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우르르 꿀꿀 문학과지성 시인선 502
장수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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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시의 신비로운 능력

회색 두부에
꼿꼿한 혀 한 장, 박혀 있다
부러진 커터 칼날처럼
혀 없는 고양이 ‘두시’는
푸른 베일을 쓴 채
한쪽 발로
초승달의 목을 밟고 있다, 파르르
파르르
달은 숨이 할딱거린다.
파랗게 점점 파랗게 미미한 파도처럼
살짝
살짝 치 떨던 달은
차갑게 식는다
모든 낭만의 밤은 끝났다
고양이의 작은 발 주먹 아래서
두시의 등 뒤로 가끔 해변이 열리고
닫히고
누군가 들어갔다 나오지 않았다
거짓말 없는 밤이 지속되었다
혀 없는 고양이 두시는
버려진 괘종시계에서
두 시를 물어뜯었다
아무도 모른다
두 시가 없는 시계
두 시가 사라진 세계에서 우리는
끝나지 않는 라디오를
영원히 들으며
오래된 영화 음악 속에서
어쩌면 이 세계에 존재했을지도 모르는
두 시의 연인
두 시의 오해
두 시의 자살
같은 것을 떠올려 보았다
그러나 두 시는 돌아오지 않았고
두시 속에서
지겹게 곰팡이를 피우며
착한 사람들이 무더기로 죽어나갈
두 시의 파국을
지연시키고 있었다

개들은 백색 숲 사이로 스며드는 불같은 노을과 길어지는 자신의 그림자를 느끼며 서로의 이름을 불렀다. - 백색 숲의 골초들 중.

그래, 후배는 어떤 작업을 하고 있어?
시 써요
시?
그래, 우리는 한때 다 시인이었지
아니 그런 시 말고요 - 여자 햄릿 중.

총 끝에서 피고 지는
꽃의 율동이라니
이 여름도 한칼에 가겠지
휘어지는 여름의 극점
네가 나를 쐈을 때
나는 죽지 않기로 했다 - 여름의 도큐멘타 중.

아름답고 처연하고 웃기고
말도 안 되는 모든 장면들이
눈앞에 펼쳐졌지만
나는 아무 말도
아무 몸짓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외로운 고기가 된다 - 돌이킬 수 없는 중.

2017. n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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