을 지른 티나한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자 의기양양한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케이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눈물을 마시는 새요."
티나한은 벼슬을 곤두세웠고 륜은 살짝 웃었다. 피라는 말에 진저리를 치던 비형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사람의 눈물을 마시면 죽는 겁니까?"
"그렇소. 피를 마시는 새가 가장 오래 사는 건, 몸 밖으로 절대로 흘리고 싶어 하지 않는 귀중한 것을 마시기 때문이지. 반대로 눈물은 몸 밖으로 흘려보내는 거요. 얼마나 몸에 해로우면 몸 밖으로 흘려보내겠쇼? 그런 해로운 것을 마시면 오래 못 사는 것이 당연하오. 하지만."
"하지만?"
"눈물을 마시는 새가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고 하더군."
륜과 티나한은 알 듯 모를 듯하다는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비형은 환한 표정이 되었다. - 369

<2권>

- 하지만 그 시점에서 사모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겼던 것은 유료도로당의 사람을 보는 관점이었다.
이곳에서는 사람을 사람으로서 존재하게 하는 모든 요소가 무시되고 있었다. 여행자의 품성과 지성과 감성 따위는 유료 도로당에게 조금도 고려 대상이 되지 못했다. 오로지 여행자가 통행료를 지불하느냐 지불하지 않느냐의 이분법만이 존재했다. 사람에 대한 가장 큰 모욕일 수 있는 그 장면에서, 그러나 사모는 동시에 정반대의 의미도 발견했다. 여행자의 외모와 종족과 고향 같은, 어떤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본질적으로 사람다움과는 별 관련이 없는 것들 또한 유료 도로당의 고려 대상이 되지 않았다.
보좌관은 말했다. '저 두억시니들은 통행료 안 냈다.'
사모는 그 말을 뒤집어 보았다. '통행료를 내면 저들은 여행자다.' - 116

- "여행자란 자신의 목적을 위해 길을 걷는 자들입니다."
"그럼 우리 유료 도로당은 무엇인지 말해 주겠소?"
"우리는 길을 준비하는 사람들입니다. "
"누구를 위해?"
"자신의 길을 걷겠다는 의지를 가진 사람들을 위해." - 120

- 철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시구리아트 유료 도로당의 당주 보좌관은 당 일지를 작성하고 있었다.
'사모 페이는 두억시니들의 통행료를 지불한 다음 그들을 유인하며 관문을 통과하였다. 신을 잃은 그들 두억시니들에게 신의 가호를 바랄 수는 없으니, 나는 사모 페이가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의 어진 마음이 저 가엾은 자들을 긍휼히 여기길 바란다.' - 141

<3권>

- 기약 없는 구원이 현존하는 고통의 대가가 될 수 있습니까? 고통을 받는 것은 사람들입니다. 신들이 아닙니다. - 129

- "제 생각에는 그럴 것 같지 않군요. 또 한 명의 케이건 드라카가 겨우 4년 만에 만들어질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군요."
"케이건 드라카를 잘 알아?"
"그분을 잘 아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 140

- 사모는 더 이상 니를 수 없었다. 참으로 거대한 니름이 그녀를 향해 노도처럼 쏟아져왔다.
<살아가, 제발. 살아가!>
거기에 애정이 있었다. 사모는 받아본 적 없는 거대한 애정에 놀랐다. 니름이 담아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애정과 관심이, 그리고 수단이 아닌 목적인 호의가 있었다. 웃음, 즐거움, 사라지는 것에 대한 완전한 기쁨. 사모는 이해할 수 없었다. 멍청한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다가와 그녀를 온통 적셔버리는 환희는 사모마저도 즐거움에 넘치게끔 만들었다. 유해의 폭포는 영원히 사라지지만 그것은 절대로 슬픈 일이 아니었다. 정신적 홍소, 폭소라도 터뜨리고 싶은 기분 좋은 소멸. 유해의 폭포는 마지막으로 농담처럼 닐렀다.
<제발, 자기 완성을 위해 살아간다는 자를 조심해...... 하하하!>
사모는 커다란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지복에 찬 소멸이었다. - 455

<4권>

- 사모는 침묵한 채 나뭇가지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곧 륜을 다시 만날 거야.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말씀하십시오."
"언젠가 륜에게 해줬던 일을 다시 해줄 수 있을까."
"공작님을 한계선 북부로 데려가라는 말씀입니까?"
"그래.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요스비에게 해줬던 일을 해줘."
케이건은 말없이 사모를 바라보았다. 사모는 고개를 약간 들어 올려 케이건의 이마 위를 바라보며 말했다. 
"친구가 되어주라고."
"왜 제게 부탁하시는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너보다 더 적격인 자가 없으니까." - 133

- "네가 원했던 것이 무엇이냐?"
"사랑하기 위해 사는 삶."
사모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
"왜 이해할 수 없을까? 입장을 바꿀 수는 없을까? 길지 않은 생, 가슴에서 피비린내를 풍기며 살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우리의 서로 다른 겉모습은 광적인 증오의 원인이 아니라 다시 없이 커다란 축복이 아닐까? 사람은 새로움 속에 살아간다. 모든 것은 항상 바뀌어 사람들에게 다가온다. 그렇다면, 우리는 비늘이 덮인 저 남부의 이방인들을 우리의 의식과 지혜를 발전시킬 새로운 자극으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그들은 우리의 적이 아니라 가장 고마운 선물이 아닐까? 대상이 없는 사랑은 없다. 그리고 새로운 대상은 새로운 사랑을 약속한다. 남쪽에서 온, 비늘 덮인 그들은 나의 또 다른 형제며 혈육이다. 그리고 축복이다. 나는 그들을 사랑하고 싶다. 그들은 얼마나 고마운 자들인가. 우리는 사랑할 수 있는 상대를 하나 더 얻었다."
케이건은 스스로에게 보내는 조소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나는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싶다."
사모는 이런 거대한 사랑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르다는 것이 증오의 원인이 아니라 거대한 축복의 원인이 될 수 있는, 혹은 그러했던 사람이 그녀의 눈앞에 있었다. - 294

- "내일이 오늘보다 나을 거라는 어떤 가능성도 없다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뭐가 남을까?"
아이의 말은 케이건이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 케이건은 불만스러운 듯이 말했다.
"내일을 계속 오늘로 만들면 돼." - 334


2026. jul.

#눈물을마시는새 #이영도 #황금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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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낙천적인 아이 ㅣ 오늘의 젊은 작가 50
원소윤 지음 / 민음사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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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싸늘하게 관조하는 듯하지만
작가 원소윤은 낙천적인 면도 있고 냉소적인 면도 있는
사랑이 많은 아이인 것 같다.

유년기의 서술들을 따라가다 보면
나의 유년기도 한번 되돌아보게 되는데
유독 과거의 기억 방면에 문제가 있다 보니 
나라면 절대라고 까지는 아니지만 못할 작업이지 싶다.

생전 본적도 없는 이들에게 가족을 맡기는 심정을 서술한 부분에서 한참 멈춰 있기도 했다.
더불어, 세상이 좋아져서 상황이 괜찮아서 나는 누구의 짐도 되지 않고 안녕을 고할 수 있기를.
하는 생각도.

민음 북샵에서 구매해서 작가의 추천 레터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게 또 원소윤 작가의 귀여운 면모를 보여준다.

- 땀을 흘리고 닦는 작가가 될 거야! 죄를 짓고 용서를 구하고 벌을 받는 작가가 될 거야! - 추천 레터 중

- 은행에 도착한 치릴로는 로무알다 손에 통장을 거칠게 쥐여 줬다. 여기 있는 돈을 정리해서 당장 다 가져가라고.
"내 돈 안 뜯어 간 사람 너밖에 없다. 나 죽으면 다 나눠 가질 테니, 그 전에 네 몫 챙겨라."
여기까지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나는 그것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치릴로가 깡패처럼 로무알다를 끌고 갔다는 발단 대목에서는 이건 또 무슨 일인가, 마음을 졸였기 때문이다. 치릴로가 은행을 털러 가는 길에 "아, 맞다! 인질이 필요하지!" 하고 만만해 보이는 로무알다를 고른 것도 아니고 보이스피싱에 연루된 것도 아니니 얼마나 다행인가. 이다음에는 순조로운 전개를 맞겠구먼, 한시름 놓았다. - 21

- 무심한 조명 덕분에 우리에게 일어난 일의 의미를 찾지 못했다. 만일 극복한다면 뭘 극복해야 하는 걸까. 심지어 극복이 무얼 위한 것인지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 32

- 나는 귀한가. 매 순간 느끼고 있는바에 근거해 말하자면 나는 귀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뿐 아니라 모두가 안 귀해 보였다. 솔직히 그것 자체는 결정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들이 겪어 내는 고통의 크기가 측량할 수 없이 크다는 것이었다. - 35

- 사람이 저렇게나 많은데 나는 한 사람과 만났고 오래 이야기했고 그럴 수 있어 기뻤다. 동시에 두려웠다. 살아가는 데에 특별히 필요한 게 없는 사람이 되려 했는데 꼭 필요한 뭔가가 생길 것 같았다. 꼭 필요한 뭔가가 생긴 삶은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지? - 171

- 그러고 보니 기가 찼다. 아까 병원 유니폼 입은 사람들, 그들이 누구인 줄 알고 엄마를 맡긴 걸까. 엄마를 마취하고 피부를 째고 뼈를 맞추도록 맡긴 걸까. 신용을 알 수 없는 이들에게 거금을 넘긴 기분이었다. 시간도 남아나겠다, 기도나 해볼까 싶었지만 신앙심을 잃은 지 오래여서 기도의 샘이 바짝 말라 있었다. 그 누구를 향한, 그 무엇을 향한 어떠한 믿음도ㅗ샘솟질 않았고 가장 믿을 수 없는 건 단연 엄마였다. - 199

- "장기를 줄 수 있는 상황이어야 장기를 줄 수 있는 거야. 나중에 아빠 장기가 기증되잖아? 그럼 참 잘된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돼."
놀랍게도 그 얼렁뚱땅한 말이 내게 위안을 주었다. - 207

- 불광천에는 '바르게 살자'라는 구호가 새겨진 비석이 있다. 불광천에 들를 때마다 나는 비석 앞에 서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 비석은 '바르게살기운동중앙협의회'에서 세운 것으로 이 협의회가 '삼청교육대'의 후신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늘 사진을 찍었다. 바르게 살자. 세상에 이보다 와닿는 말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226


2026. jul.

#꽤낙천적인아이 #원소윤 #민음사 #오늘의젊은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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