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없는 세대 문지 스펙트럼
볼프강 보르헤르트 지음, 김주연 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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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전야에, 전쟁 한 가운데.. 그 혼돈의 시대가 풍기는 불운과 자포자기의 냄새.
희망을 버릴 수도 낙관을 기대할 수도 없는 세대의 체념.

어쩌면 이 책은 <이별없는 세대>를 읽기 위해 읽어낸 책인지도 모르겠다. 공허한 선언이고, 희망이 있지만, 그 희망은 목적으로서의 희망이기만 한 것 같기도 한데, 전쟁세대에게 느껴지는 그럼 열패감은 현재의 세대들도 충분히(어쩌면 더) 느껴질 동질감아닐까 한다.

차마 길게 남기기 어려운 기억들이라 짧게 끊어 쓴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신의 존재에 의구심을 갖고, 신을 비난하고 신에게 의탁할 수 밖에 없는 가련한 자아의 상념들.


- 가고 있다. 그러나 열차는 항상 너를 역 위에 뱉어내고, 이별과 출발은 피할 길이 없다. (...) 너는 인간이다. 너의 뇌는 기린처럼 외롭게 끝도 없이 긴 목 위 어디엔가 붙어있다. 그리고 네 마음을 속속들이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 33

- 고통으로 가득 찬 밤에는, 우리의 술에 젖은 탁자와 꽃이 피어나는 잠자리와 고성방가로 넘쳐 울리는 거리에는, 전율과 공포와 절망과 벗어날 길 없는 막다른 골목이 있어. 그러나 우리는 웃지.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살아가고 있어. 우리 존재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 61

- 우리는 만남도 없고 깊이도 없는 세대다. 우리에게 깊이는 끝모를 나락이다. 우리는 행복도 없고 고향도 없고 이별도 없는 세대다. 우리의 태양은 희미하고, 우리의 사랑은 비정하고, 우리의 젊음은 젊지 않다. 우리에게는 국경도 없고 제약도 없고 보호막도 없다. 그런 우리를 경멸하는 사람들이 있는 세상으로 어린 시절 울타리에서 내쫓긴 세대다. 하지만 그들은 세상의 모진 바람이 몰아칠 때 우리의 마음을 의지할 수 있는 신을 마련해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우리는 신이 없는 세대다. 우리는 만남도 없고 과거도 없고 인정받지도 못하는 세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도착의 세대다. 어쩌면 우리는 새로운 벽에, 새로운 삶에 다다르는 도착의 세대다. 어쩌면 우리는 새로운 사랑에, 새로운 웃음에, 새로운 신에게 다다르는 도착으로 가득 차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별없는 세대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도착이 우리의 것임을 알고 있다. - 95

- 하지만 그건 명령이었어. 한 사내가 속삭였다.
하지만 그건 우리가 한 짓이야. 다른 사내가 소리쳤다.
하지만 끔찍한 일이었어. 한 사내가 자조하듯 말했다.
하지만 이따금 재미있기도 했지. 다른 사내가 웃으면서 말했다.
아니야. 속삭이듯 말하던 사내가 소리 질렀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가끔 재미있었지. 다른 사내가 속삭였다. 정말이야, 정말로 재미있었어.
사내들은 몇 시간 동안 캄캄한 밤속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잠들지 못했다. 그러다 한 사내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신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어.
하지만 신은 변명거리일 뿐이야.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다른 사내가 말했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첫번째 사내가 물었다.
그게 신 자신이 하는 유일한 변명이지. 두번째 사내가 대답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는 존재해. 첫번째 사내가 속삭였다.
그래. 우리는 존재하지. 다른 사내가 속삭였다.
아주 많은 머리를 박살내라고 명령을 받은 두 사내가 잠들지 못하고 캄캄한 밤 속에 앉아 있었다. 머리들이 나지막한 천둥소리를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한 사내가 말했다. 그냥 이렇게 사는거야.
그래, 그냥 이렇게 사는거야. 다른 사내가 말했다. - 130

2019. n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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