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나를 깨운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90
황인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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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 봄에서 온 시.

곧 봄일 것이라는 당연한 사실과 이미 삼십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의 시라는 사실과.

두 개의 사실 중 무엇이 더 다가오는지는 각자의 판단이겠으나.

그 속에 나는 없구나(깨어진 손 중.)하는 자각과 그 속에도 내가 있구나 하는 자각.



슬픔이 나를 깨운다

슬픔이 나를 깨운다.
벌써!
매일 새벽 나를 깨우러 오는 슬픔은
그 시간이 점점 빨라진다.
슬픔은 분명 과로하고 있다.
소리없이 나를 흔들고, 깨어나는 나를 지켜보는 슬픔은
공손히 읍하고 온종일 나를 떠나지 않는다.
슬픔은 잠시 나를 그대로 누워 있게 하고
어제와 그제, 그끄제, 그 전날의 일들을 노래해준다.
슬픔의 나직하고 쉰 목소리에 나는 울음을 터뜨린다.
슬픔은 가볍게 한숨지며 노래를 그친다.
그리고, 오늘은 무엇을 할 것인지 묻는다.
모르겠어...... 나는 중얼거린다.

슬픔은 나를 일으키고
창문을 열고 담요를 정리한다.
슬픔은 책을 편쳐주고, 전화를 받아주고, 세숫물을 데워준다.
그리고 조심스레
식사를 하시지 않겠냐고 권한다.
나는 슬픔이 해주는 밥을 먹고 싶지 않다.
내가 외출을 할 때도 따라나서는 슬픔이
어느 결엔가 눈에 띄지 않기도 하지만
내 방을 향하여 한발 한발 돌아갈 때
나는 그곳에서 슬픔이
방안 가득히 웅크리고 곱다랗게 기다리고 있음을 안다.

2017. Feb.

나는 아직 무사히 쓸쓸하고
내 쓸쓸함도 무사하다네. - 비유에 바침 중.

그는 자기가 죽은 것을
그다지 슬퍼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조금, 아주 조금
외롭고
길거리 나무 그림자보다 깊이
몸을 두지 못한 것이 난처할 뿐. - 죽음 위의 산책 중.

생이 짙게 다가온다, 마치
면도날에 살을 베면
의혹에 차서
하얗게 침묵하고 있다가
서서히 배어나는
피같이
향기로운 꽃 만발한. - 돌아오라, 소렌토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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