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피플 존
정이현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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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늘한 현실의 모습들을 그보다 더 서늘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단편들.

일단 다른 루트를 통해 이미 읽은 단편이 여럿이지만, 다시 읽어도 좋았다.

실패담 크루에 등장하는 실패담 모임 구성원들은 사실 스스로의 실패를 되돌아보며 각성할 필요가 없는 종류의 사람들이다.
그래서인지 일종의 여흥으로 이 모임을 이어가고 있고 그 불편한 틈새를 예민하게 느끼는 화자의 감정이 공감되었다.
실패가 기회가 되는 사람들과 실패가 그 자체로 실패로 끝나고 마는 사람들의 간극.
동화 같은 이야기라면 이들의 화합으로 마무리될 테지만, 
정이현은 끝끝내 그 모임에서 떨어져 나오는 것은 화자라고 말한다.
현실이 그러하니까.

그리고 곳곳에서 등장하는 특징적인 인물들이 있다.
타인의 감정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들.
현대 사회는 좀 무심하게 살아야 몸도 마음도 편하겠지만,
타고나길 주변의 미묘한 다름을 크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다지 외향적인 사람이 아님에도 모임에서 소외되는 사람들을 보면 절로 먼저 말을 걸게 되고,
표정이 조금 차분한 사람만 보여도 혹시 무언가 기분이 상한 게 아닌지 살피게 되고....
누가 그럴 필요는 없다, 그냥 편하게 있어라 충고한다 해도 그런 성향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나도 좀 그런 사람이 아닌가 늘 생각해 왔는데,
그래서 이런 인물들의 서사에 조금 더 깊게 들여다보게 된다.

요즘의 경향을 보면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딜레이 없이 말하는 것을 성격상의 단점으로 여기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다.
내 기분이 나빠, 그건 싫어라는 말보다는 타인에 대한 미안함, 걱정 같은 경우가 더 그러하다.
전자의 경우는 내 권리를 위해 말해야 하지만,
후자의 경우는 내 유불리를 따져야 하기 때문이라고 여기는 듯하다.
왜 저럴까는 분명 알겠는데, 그러지 않는 편이 더 좋은 퍼스널리티라는 것을 어떻게 알려줘야 하나 고민한다.
가정교육의 문제일까. 사회화의 미완이 문제일까.

불쾌하게 구는 인간들이 너무 많이 등장하다 보니 그런 생각들을 하게 되기도 하고....
이런저런 생각들로 마음이 복잡해지는 이야기들.


- 페이스트리는 뜻밖에 정치적인 빵이다. 겹겹이 쌓인 층과 층 사이, 선처럼 얇은 틈이 숨어 있다. 한입 베어 물면 버터 향이 입안에 퍼지고, 부스러기는 겹의 바깥으로 바스스 쏟아져 내린다. 당신은 이미 어디에든 속해 있다. - 9, 실패담 크루

- 극복하고 넘어서고 미래를 기약하는 건 너무 힘들잖아요. 굳이 안 그러고 싶은 실패도 있으니까. 그냥 실패,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삶의 일부로 남은 실패. 그걸 이제 남 앞에서 편히 말해보자는 취지예요. 일종의 담백한 공유랄까. 재미도 있고요. - 26, 실패담 크루

- "하긴, 예뻤으면 내가 기억 못 할 리 없지."
큰오빠는 당연하다는 듯이 웃었고, 나도 따라 웃었다. 웃다가 뒤통수가 서늘해졌다.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 와야 해. 그렇게 말하던 언니의 목소리가 떠올라서였다. 언니의 목소리는 기운차고 선량했다. 그런데 나는 왜 웃었을까. 왜 따라 웃고 말았을까. 언니는 더없이 친절했는데. 우리 남매에게 티끌만큼의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스스로가 곤혹스럽게 느껴졌다. 이날의 일이 마치 흰 타일 위에 연하게 밴 카레 얼룩처럼 지워지지 않은 채 마음에 오래 남아 있다. - 55, 언니

- "나는 있잖아, 이 일이 참 재밌다. 그래서 어떻게든 꼭 잘 해내고 싶어."
낙관도 비관도 없이 스스로의 의지로 걷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 65, 언니

- 만약 아무것도 없던 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인간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일 같은 건 하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그건 자신이 낳은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과는 다르다. - 123, 빛의 한가운데

- 아들들 엄마가 언니 같기만 하다면 얼마나 좋아요.
그건 무슨 뜻이었을까. 집에 돌아와서도 한동안 안희는 골똘히 그 말을 곱씹었다. 혹시 미령은 딸의 엄마이고 자신은 아들의 엄마라고 선을 긋는 것일까. 자신이 무심히 꺼낸 화제가 미령의 기분을 상하게 했을 수도 있었다. 만일 그렇다면 기분을 상하게 한 정확한 원인이 무엇인지 안희 자신은 영원히 알지 못할지도 몰랐다. 어떤 얘기를 꺼낼 때 상대에 따라 더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음은 익히 알고 있었다. - 128, 빛의 한가운데

- 차려주는 거 꼭 먹고 가. 공부는 체력이다.
혁이 고개를 까딱했다. 남편의 말에서 '차려주는'의 주체는 안희였다. 자기 손으로 차리는 게 아닌데 그는 왜 주어를 생략하는 어법을 사용하는가. 그러나 안희는 그 생각을 밖으로 표출하지도 언성을 높이지도 않았다. 그런 데 낭비할 에너지와 시간이 없었다. - 134, 빛의 한가운데

-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라고 쏘아붙였다. 남편이 간혹 농담이랍시고 던지는 그런 식의 말들이 무척 부적절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었다. - 140, 빛의 한가운데

- "그냥 아이 곁에 있어주는 게 한나 샘의 일입니다."
사실 처음부터 자신의 엄마가 한나의 사진을 보고서 점찍었다고 하유가 말해주었다.
"순해 보인댔어요."
순해 보인다는 표현은 갓난아기나 동물에게 쓰는 말이 아닌가. 한나는 의아했지만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 177, 단 하나의 아이

- 한나는 오른쪽 엄지로 지그시 눌러 앱을 삭제했다. 진한 초록색의 대문자 'K'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존재하지 않아도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 단 하나의 아이에 대해 한나는 끝내 생각을 멈추지 못했다. - 187, 단 하나의 아이

- 세상엔 보기보다 미친놈이 많아. 또 한 번 말을 끊었다. 미친놈들이 길거리의 돌멩이를 괜히 막 발로 차는 줄 알아? 아니야. 찰 만하니까 그러는 거야. 만만하니까. 만만해 보이니까. 자기 발 다칠 거 같으면 절대로 안 건드리지. 생각해 봐, 누가 널 그렇게 보는 거 너도 싫잖아?
그런데도 왜 자신의 존재를 밝히지 않았느냐는 것이 그의 확고부동한 의문이었다. 산책로 저 멀리로 천천히 걸어가는 한 사람의 뒷모습이 아스라했다. 타인의 세계는 더없이 평화로워 보였다. - 236, 가속 궤도

- 지금 재연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 텅 빈 불안을 단 한 사람에게라도 설명하고 이해받고 싶었다. - 289, 이모에 관하여

- 그때 나는 멀리 가면 빨리 갈 수 있다고, 빨리 가면 멀리 갈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빠르게 멀리 가는 것만이 삶의 유일한 이유라고.
아주 멀리 온 것 같은데 제자리 뛰기를 하고 있었던 기분이다. - 304, 사는 사람

- 하나의 긴 실을 상상하곤 합니다. 어떤 구간은 직선으로 어떤 구간은 구겨진 채로 또 어떤 구간은 잔뜩 엉킨 채로 존재하지요. 저는 엉킨 부분 앞에서 영원히 끙끙대거나 깔끔하게 끊어버리고 싶다는 충동에 굴복하는 대신, 그 매듭 아닌 매듭을 그냥 놔두고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택했습니다. 생을 이어간다는 말의 무서움을 실감하는 중입니다. - 작가의 말 중


2026. jun.

#노피플존 #정이현 #단편집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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