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피크닉
온다 리쿠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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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km를 걷는다는 행위를 전제로 아이들이 성장한다.
물론 정체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들 어떠한가.
‘새삼스럽지만 희안한’ 밤을 걷는 행사는 일종의 극기이고 피크닉이라고 부르기엔 버거운 행위지만, 청춘들이 필연적으로 통과해야 하는 위험요소가 비교적 적은 어둠이라는 점에서는 성장소설의 영리한 장치가 된다.
주인공인 두 캐릭터가 특히나 성장하는 반면, 조력하는 캐릭터들은 왜인지 이미 무럭무럭 자라남이 완료된 상태인 점, 갈등 해소를 위한 ‘요정’ 캐릭터가 등장한다는 점은 작위적이기도 하다.

이야기 속 청춘들의 갈등은 아직까지는 무해하다. 주저앉아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것같은 좌절이 ‘아직’은 닥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순간, 그들이 간직한 순수함과 무구함이 개의 사체를 바라보는 순간 젊음의 오만으로 반전되었다. 이 사소한 장면에서 든 거부감은 아무래도 내가 더 이상은 ‘청춘이 아님’이기 때문일 것이다.
온다 리쿠가 그리려 했던 ‘관통’은 충분히 이해했으나 나에겐 이미 오래 전 건너온 시절이라는 냉소적인 생각이 읽는 내내 들었다.
다시는 다가오지 않을, 지나치면 다시 없을 순간들에 대한 예찬은 살다보니 희끄무레하게 바래진 사소한 기억일 뿐이다.
이제 내가 걷는 생은 익숙한 것들의 반복일 것이고, 지나쳤다 생각했으나 어쨌든 여기서 저기, 저기서 여기인 시간들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감상과는 별개로
청춘들이 통과할 어둠 속에서 그들이 진심으로 상처입지 않기를 기원한다.
온다 리쿠가 바라는 점도 그것이었을 것 같다.

보행제가 끝나버리면 이제 이 코스를 달리는 일도 없겠구나.
도오루는 왠지 마음이 이상해졌다. 당연한 것처럼 했던 것들이 어느 날을 경계로 당연하지 않게 된다. 이렇게 해서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행위와 두 번 다시 발을 딛지 않을 장소가, 어느 틈엔가 자신의 뒤에 쌓여가는 것이다. 졸업이 가깝구나, 하는 것을 그는 이 순간 처음으로 실감했다. - 19

한참 바람을 맞으며 해안의 길을 걷고 있자니, 자신이 더할 나위 없이 무방비한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향하고 있는 몸이 세계에 노출되어 있는 듯하여 왠지 안절부절못하게 되는 것이다. 건물 속에 들어가고 싶다. 어딘가 몸을 숨기고 싶다. 바다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도망쳐버리고 싶다. 그런 충동이 어디에서랄 것도 없이 솟구쳐 올라온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하는 것은 이런 기분을 말하는 것이겠지. - 90

정말로, 정말로, 사소한 내기였다. 내기라고 부를 것도 없는, 작은 바람이었던 것이다. 니시와키 도오루에게 말을 걸어, 대답을 듣는 것.
겨우 이것이, 이 단체 보행 동안에 자신과 한 내기였다.
얼마나 시시한 내기인지. 그러나 이 간단한 것이 3학년이 된 후- 아니, 지금까지 줄곧- 정말로 어려운 일이었던 것이다.
이겼다. 나는 이겼다. - 204

2018. s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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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길
존 하트 지음, 권도희 옮김 / 구픽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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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제목도 좀 그렇고(개인적 취향) 아마도 누군가 추천을 하지 않았다면 읽지 않았을 책이다.

기본적으로 깔린 정서는 암울.
영화 <세븐>을 보며 느꼈단 감정과 유사한 답답함(출구가 없는 깜깜한 상태.. 뭐 그런)이 느껴진다.
기쁨, 안도의 희미한 미소조차 보이지 않는 생존자들의 이야기가 600여 페이지에 걸쳐 이어지니 그럴만도 하다.

엘리자베스, 채닝, 애드리안, 기드온.
이 넷의 시련은 사슬처럼 이어져있고 애초에 합법적 방법으로는 이들의 해피엔딩을 기대할 수 없는 분위기가 펼쳐진다.

종교와 구원, 수호자로서의 법, 어느 하나 명쾌한 판결을 내리지 못한다. 그렇다고 이것이 완벽한 복수, 응징으로 끝나는 것 같지도 않다.
그래서 어쩔 수 없는 ‘암울’이 이 이야기의 키워드가 되버린다.

피해자로 머물러 있지 않는 두 여성 캐릭터가 없었다면 좀 시시했을지도 모르겠다.

부정적인 감상만 토로했으나, 이 책 엄청나게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다.
재밌다는 말이 어폐로 느껴지기는 하지만.

가해와 피해가 돈과 정치, 권력에 의해 모호해지지 않는 세상을 원하는 것은 순진한 발상일까 생각했다.

추천!

사람들은 자기들이 꼬여 있을 때는 똑바로 생각을 하지 못해. 보통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경찰도 그렇지. 난 네가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를테면요?
나쁜 남자들, 어두운 집.
그는 도와주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엘리자베스의 세상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나쁜 남자들과 어두운 집에서 일어나는 일들로 가득한 세상에서는. - 93

결국 문제를 바로 잡을 수 있는 건 한 가지밖에 없기 때문이지.
그게 뭔데요?
선택. 그녀는 소녀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너의 선택. - 134

2018.s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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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티-풀 테이크아웃 7
박민정 지음, 유지현 그림 / 미메시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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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속 ‘나’ 유리는 대체 무엇에 휩쓸려 다니는지.... ‘가스라이팅’ 이라는 것 외에 말이다.

소모적 관계에서는 물론 둘 모두 소진된다. 그러나 소모량과 방향성은 매우 다르다.
단지 자기 파괴적인 누구와, 주체를 상실한 채 파괴되는 누구.

파괴된 것이 아니라고 부정해야만 살아 갈 수 있는 누군가를 생각하며.
회복을 위해 파괴된 자신을 들여다 봐야만 하는 누군가를 생각하며.
그런 것은 내가 아니라고 말하는 누군가를 생각하며.

흑백의 거친 그림이 선명하다.

유리야, 다 네가 원한 거잖아.
나는 이렇게 더러운 것까지 바란 건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 말에 석현이 들고 있던 유리컵을 깼다. 석현은 네가 얼마나 고결하냐고 소리 질렀다. - 52

유리의 반평생을 걸친 자기 합리화가 청춘이라는 말로 오염되어 있다는 걸. 나 자신도 오래전부터 느껴왔다. - 작가의 인터뷰 중

2018. s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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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문 테이크아웃 10
최진영 지음, 변영근 그림 / 미메시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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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울컥하는 모먼트, 조용한 비애가 드리워진 남겨진 자의 독백.

자의로 생을 끝낸 동생에 대한 이야기인데, 무척 시리게 읽었다. 한 밤중에 읽은 것도 아닌데 감상적이 되어 버리고.

생이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된다.
당사자가 아니면 그 누구도 설명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 타인의 왈가왈부가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 그럼에도 화두를 던져야 하는 일.

친구 은호 캐릭터는 적은 분량 등장했으나 울림이 컸다. 은호의 모습에 훅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어간 것은 왜일까.

테이크 아웃 시리즈 중 두번째로 읽었는데, 이 시리즈 이미 충분히 마음에 들었다. 전권 소장각.

강추한다.

<최신우가 살아 있다면>이라는 가정이 불가능할 정도로 신우의 죽음은 단단한 뼈처럼 내 삶에 고정 되어 버렸다. 숱한 판단과 선택 틈에서,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말과 행동과 때로는 구원의 문제에서 나는 늘 신우를 생각하고 신경쓴다. - 17

장례 첫날 밤 교복을 입은 채 달려온 은호는 장례식장 구석에 검은 비닐 봉지처럼 구겨져 앉아서 꼼짝하지 않았다. 장례 둘째 날에 은호 어머니가 찾아와 조문을 하고 은호에게 이제 그만 집으로 가자고 했다. 그 전까지는 울지도 않고 넋이 나간 표정으로 영정 사진만 쳐다보던 은호는 집으로 가자는 말을 듣자마자 울기 시작했다. 은호 어머니는 혼자 장례식장을 나서야 했다. - 22

신우는 돈을 많이 벌고 싶어 했다. 담임 선생 말로는 희망 직업란에 부자라고 썼다고 한다. 그래서 야단을 쳤고 다시 쓰라고 했더니 이런 꿈이 차라리 낫지 않나요? 되물었다고 한다. 교수가 되겠다, PD가 되겠다, 의사가 되겠다, 그런 걸 꿈으로 가졌다가 죽어라 노력해도 안 되면 그땐 어쩔 것이냐고, 근데 부자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면 시험이나 입사에 실패하더라도 다시 무슨 일이든 하게 되지 않겠느냐고, 선택의 폭이 아주 넓어지는 거 아니냐고. 선생은 신우에게 직업의식과 사명감과 인생의 참 의미를 말했다고 한다. 신우는 대꾸했다. 어째서 내 꿈을 부정해요? 왜 나쁘게 취급합니까? 어른들도 그렇게 말하잖아요, 부자되세요. 대박 나세요. 그런 말을 좋은 말이라고 하잖아요. 그 말을 전할 때 선생의 표정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모욕을 당한 표정이었다. 모욕감이 주름처럼 얼굴에 남아 고스란히 표정이 된 것 같았다. - 43

난 정말 아는 것도 없으면서 사람들이 죽을까 봐 걱정만 한다. 걱정을 진통제처럼 소비한다. - 64

2018. s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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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7
시도니가브리엘 콜레트 지음, 송기정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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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레트의 자전적 이야기. 각색은 많이 된 듯 하지만...

인생의 후반전에 이르러서야 할 수 있는 말들이 있다.
초반부엔 내가 왜 자의식 만렙의 셀럽 작가(처음엔 그렇게 보였다...)의 넋두리를 읽고 있나 했는데, 어느 순간 전원의 분위기와 우아한 썅년의 아우라에 빠져들게 되었다. 존경의 의미다.
뭔가 전혀 예상과는 다른 그런 궤도를 그릴 것만 같은....

겪을 만큼 겪은 사랑, 질리기도 그립기도 한. 종국에 어떤 형태로 사그라드는지 잘 알고 있지만, 그 순간의 벅참을 외면할 수 없는 여자의 진실한 고백같았다.

편지로 소환되는 어머니의 기억들은, 작가의 마음이랄까, 되살리려는, 되살려는 시도가 공감을 불러왔다.

그나저나 당신의 초대를 거절한다. 곧 붉은 선인장이 꽃을 피울것 같기 때문에....라는 거절은 그야말로 멋지다. 멋진 엄마로 되살려 놓았다.

당신의 초대가 얼마나 감동적이지도 잘 아시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의 초대를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적어도 지금은 말입니다. 왜냐고요? 내가 기르는 붉은 선인장이 곧 꽃을 피울 것 같아서요. - 9

우리의 삶에서 가장 진부한 것 중 하나인 사랑. 그 사랑이 내게서 멀어져간다. 모성애는 또 하나의 진부함이다. 그 둘로부터 해방되고나면 다른 모든 것들은 즐겁고 다양하고 다채롭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때, 원하는 방식으로 그것들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 25

그 어떤 두려움도, 나 자신이 우스꽝스럽게 보일지 모른다는 우려조차도 이 글을 쓰는 것을 멈추게 하지 못한다. 내가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출판하고 말 이 글을...... 오랜 세월 동안 나에 대해 아는 것들, 감추고자 애썼던 것들, 생각해낸 것들, 짐작했던 것들을 정리해온 이 종이 위로 달리는 내 손을 새삼 왜 멈춘단 말인가? 사랑이라는 재앙, 그 과정들, 그 이후의 일들, 이런 것들이 한 여자의 진정한 속마음을 다 말해주지는 않는다. 그랬던 적은 한 번도 없다. 남성 작가들, 혹은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어째서 한 여성이 독자들에게 그토록 쉽게 사랑의 속내 이야기를, 사랑의 거짓과 기만을 누설할 수 있다는 사실에 아직까지도 놀라는 것일까?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폭로하면서 여성은 자기 자신도 잘 알지 못하던 부끄러운 비밀들, 엄청난 사실들을 드러낸다. 그녀가 수치심 없이, 신이 나서 마음대로 조작하는 눈은 커다란 환등기가 되어 때로는 행복이, 때로는 불화가 휩쓸고 가는 여성들의 영역, 늘 똑같은 그 영역을 샅샅이 비춘다. 그리고 그 주위의 그림자는 점점 더 짙어진다. 최악의 상황이 발생하는 곳은 빛이 가득한 환한 곳이 아니다. - 78

팔이 참 예쁘구나, 엘렌.
그녀는 우리 집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웃었다. 그러고는 부끄러워했다. 왜냐하면 부인네들, 그리고 처녀들은 남자들이 자신의 몸에 대해 찬사를 보내면 무덤덤하게 받아들이지만, 여자들로부터 칭찬을 받으면 더욱 뿌듯해하기 때문이다. 약간은 거북해하기도 하지만, 실은 남자들에게 칭찬받을 때보다 훨씬 더 깊이 감동받고 좋아하는 것이다. 엘렌은 웃었지만, 이내 어깨를 들썩해 보였다.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나한테?
꼭 무슨 소용이 있어야 하는 건가?
엉큼하게도 나는 그녀의 질문에 또다른 질문으로 답했다. - 88

이해해주겠지? 이제 삼십 년 동안 지겹도록 나를 괴롭혔던 그놈의 사랑 때문에 죽고 사는 것이 아니라, 슬프면 그냥 슬프고 기쁘면 그냥 기쁘고 그렇게 살려고 해. 요즘은 그래. 근사한 일이지. 너무 근사해. - 136

이 같은 삶의 태도를 배우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저 말투!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아 나는 자세를 고쳐 앉는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가버려라! 나타나려거든 내가 알아볼 수 없도록 몰래 오기를. 창문으로 뛰어내려 땅을 디디고, 꽃이 되어 꽃을 피우고, 새나 나비가 되어 날아가고, 소리가 되어 메아리쳐라...... 당신은 얼마든지 나를 기만할 수 있겠지만, 우리 어머니를 속일 수는 없으리라. 하지만 고통을 잊고 껍데기를 벗어던지길. 당신이 돌아왔을 때, 나의 어머니가 그러셨듯이 내가 당신을 붉은 선인장 꽃이라 부를 수 있도록. 아니면 불꽃처럼 힘겹게 피어나는 또다른 강렬한 꽃의 이름으로 부를 수 있도록. 마귀를 쫓아낸 미래의 진정한 이름으로 당신을 부를 수 있도록. - 172

2018. s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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