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신애 단편집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백신애 지음, 김문주 엮음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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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대의 언어로 쓰인 말이라 낯설지만 입말로 해보면 충분히 쉽게 읽을 수 있다. 다만 인용을 올
리는 부분에 있어 기술적인 문제로 안타깝지만 나름의 번역으로 인용한다.

<나의 어머니>
- 연습을 시키고 있는 나는 아직 예전 그대로의 완고한 시골인만큼 일반에게 비난을 받지나 않을까?...하는 여러가지로 완고한 시골에서 신여성들의 취하기 어려운 행동에 대한 고려를 하지 않을 수 없어서 다른 위원들과 같이 여러번 토론도 하여보았으나 내가 없으면 연극을 하지 못하게 되는 수밖에 없다는 다른 위원들의 간청도 있어서 나는 끝까지 주저하면서도 끝까지 일을 보는 수밖에 없었다. - 3

- 보통학교 교원으로 있던 내가 여자 청년회를 조직하였다는 이유로 학교 당국으로부터 일조에 권고사직을 당하고 나서는 그대로 할 일이 없으니 부득이 놀 수밖에 없이 되었다. 그래서 날마다 먹고는 식구가 단촐한 얼마 안되는 집안일이 끝나면 우리 어머니의 말씀마따나 빈둥빈둥 놀아대인다. 어떤 때는 회관에도 나가고 또 어떤 때는 가까운 곳으로 다니며 여성단체를 조직하기에 애를 쓰기도 하고 그렇지 않으면 하루 종일 또는 밤이 새이도록 책상 앞에서 책과 씨름을 하는 것 뿐이다. 한푼도 벌어들이지 못하지마는 어쩐지 나는 나대로 조금도 놀지 않는것 같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 어머니는 종종 “아까운 재주를 놀리기만 하면 어쩌느냐!’고 벌이 없는 것을 한탄하시기도 한다. 벌이를 하지 않으면 아까운 재주가 쓸데 없는 것이라는 것이 우리 어머니의 생각이다. - 4

사랑하는 가족이지만 근대적 여성관을 떨치지 못한 시대에 신여성으로 살아가는 주인공의 답답한 심경이 담겨있다. 시대를 앞서 뛰어난 지성과 인식을 갖는다는 것이 과연 재능인가 생각한다. 그 생각의 끝은 자조가 아니라면 좋겠다. 편이기를 바라고 충분히 편이 되줄 수 있는 이들에게 비난받는 당시 여성들은 얼마나 외롭게 그 자리에 서있었던 것일지.

<꺼래이>
- 그저 순이들은 바람맞이에서 까물거리는 등불을 두 손으로 보호하듯 냉각해진 몸둥어리 속에서 까물거리는 한 끼의 ‘삶’이란 그것만을 단단이 안고 무인광야를 가듯 웅크려질 대로 웅크리고, 눈물 콧물 흘려가며 쩔룸쩔룸 걸어갔습니다. - 23

- ‘꺼래이’라는 그 귀에 익고 그리운 소리가 그때의 순이들에게는 끝없는 분노를 자아내는 말 같았습니다. - 30

무력하게 신세한탄만 하는 무리 중 용기를 내 권리를 주장하는 여성 ‘순이’. 그들의 고난과 차별을 어찌 다 알 수 있겠냐마는, 온 몸이 시린 기분이다.

<적빈>
- 자기도 예 세월 같았으면 너희들은 감히 나의 집에도 만만히 못 들어올 상놈들이다 하는 뜻을 암시하여 양반자랑을 한 것은 지금 생각하면 다- 우스운 일이었다. ‘돈 없고 가난하면 지금 세상은 이런 것’이라 하는 것만은 날이 갈수록 더 똑똑하게 알리어질 뿐이었다. - 58

극단의 가난이 인간을 어떻게 야만적으로 만드는지. 문학에서 종종 비춰지는 가난의 전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이 경우라면 왠진 다르게 느껴졌다. 왜일까? 여성 작가가 그려낸, 가장 밑바닥에서 고스란히 모든 피해를 떠안는 여성의 이야기라서 일까 생각했다.

<광인수기>
-내 이놈 하느님아, 얘이 빌어먹을 개새끼같은 하느님아.(...) 저 빌어먹다 낮잠 잘 하늘님은 저를 위해주고 겁내하면 할수록 점점 더 건방이 늘고 심술이 늘어가드라. 나를 영 사람으로 여기지 않더라. - 81

- 아예 당초에 인간이란게 공부를 잘못하면 제 행동이 옳든 그르든 간, 아니 아무리 틀린 일이라도 교묘하게 이론만 갖다붙여서 그저 합리화하려고만 하는 재주만 늘어갈 뿐인 것이라오. - 108

미친 여자의 넋두리라 위장한 통렬한 가부장제의 비판이다. 어딜봐서 이 여자가 미친 여자일까. 세상이 억울해서 미친 여자로 만들었을 뿐.

<아름다운 노을>
- 울지 말어요, 사람의 삶이란 괴로움이란 것이야요, 괴롬이 즉 삶이란 말이지요. - 123

성별과 연령 반전의 비극 로맨스랄까. 여성 문인이 드문 시절이라도 이러 시도가 없으리라 생각지는 않았지만, 막상 보니 반갑다. 비극이라도......

빈궁문학, 현실주의문학, 여성주의 문학이라...
왜 이제야 읽게 되었을까. 좀더 이 시기의 여성주의 작품들을 읽어보고 싶다.

2018. n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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