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시, 이대로 계속 머물러주세요 ㅣ 창비시선 416
리산 지음 / 창비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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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의 시작에 이렇게 멋진 시들을 찾아 낼 수 있었던 내 손에 감사. ㅋㅋㅋ 잘 뽑았다.

또 한명의 최애 시인을 리스트 업 할 수 있어 기쁘다.

추천합니다. 읽어봅시다. :)

여기 앉아서 저기에 속한 듯 검은 옷을 입고
검게 그을린 마음으로 저기에 속한 듯
그러므로 알 수 없는 통증에 시달리며
언젠가 통증으로 죽으리 흐드러지는 봄 - 도문대작 중.

무용한 것들은 방해받고 쇠약해지며 절멸한다
횡단 항로를 건너 날아들었다 돌연 사라진 새떼처럼
울음소리 가득한 어둠속으로 사라져
다시는 나타나지 못한다 - 진눈깨비 중.

그리하여 우리는 단지 유령일 뿐
깊게 출렁이며 흘러가는 강물의 그림자도
만나지 못한다 대낮의 백양나무와
삼나무 그림자 속에도 들지 못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단지 유령일 뿐
두통과 불면의 밤을 지나온 유령일 뿐
서로의 그림자 속에 들지 못하므로
우리는 대낮과 밤 속에는 태양도 별빛도
서로의 그림자를 만들지 못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단지 유령일 뿐
유리잔 속에 떠도는 몇모금의 상념일 뿐
연기로 부유하는 흐린 영혼의 구름일 뿐
우리는 서로에게 그림자를 만들지 못하므로
꿈꾸어도 죽어가는
꿈구지 않아도 사라지는

그리하여 우리는 단지유령일 뿐
몇번의 혼숙과 합숙의 날들 속에서도
새벽닭이 우는 희부연 들판을 바라보며
가야 할 곳의 몰락과 몰락의 지평선을 아득히 바라보는
우리는 단지 유령일 뿐이어서
빛과 어둠의 상처를 보듬지 못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단지 유령일 뿐
눈물의 가장 깊은 그림자를 만지지 못한다
아무런 상처의 그림자도 만들지 못한다 - 프리미어리그의 세탁부들 전문.

2018. j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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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테 안경 ㅣ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조르조 바사니 지음, 김희정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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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다고 하도 극찬을 한 것을 들어서 기대를 너무 많이 했나보다.

파디가티가 편안하고 즐겁고 품위있는 마을 의사 역할만을 성실히 수행했다면 쓸쓸하게 끝나지는 않았겠지.

수상한 시절에 남들과 다른 이들이 겪어야 했던 어떤 것.

마침내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햇살이 밝은 낮에는 그에게 최대한 경의를 표하고 밤에는 산로마노 거리의 인파에 떠밀려 그의 곁에 바싹 붙어 서게 되더라도 알아보지 못한 듯 행동하는 것. 영화 <지킬 박사와 하이드> 속 프레드릭 마치처럼 의사 파디가티는 두 삶을 살았다. 하지만 누군들 안 그렇겠는가? - 20

하지만 남들과 다르지 않은 사람이 과연 있기는 할까.

나는 잠자코 있었다. 델릴리에르스와 파디가티를 생각했다. 한 명은 가해자, 다른 한 명은 피해자. 보통 피해자는 가해자를 용서하고 받아들인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파디가티는 나를 잘못 봤다. 증오가 아닌 그 어떤 다른 것으로는, 나는 결코 증오에 대응할 수 없을 것이다. - 125

증오가 아닌 다른 것으로는 내가 처한 부당함을 대변할 수 없다고, 너희들이 나를 밀어넣은 유배지에서 나는 기쁜마음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선언.

세상이 다시 나를 받아준다고 얼핏 관용적인 제스처를 취한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그들의 진심이 아니라는 것. 그 사실을 아무일도 아니었다는 듯 잊을 수 없다는 것.

언제나 세계는 불평등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나, 그 불평등함이 제도적인 힘을 가지는 것은 최대한 막아야 하는 과제가 있는것 아니겠는지.

아버지의 기쁨은 부당하게 쫓겨났다가 선생님의 복귀 명령을 받고 교실로 돌아온 학생의 기쁨과 같았다. 삭막한 복도에 영영 추방되어 있으리라는 예상과 달리 갑작스럽게 친구들이 있는 교실로 돌아가는 것이 허락된 그 학생은, 벌칙을 면했을 뿐 아니라 아무 잘못이 없음을 인정받고 완전히 명예를 회복했다고 기뻐한다. 결국 아버지가 그 아이처럼 기뻐하는 것이 옳지 못한 걸까? 나에겐, 그렇다. 지난 두 달 동안 내게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던 고독감이 바로 그 순간 한층 더 심해졌다. 총제적이며 결정적이었다. 나는 나의 유배지에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 142

2018. j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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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 시간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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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의 마지막과 한 해의 시작이라는 건, 그저 인간이 정해 놓은 보이지 않는 기준선 같은건데.

사실 오늘이나 내일이나 겨울이고 눈이 오고 춥고 그런 날 중 하나일 뿐인데.

괜히 뭔가 한번더 생각하게 되고 의미를 부여하고 그러는 게 조금은 우스웠다.

그럼에도 올해 마지막으로 읽게 되는 책일까 싶어, 아껴두었던 한강의 책 중 하나를 꺼냈는데, 마지막 날 아침에 벌써 다 읽어 버렸어.

그럼 또 의미를 부여할 만한 올해의 마지막 책(이거나 내년의 첫 책)이 될만한 책을 골라야 한다.

희랍어 시간은 조용하다. 비록 그 안에 살아있는 캐릭터들의 내면은 들끓고 있을지라도.

정적이 주인공인 단편 영화 같다는 생각을 조금 했다.

그리고 한강은 언제나 좋다.


초등학교에 다니면서부터 그녀는 일기장 뒤쪽에 단어들을 적기 시작했다. 목적도, 맥락도 없이 그저 인상 깊다고 느낀 낱말들 이었는데, 그중 그녀가 가장 아꼈던 것은 ‘숲’이었다. 옛날의 탑을 닮은 조형적인 글자였다. ㅍ은 기단, ㅜ는 탑신, ㅅ은 탑의 상단, ㅅ-ㅜ-ㅍ이라고 발음할 때 먼저 입술이 오므라들고, 그 다음으로 바람이 천천히, 조심스럽게 새어나오는 느낌을 그녀는 좋아했다. 그리고는 닫히는 입술. 침묵으로 완성되는 말. 발음과 뜻, 형상이 모두 정적에 둘러싸인 그 단어에 이끌려 그녀는 썼다. 숲. 숲. - 14.

완전한 어둠 속으로 내가 걸어들어갈 때, 이 끈질긴 고통 없이 당신을 기억해도 괜찮겠습니까. - 49.

2017. d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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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할 만한 멋진 일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지음, 신해경 외 옮김 / 아작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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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를 자주 읽지는 않는데, 올 한해 추천받은 작품이 많았다.

올 해 마지막으로 읽게 될 책일 듯 싶어 <마지막으로 읽을 만한 멋진 책>으로 골랐는데, 재미와 속도감이 있어 의도보다 빨리 읽어버렸다.

1915년 생의 여성작가가 1960년대에 남성의 필명으로 쓴 이야기들인데, 너무나도 세련되고 음울한 색채감이 뛰어났다.

왜 페미니즘 sf라고 하는지는 읽어보면 금방 알게 되는데, 그 묘사와 서사들이 조금은 가차없어서 섬뜩한 느낌을 받게도 한다.

<서쪽으로 가는 배달 여행>, <돼지 제국>, <스노우>, <사랑은 운명, 운명은 죽음> 이 좋았다.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 여자, 행복하고 자유로워보였어, 게다가 그 여자 무척 재미있었어.
여보, 그게 그 여자 병이야. - 120, 서쪽으로 가는 배달 여행 중.

2017. d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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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7-12-30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헬라스 님 내년에도 두 고양이와 함께 힘차게 달려봅시다... 건투를 빕니다아.

hellas 2017-12-30 17:33   좋아요 0 | URL
:):) 즐거운 신년되시길. 힘차게 달릴께요. 고양이는 셋입니다>_< ㅎㅎ
 
모든 일이 드래건플라이 헌책방에서 시작되었다
셸리 킹 지음, 이경아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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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이라는 마법의 공간, 그곳의 이야기.

나는 대형서점을 무척 좋아하긴 하지만, 작은 서점이 조금 더 편안한건 어쩔 수가 없다.

요즘의 대형서점 인테리어는 좀 나아졌는데, 예전의 서점은 오래 머물면 숨을 쉬기가 어려운 증상?이 있었기 때문인데, 시선보다 높은 서가와 획일적인 공간 분리 형식이 약간의 폐소 공포를 유발했던게 아닐까 싶다. 비슷하게는 도서관 서가에서도 오래 있는게 힘들었으니까.

최근 독립서점, 작은 책방, 동네 서점들이 많이 늘었는데, 그것도 비교적 서울 중심가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내가 사는 동네에 그런 서점을 가지고 싶다는 욕심도 있지만, 책을 팔아 먹고 산다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를 이미 알아버렸기 때문에 그 양가 감정때문에 슬퍼지기도 한다.

어쨌든 이 책은 헌책방에서 생긴 일이다. 제목에서 명백하게 명시하고 있기 때문에 아마도 구매했을텐데.

사실 재미는 별로다. 캐릭터에 주어진 성격들은 매력적인데 정작 화자인 매기는 잘 모르겠다.

이 책이 올 해의 마지막 책이 아니길 바라며 얼른 다른 책을 골랐다.

우리는 점점 더 타협하고 안주해 가며 자신이 현실적이 되어 가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말하죠. 그렇지 않아요. 우리는 겁쟁이가 되어 가고 있을 뿐이에요. - 83

이 세상에는 이런 때를 대비한 카드들이 나와 있어서 우리가 직접 쓸 필요가 없지. 이 세상에는 우리가 추천해 줄 수 있는 책이 있고 두 사람이 지금의 감정을 다스리는 데 도움을 받을 단체나 모임도 있겠지. 하지만 그런 것은 아무 소용 없을 거야. 이건 슬픔이니까. 아프고 아프다 보면 언젠가는 아주 조금 덜 아픈 날이 올 거야. 그 날을 생각해. - 303

2017. d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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